사탄의 소리인가 천사의 소리인가 /자유연재
대표적인 실존주의자를 꼽으라고 하면, 키에르케고르 다음으로 아마도 사르트르를 꼽을 것 같습니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의 결은 많이 다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신과의 관계 안에서의 실존을, 사르트르는 인간 홀로로서의 실존을 다루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사르트르가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 그 자체에 집중한 것이죠.
이러한 사르트르가 아브라함을 보는 시각은 키에르케고르와 많이 다릅니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였습니다. 그는 인간에 대하여 '자유 그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유가 인간을 인간 되게 하며, 인간은 자유를 누림으로써 인간다운 인간이 됩니다. 이것은 그가 아브라함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키에르케고르에서 아브라함은 신 앞에서 '결단'했다면 사르트르에서 아브라함은 홀로 주체적으로 '결정'했다고 할까요.
아브라함아,
네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아브라함이 들은 '이삭을 바치라'는 그 소리는 신의 뜻일까요? 인간이 거절할 수 없는 신의 명령이 아브라함의 실존 전체를 사로잡아서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단순히 '복종'했던 것일까요. 사르트르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그 소리가 사탄의 소리가 아니라 천사의 소리였다고 결정하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었다고 봅니다. 이것은 신의 소리가 '맞다 / 아니다'라는 단순한 시비의 논점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자유로운 결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소리를 무시할 수도 있었고, 신의 메시지가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스스로 그것을 신의 소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보는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
주여 왜 이런 시험을 던지시나이까
제가 언제 먼저 달라고 했나이까
당신께서 먼저 와서 주시지 않으셨나이까
아니다 이것은 주의 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필시 악마가 나를 시험하는 것일게야
이것은 신의 계시일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주의 소리를 안다
말씀하실 때 내 안에 울리는 두려움과 떨림
내 마음의 고요 가운데 내 영혼의 깨어남
주여
당신은 신실하시고 전능하시고 약속을 주신 분이시니이다
나는 당신의 약속 안에 거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