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벼락이 내려 우리 둘 다 죽게 하소서 /자유연재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아! 이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인가.
아브라함은 결국 모리아산에 가서, 신이 지시하였던 그곳에 이르렀다.
이까지 오는 길에, 속으로 얼마나 많이 외치며 물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정녕 당신의 뜻입니까? 정말 이것이 맞습니까?
침묵 속에 제단을 만들어 장작을 올려놓았다.
신의 침묵 속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기 시작했다.
이삭의 저 표정은 황당함인가 허망함인가 체념인가.
아니면 그저 아비를 믿는 것인가.
최대한 동작을 굼뜨게 했다. 그리고 살살, 조용히 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내는 소리에 신의 음성을 놓칠세라 귀를 바짝 세웠다.
이제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제물을 잡는 일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도 신은 묵묵부답이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이 모든 것을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되무를것인가.
손에 칼을 쥐었다. 칼이 전에 없이 미끌거렸다. 땀이 너무 많이 흐른 까닭이다.
칼을 다시 놓을까. 아니면 팔을 들어 올릴까.
신이시여, 차라리 이 순간 벼락이 내려 우리 둘 다 동시에 죽게 하소서.
팔을 들었다.
눈을 감았다.
어깨에 경련이 이는 듯했다. 칼을 쥔 손을 아래로 뻗기 위해 팔꿈치 각도를 틀려는 그 순간,
아브라함은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 하나님이 진정 이곳에 계시구나.
지금껏 망령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 아니었구나.
여호와.. 이레!
모리아산에서의 아브라함의 결단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미친 짓이라고 하지 않았다. 실존에서 이것은 미친 짓일 것이다. 어린 자녀를 바치라는 신이 어딨겠는가, 있다고 해도 그런 신을 뭐하러 믿겠는가. 윤리에도, 자연법에도, 양심에도 맞지 않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선 지평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이것이 생철학과 실존철학의 다른 지점이다. 실존철학은 실존 가운데서 실존을 넘어서 있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의 실존을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은 결단을 했다. 결과는 해피엔딩이지만, 그러나 그 과정은 참혹 그 자체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결단의 순간이 우리의 실존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의 실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을 넘어선 것을 요구받는 순간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결단을 생각한다. 반드시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간의 생 가운데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으랴. 오만 일이 다 일어난다.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은 우리의 실존 가운데서 '신 안에서의 결단'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