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의 소중함
정확히 3개월 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남편은 혹여나 발생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 지하주차장서 두세 번 시운전을 하고 도로로 나가라 신신당부했다. 오른쪽 발목 부상으로 브레이크 잡는 것이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은 작정을 하고 차에 올랐다. 예상대로 얼음장 같은 두려움이 내려앉았다. 운전경력 30년 차가 무색할 지경이다.
짧은 다리에 의자시트를 단단히 당겨 거리를 맞추고 시동버튼을 눌렀다. 변속레버를 주행에 놓고 슬며시 엑셀레이터를 밟아본다. 느낌이 좋다. 옆지기의 충고를 단단히 무시하고 바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며칠 우중충했던 날씨는 오간대 없고 정오의 햇살만이 도로를 점령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한 손으로 운전대를 다른 손으로 음악버튼을 눌러본다. '아! 이게 자연스럽게 되네.' 때마침 장윤정의 ‘사랑아’가 작정이라도 한 듯 흘러나온다. 이때를 놓칠세라 나도 덩달아 엉덩이를 둠칫둠칫 하여본다.
'100일이 지났어도 내 몸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구나!' 두려움이 해냈다는 안도감으로 순식간에 변신하는 순간이다. 여유롭게 차 안에서 사진도 찍어본다. 적당히 기분을 좋게 하는 뽕짝 비트, 그리 복잡하지 않은 도로 위 사정, 잔잔히 부서지는 정오의 햇살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긴 터널을 지나 오랬만에 느껴보는 자신감과 행복감. 나, 음악, 자동차가 하나되는 순간이다.
서점에 들러 예약해 놓은 도서 5권을 수령하니 내 배는 벌써 만삭이다. 5년 이상 듬성듬성 마주한 서점지기와 이런저런 안부를 건넨다. 봄이라 그런지 주인장 안색이 밝아 보인다. "혈색이 좋아졌어요"라고 맘에 있는 소리를 한껏 하고 마트로 향했다. 사과는 여전히 금값이고 달래와 시금치는 초록초록 색깔을 뽐내며 간택해 달라 아우성이다. 찬찬히 들여다보고 이것저것 필요한 식재료를 카트에 밀어 넣었다. 오늘은 봄나물로 거하게 한 상 차려낼 심상이다. 시장 놀이가 이리 재미난데 옆지기는 시키는 족족 엉뚱한 걸 사 오니 아무리 생각해도 화성에서 온 남자가 분명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또다시 음악을 틀어본다. 되돌리기로 장윤정의 '사랑아'를 재장전하고 들썩일 엉덩이를 생각한다. 솥뚜껑 30년 음식솜씨는 늘 바닥이지만 운전경력 30년, 차 안에서 유희는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이다. 기분이 들떠 바라본 도로옆 건물엔 햇살이 가득차 올랐다. 그간에 아픔이 일순간에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아, 이리 행복해도 되는 건가?' '아, 이리 눈물이 나도 되는 건가?' 너무도 쉽게 느껴버린 소소한 행복에 약간의 눈물이 고여 내린다.
얼마 전 악성림프종으로 6차례 항암치료를 받고 결과가 양호하다는 말에 "그럼 이제 강아지 키워도 되나요?"라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물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묵직한 무언가를 눌러 담았다. 강아지를 데려와도 된다는 소식에 함박웃음이 지었을 그. 그가 평시에 애지중지하던 강아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에, 내가 평시에 운전하고 책빌리고 시장 보는 일상에 이리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새삼 놀라웠다.
젊고 바삐 살 때는 느끼지 못한 물음들이다. 그나 나나 어두운 터널서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아무 의미 없이 그럭저럭 흘려보냈던 일련의 움직임들이 가장 의미 있는 그 무엇이었다. 대단치 않은 소소한 움직임들이 가장 소중한 행복의 미천이었다. 대단하지 않은 일상이 내 안의 소중함으로 가득 차 오른다.
행복이 별 건가? 내일이 주어진다는 보장도 없는 오늘. 아파본 사람은 안다. 오늘 하루가, 건강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픔을 마주하고 나서야 건강의 중요성을,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십원에 산 일상이 백억이 되어버린 하루다. 나에게 일상은 어느 틈에 로또가 되어버렸다. 호호 불며 평생을 사랑해야 하나? 하루하루가 산더미처럼 불룩하게 쌓여 내안의 반짝임으로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