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 본 브러치의 글들은 <표류사회 : 한국의 가족문화와 여성 인식의 변화사>(가제) 라는 이름으로 2021년 9월 말 경에 출간되기로 하였습니다.
영화감독 김조광수, 국회의원 양이원영 등. 근래 부모님의 성씨를 붙여 쓰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아버지의 성만 쓰는 남성중심․부계 중심 풍조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쓰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성씨 사용법에 따르면 부모의 성씨 모두를 사용하는 것은 익숙지 않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똑같이 성씨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일각에선 반발과 조롱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이최 갑수’와 ‘강이 영희’가 결혼하여 ‘주현’이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이최강이 주현’이 되는 것인가? ‘이강 주현’이 되는 것인가? 오랜 시간 동안 자리 잡아 온 규칙을 표면적으로만 뒤바꾸려니 혼선이 생기고 만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혈통을 모두 존중하고자 하는 관점은 많은 논쟁거리를 안겨준다. 더불어 하나의 고정관념 앞에서 똑같은 논쟁이 무한 반복된다. 그 고정관념은 바로 유교 식의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는 것이다.
유교의 입장에서는, 밭에 콩을 뿌려야 콩이 나듯 어머니란 밭에 아버지의 씨가 뿌려진 결과가 자식이라 본다. 즉, 생명을 낳는 것은 남성이므로 혈통을 상징하는 성씨는 남성을 통해 계승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리는 같은 혈통(성씨)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가문(家門) 중심 가족문화’와 ‘가문 의식 물려주기’인 주자학 방식의 제사로 귀결된다. 가문 의식은 다른 혈통과의 분별과 차별을 전제로 한다. 시조(始祖) 이야기로 특별함을 강조하고 제사로 끈끈한 혈연을 확인하며 배타성을 드러낸다. 바로 이것이 현재까지 내려오는 가문과 제사 문화의 실체이다.
우선 성씨의 유래와 발달 과정을 통해 그것이 ‘진정한 전통’이 맞는지부터 살펴보자.
아이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전자 검사를 해 보지 않는 이상 아이의 아버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때문에 고대에는 부족 전체가 가장 윗대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았다. 즉, 본래 성의 기원은 ‘어느 어머니의 혈통인가’를 표시한 것이었다. 그래서 성(姓)이란 글자는 ‘여자(女)‘와 ‘낳다(生)’는 글자가 합해 이루어졌다. 때문에 고대의 성은 당연히 모계로만 전해졌다. 하지만 세대가 내려오며 자손이 많아지고 다양한 아버지이 계보로 친족 관계가 복잡해지자 좀 더 구별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왕, 제후, 관리 등 업적이 있는 아버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씨(氏)’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씨는 주로 아버지의 직업, 역할, 출신 지역 등을 표시하여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유교의 초기 기록에 보이는 농경을 발달시킨 신농씨(神農氏: 농사의 신이라는 뜻), 치수 공사를 잘한 공공씨(共工氏: 공공시설 건축공사를 잘했다는 뜻) 등이다.
사례를 하나 들어 보자. 낚시꾼들에게 유명한 강태공은 어머니의 성과 아버지의 씨를 구별해 함께 쓰던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강태공의 모계 성은 강(姜)이고, 부계의 씨는 여(呂)이다. 그의 이름은 자아(子牙)이며 호는 태공망이었고 상(尙)이란 지역에 살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강자아, 강태공, 강상, 태공망, 여상, 여망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이처럼 성과 씨를 구분해 쓰던 전통은 춘추전국시대까지 이어졌다. 때문에 『논어』 『예기』 같은 유교의 고전에도 동일인을 성으로 불렀다가 또 씨로도 부르는 모습이 종종 보이곤 한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며 같은 성 안에서도 아버지의 계통이 너무 다양해지자 진시황은 이 복잡한 성씨 제도를 통일시켰다. 그리하여 모계 혈통을 나타내던 성은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씨로 흡수·통일되었다. 본래 모계 성은 부족의 큰어머니가 살던 땅 이름으로 정했었는데, 그 유습이 남아 전주 이씨, 김해 김씨 등 ‘본관(땅이름) + 씨’의 형식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