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중국식 부계 성씨 제도가 들어온 것은 대략 6세기 전후이다. 신라 진흥왕 대 이전의 비문(碑文)에는 성씨를 쓴 이름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중국식 성씨 제도가 이 땅에 도입되고서도 오랫동안 왕실이나 소수의 귀족, 대당 유학생들만이 성씨를 사용했다. 대다수 사람은 성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삼한의 후예’, ‘신국의 백성’ 등의 같은 공동체 일원임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개인의 부계 혈통을 따져 네 집안, 내 집안을 구별 짓는 ‘씨’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 초까지도 장가와서 사는 사위는 처가에 나가 사는 아들보다 더 가까운 존재였다. 즉, 가문이니 혈통이니 하는 큰 명분 속에서 상대를 보기보다, 현실적 관계 그대로 상대를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성보다 이름이 중요했고, 가문보다 같이 사는 실질적인 가족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의식은 오늘날까지도 흔적을 남겨, 혼인 후에도 여성은 남편의 성씨로 개명하지 않고 자신의 성씨를 유지하는 문화를 보여준다.(우리에게는 자연스럽지만 전 세계적으로 혼인한 여성이 남편의 성씨를 따르지 않는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사실 이러한 관념은 매우 오래된 것이었다. 신라에는 성씨 제도의 초기 개념인 ‘모계 혈통의 표식[姓]’이 남아 있었는데 바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란 계보였다. 당시 성씨는 중국과 대외 관계를 해야 하는 왕과 귀족만이 사용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아버지나 어머니의 성씨를 골라 쓰거나 새로 만들어 쓰기도 했다. 하지만 모계 혈통의 계보는 어떠한 경우에도 바꿀 수 없었고, 신분과 계통을 나눌 정도로 강력했다. 당나라와 교류하며 유교식 성씨 제도를 들여와 쓰긴 했지만 본래 갖고 있었던 ‘모계 혈통’의 관념은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신라 후기에는 11개의 성씨가 자리 잡았는데 신라가 통일하자 고구려, 백제의 성씨들은 거의 사라지고 신라의 주요 성씨들이 주로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 온다. 그렇다면 현재 보이는 5,587개나 되는 성씨들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한국의 성씨[姓氏]는 전통적으로 270여 개가 있다.)
성씨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고려 시대부터이다. 태조 왕건의 29명의 장인 중 5명은 성씨가 없었다. 왕과 사돈을 맺을 정도의 귀족이어도 성씨를 사용하지 않던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성씨 제도는 ‘전주 + 이씨’처럼 지역명을 함께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넘치는 유랑민들을 일정한 땅에 묶어 두는 장점이 있었다. 더불어 지방 호족을 중심으로 성씨를 보급했기에 신분제를 안정시키는 역할도 했다.
때문에 왕건은 지속적으로 성씨 제도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재위 23년에는 전국적으로 성을 나눠 주는 토성분정(土姓分定)을 실시했다. 전국의 지방 호족들, 즉 요즘 말로 지역 유지들에게 지역 이름을 본관으로 삼아 성을 만들어 쓰게 한 것이다. 더불어 공로자들에게 왕실의 성인 왕씨나 유명한 집안의 성을 하사하고, 중국에서 온 귀화인들은 고려의 처갓집 성을 쓰게 했다. 또 오늘날 해외 명문대 유학생들이 졸업장을 벽에 걸어 놓기도 하듯, 유학생․사신들은 중국의 유명한 성씨를 갖다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의 기원과 시조에 대한 수많은 조작과 과장이 생겼다.
게다가 고려는 현재와 같은 부계 중심 가족문화가 아닌, 부계와 모계를 모두 존중하는 양계(兩界)적 가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와 그 이전인 삼한 때부터 내려온 오래된 가치관이었다. 때문에 성씨는 반드시 부계로만 전해지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 외할머니·어머니·아내의 성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성씨를 쓰는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대다수 백성은 성씨를 쓰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조선 중기인 1476년에나 간행되었다. 더불어 광해군 때는 나라에서 공명첩을 팔았고, 조선말에는 쇠락한 양반들이 족보를 팔았다. 그 결과 조선 초기 10%도 안 되던 양반들은 조선 말기 70%로 급증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자 조선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던 노비들은 단체로 주인의 성씨를 받거나, 기존의 유명한 성씨 족보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갔다. 1909년에는 일제가 민적법을 실시하면서 집집마다 돌며 성씨를 등록받았다. 그때도 성이 없던 사람들은 당시 권세 있는 가문의 유명 성씨를 자신의 성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씨가 곧 양반이자 ‘존중받을 인간’을 의미한다는 관념이 남아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당했던 이 땅의 여성들은 유교 성리학과 양반 의식이 지배하던 조선 시대 말 무렵에는 성씨는커녕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20년대 선교사의 눈에 보인 당시의 모습은 이러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 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이 엄마’ ‘큰 년’ ‘작은 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_(선교사 엘리제 셰핑이 1921년 내슈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