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출신인 고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그야말로 빈털터리 신세였다.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고, 유화부인이 보리 종자를 비둘기 입에 물려 보내줄 정도였으니 탈출하는 데 얼마나 급급했는지 알 수 있다. 가진 것이라고는 따르는 자 몇 명과 유화부인이 보내 준 약간의 보리 종자뿐이었다.
겨우 탈출에 성공한 빈털터리 주몽이 마침내 졸본왕을 만났을 때, 왕은 한 눈에 주몽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둘째 딸 소서노를 소개했다. 마침 소서노는 남편과 사별한 뒤,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졸본에 와 있던 참이었다. 소서노 역시 주몽의 사람됨을 한눈에 알아보고 혼인을 승낙했다. 지혜가 성숙해지기 시작한 중년(당시 37세)의 과부 공주 소서노는 다행히 조선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여성임에도 엄청난 재력을 소유하고 운용할 수 있었다.
소서노는 22세의 어린 주몽을 새신랑으로 맞아 물심양면으로 이끌었고, 결국 둘은 고구려를 건국했다. 딸에게 가업과 재산을 물려주고 여성도 자유롭게 경제와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몽의 전 부인이 낳은 아들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오고 주몽이 유리를 후계자로 정하면서 소서노는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되었다.
흔히 자식을 키워 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들 한다. 한 생명을 낳고 길러내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일국의 여왕이자 두 아들의 어머니였던 소서노가 선택한 것은 ‘평화’와 ‘창조’였다. 비록 소서노의 재력을 바탕 삼아 세워진 고구려였지만, 평화를 선택한 그녀는 모든 것을 유리에게 넘겨주고 두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웠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를 이렇게 평했다.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실제로 백제 창건 13년 만에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자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와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다”라며 도읍을 옮길 정도였다. 때문에 단재 선생은 백제의 시조가 ‘소서노 여대왕’이며 백제 건국 후 13년간은 소서노의 치세 기간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소서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한때 백제의 중요한 국신(國神)으로 모셔졌고, 또 역대 어느 왕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소서노를 우리는 왜 잃어버리고 말았을까?
홀로 자식들 키우는 과부이면서도 막대한 재력을 갖추고, 나아가 자신의 능력으로 새 남편과 두 아들을 왕으로 만든 소서노. 그녀의 행적 하나하나는 주자학의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남성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여성, 죽을 때까지 한 남성에게만 절개를 바치지 않은 여성, 규방 밖으로 뛰쳐나와 정치와 경제에 참여하는 여성, 왕비이면서 왕을 버리고 떠나 새 나라를 세우고 신으로 모셔진 여성.
그러한 여성상은 주자학이 꿈꾸던 여성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부흥과 함께 소서노의 이름은 우리 역사에서 점점 지워져 갔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 시대까지도 소서노가 여성이기에 할 수 없는 일은 없었다. 여성이라서 하지 못할 일도 없었다. 때문에 소서노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꿈을 실현하며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서노가 우리에게 새삼 특이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조선의 모습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지혜를 깨우쳐야 한다는 온고지신이 필요한 순간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고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관점, 그리하여 남녀가 서로 돕고 인정하며 함께 더 큰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던 가능성,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평등에 관한 해답은 오히려 과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