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딸은 어떤 존재였을까?
| 고려에서의 딸의 존재 |
딸이 친정에서 지내는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아들과 딸의 권한은 큰 차이가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호적이다. 고려에서는 호적을 정리할 때 아들딸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했다. 집안에 장남이 있더라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호주는 그다음 어른인 어머니가 됐다. 남편이 죽으면 아들 밑으로 들어가 평생 남성의 통제 아래서 살던 조선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외에도 여성에게 특별한 공로가 있으면 남편과 상관없이 별도의 봉작을 내렸다. 가령 아들을 세 명 이상 고위 관료로 키워낸 여성에게 상으로 봉작을 내리는 식이었다. 남편의 벼슬에 따라 아내의 봉작과 지위가 정해지던 조선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부계 중심의 가문적 가족문화를 추구하는 유교 문화에서는 ‘가족 돌봄, 부모 봉양, 조상 제사’의 짐을 다른 성씨인 며느리에게 오롯이 돌린다. 집안 내의 같은 성씨들은 다른 성씨인 며느리의 외로운 노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같은 여성이자 나이까지 어린 시누이도 올케 언니에게 존댓말을 듣고 돌봄을 받는다.
하지만 신라나 고려같이 부계, 모계, 처계를 모두 중요시 한 가족문화에서는 아들과 딸의 역할이 비교적 공평했고, 심지어는 딸을 더 좋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17세기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고려의 풍속을 생각건대 아들과는 함께 살지 않을지언정 딸은 집에서 내보내지 않으나, 진나라 때의 데릴사위 제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무릇 부모 봉양하는 것은 딸이 맡아서 주관하는 일입니다.” _(고려 말 문신 이곡)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가서 사위가 장인 보기를 자기 어버이처럼 하고, 장인은 사위 보기를 아들처럼 하니 온전히 처가의 은혜를 받습니다. _(세종대왕 시절 한성부윤 고약해)
생각해 보면, 가족 대소사와 부모 봉양은 며느리보다 직접 부모의 은혜를 입은 아들과 딸들이 나누어 부담하는 게 인정상 합당하다. 그렇기에 고려는 ‘집안에서 살림만 하며 시댁에 헌신하고 남성에게 의지하는’ 유교식 여성상으로 딸을 키우지 않았다. 고려 역시 다른 나라, 다른 사회와 똑같은 가부장제의 사회였지만 이러한 풍속 덕에 백성의 절반인 여성이 활달한 기개를 펼칠 수 있었다. 때문에 다른 가부장제 유교 국가보다 몇 배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제일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몽고가 가장 오랫동안 애를 먹었던 고려의 저력은 남녀가 모두 제 역량을 펼치던 사회상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