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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이 흠이 되지 않았던 고려

by 소정
* 참고 : 본 브러치의 글들은 <표류사회 : 한국의 가족문화와 여성 인식의 변화사>(가제) 라는 이름으로 2021년 9월 말 경에 출간되기로 하였습니다.



| 재혼이 흠이 되지 않았던 고려 |


고려 시대 부인과 관련된 사료에는 그녀들의 재혼 이야기가 거리낌 없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이혼과 재혼이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 정3품 판서댁 부인이었던 윤씨는 남편과 사별한 후 좀 방탕하게 놀며 지냈다. 딸의 인생을 걱정한 어머니는 윤씨를 구슬려 홍주목사 서의와 재혼시켰다. 하지만 윤씨는 새신랑 서의를 싫어해 불과 며칠 만에 집에서 쫒아내 버렸다. 이 일이 알려지자 헌부(憲府)에서는 추궁을 한다며 윤씨 집 앞에 군졸들을 세우고 도망가지 못하게 지켰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윤씨의 어머니는 당시의 세도가인 이인임을 찾아갔다. 이인임은 궁리 끝에 신흥 무장 세력이자 총각인 이지란을 윤씨에게 소개하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지란은 이성계의 의형제로 몇 차례나 큰 공을 세워 이씨 성을 하사받기도 한 인물이다. 다행히 윤씨는 강직하고 패기 넘치는 이지란과 재혼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젊은 총각 이지란의 장점을 알아보고 함께 조선 개국의 길을 걸었다.


고려의 귀족 여성인 윤씨 이야기를 조선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 못할 일투성이다. 윤씨는 세 번이나 재혼을 했는데 재혼이 인생의 걸림돌이 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두 번째 혼인 때는 남편인 홍주목사 서의가 마음에 안 든다며 소박을 놓았고, 세 번째 남편 이지란은 잘나가는 총각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을 연결해 준 권신 이인임 역시 총각인 이지란에게 두 번이나 재혼한 윤씨를 스스럼없이 소개해 주었다. 한창 떠오르는 신흥 무장 이지란은 이인임에게 억지로 혼인을 강요당할 입장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세 번째 재혼하는 윤씨와 기꺼이 혼인을 한다.


그렇다고 윤씨의 이야기가 일부 계층만의 특별한 뉴스도 아니다.


➀ 고려 6대 왕 성종은 광종(4대 왕)의 과부 딸과 혼인하여 사위 자격으로 보위에 올랐다.
➁ 충렬왕(25대 왕)의 왕비인 숙창원비와 충선왕(26대 왕)의 왕비인 순비 허씨는 사별 후 왕과 재혼한 경우이다. 심지어 순비 허씨는 전 남편과 3남 4녀를 낳았는데 왕비로 격상된 후 아이들 역시 모두 군·옹주로 격상되었다.
➂ 27대 충숙왕의 후궁인 수비(壽妃) 권씨는 원래 한미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했다가 왕이 이혼시키고 후궁으로 들인 경우다.


이처럼 혈통 문제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왕실에서도 자식 있는 재혼녀를 왕비 삼는 일은 종종 일어났다.

여자는 평생 일부종사(一夫從事: 한 지아비만 섬김)하며 수절(守節: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해야 한다고 믿었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들으면 모조리 기절할 일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관점을 조선만의 것이라 하기도 찜찜하다. 요즘이라고 크게 달려졌을까? 한창 승승장구하는 젊은 총각에게 두 번이나 이혼한 여성을 스스럼없이 소개할 수 있을까? 혹 재혼남이라 해도 아이가 셋이나 있는 과부를 소개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고려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하자면, 끝나버린 인연을 위해 지키는 정절은 큰 의미가 없었다. 과거보다 현실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혼인·이혼·재혼은 인과의 업보를 갚고 진정한 인연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게다가 고려는 잦은 전란으로 인구 증가가 국가적 목표인 나라였다. 그런 고려인들에게 이혼과 재혼은 여성의 흠이 될 수 없었다. 현재에 충실한 부부간의 신의와 금슬지락(琴瑟之樂)이 더 중요했다. 때문에 고려에서의 정조(貞操)란 현재의 배우자에게 진심과 신의를 다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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