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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03. 2021

조선에 펼친 일제의 공창과 위안부 전략(1)

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책에는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기독교계의 폐창운동     

 기독교 세력들은 인신매매의 중심이자 성적 타락지인 공창을 폐지하자는 소위 ‘폐창운동’에 열성을 보였다. 기독교의 도덕주의, 순결주의 관점에서 공창은 용납할 수 없는 타락이자 범죄였다. 때문에 조선의 기독교 세력들은 일본의 기독교 폐창운동가들과 협력하여 폐창운동을 벌여 나갔다. 더불어 공창은 정조를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주자학의 기본 정서와도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조선의 많은 단체가 폐창운동에 함께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 폐창운동가였던 ‘구세군 사령관’ 무라야마 군페이[山室軍平]는 1924년 「공창제도는 남자의 음행을 공인한 것」이라는 강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조선의 유곽 설치가 겨우 팔 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더 뿌리내리기 전에 빨리 공창을 폐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언론들도 조선의 정서와 맞지 않는 공창의 폐지를 거듭 촉구했다.     


 우리가 당국에 그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하고 그들의 숙고를 재촉하려는 이유는, 첫째로 조선의 사정은 일본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수백 년 동안 유곽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근거가 있어서 발달해 온 것이다. 또한 일시적으로 유곽이 사회적으로 상당한 사교 기관의 가치를 발휘할 때가 있었다. 그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이 유곽의 존재 이유를 인정하는 바가 많고, 상당히 높은 인사들도 유곽 출입을 그다지 치욕으로 느끼지 않는 기풍이 있다. 그렇지만 조선은 그와 전혀 다르다. 지금 조선에 들어와 있는 공창제도는 조선에 없던 것을 최근 몇 십 년간 일본인이 조선에 수입한 제도일 뿐 아니라, 조선인의 감정에는 지극히 비루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제도이다. 따라서 조선에 와서 사는 40만 일본인의 감정과 그들에게서 배태된 일본인의 영리 행동으로 인해 경제적 파멸에 몰린 패배자의 매장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에 있는 이 공창제도에 관한 사회적 의의로 말하자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일본에서는 하루아침에 이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무리가 많겠으나 조선에서는 폐지하는 데 구애될 만한 작은 사회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_ (; 이해를 쉽게 하고자 현대《동아일보》, 1926년 8월 6일 1면. 현대적인 언어로 고쳐 실었음)     

 서구 열강의 비난과 기독교 세력의 강한 폐창운동은 일본 정부를 더욱 압박했다. 특히 국제연맹은 각국에 전문 조사단을 파견하여 여성들의 인신매매 현황을 조사하기까지 했다.(1931년) 하지만 오랜 공창 문화를 포기하자니, 뒤따를 일본 국민의 반발과 일탈도 부담됐다. 결국 일본의 지배자들은 공창 폐지 결정을 각 지방 현으로 떠넘겼다. 1935년, 일본은 47개 현 중 14개 현에서 공창 폐지를 결정했고 차츰 확산해 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오히려 카페(당시 카페 여급들은 불법 성매매를 겸하기도 했다)가 호황을 이루며 유흥업과 사창이 더욱 활발해지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돈을 쓰는 큰 고객들은 대개 일본인이었다. 대한제국의 이름과 존재부터 무시했던 일제는 대한제국 여성들의 지조와 일상 역시 ‘조센징’이라는 말로 뭉개며 일본의 도구로 전락시켜 갔다.        


공창을 위안부로     

 그렇다면 기독교계와 지식인, 여성 단체들의 강렬한 폐창운동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조선의 매춘 산업은 커져만 갔던 걸까? 

 1940년대는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1941년, 2차 세계대전) 등으로 일제가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들어간 시대였다. 일제는 조선에도 전시 총동원 정책을 시행하며 숟가락까지도 수탈해 갔다. 이미 일본은 1920년대 세계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를 조선 착취로 메꿔 오던 중이었다. 계속된 수탈의 결과 조선의 경제는 몹시 처참해졌다. 이것이 돈이 되는 인신매매와 매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큰 이유였다. 

 그러던 중, 일제가 갑자기 조선의 매춘 사업을 억제하고 인신매매로 잡혀온 여성들을 앞장서서 풀어 주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유흥과 향락으로 인한 사치를 줄이자’라는 구호와 함께였다. 실제로 1940년 8월, 약 보름 동안 동대문, 중구, 종로구에서만 526명의 유흥업소 수양부모가 경찰서로 소환됐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신매매해 온 수양녀들을 전원 해방하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치 세계적인 폐창운동과 세계의 이목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이라도 한 듯했다. 

 도대체 일제에게 무슨 속셈이 있었던 것일까?

접대부들은 이미 신원 등록이 돼 있어 파악과 관리가 수월했다. 그리고 상당수가 인신매매를 당한 후 매춘을 했기에 수탈해도 가족 반발이나 국민 반감이 일반인보다 크지 않았다. 일제는 그런 점을 노렸다. 접대부들을 생계 대책 마련 없이 갑작스레 해방시킨 후 당황한 접대부들을 곧장 전시 특별청년부대, 전시 위안대 등으로 동원해 갔다.      

 

직장을 중심으로 한, 부내 각 직장의 특설청년대 조직은 지난 5월 22일 경성부 청년단 결성 이후 우후죽순과 같이 각 직장에서 궐기하여 도합 25부대의 편성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규합된 대원은 남자 5,991명, 여자 6,872명. 도합 실로 12,866명을 돌파, 일찍이 보지 못한 직장 청소년의 대동단결을 보게 되었는데 특히 접객업에 종사하는 권번, 카페, 빠-, 조합, 유곽 등이 자진하여 참가하였다. 이 특설청년대 25개 대는 11만을 포용한 경성청년단에 편입되어 금후 규율 있는 통제와 훈련을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로서 종래 아무런 시국적 훈련이 없이 무풍지대에 방임되었던 1천3백의 기생이며 1천6백의 여급과 1천8백으로 헤아려지는 창기들도 새로운 ‘국민조직’의 한 분자로서 참가하여 국방증가 체제 확립에 힘찬 출발을 짓게 되었다.  _(《매일신보》 1941년 6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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