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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02. 2021

일제의 매매춘 전통과 식민 유곽문화의 전래(2)

일제의 공창제도와 한국의 성문화

이 글은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자로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창작지원작에 선정되었고,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텀블벅 펀딩도 300%를 달성하며 성공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일제 식민사관과 산업화시대의 폐단으로 왜곡된 현재의 전통문화/가족문화의 원형을 밝히고,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갔던 한국 역사 속 여성문화와 양성조화의 문화를 밝히는 데 앞장서는 책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책에는 이보다 더 알차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메이지 정부의 공창제(창녀촌) 설립   

  

 근대에 들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추구하면서 메이지 정부는 일본의 성문화에 나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서양처럼 일부일처제를 확립하고 호주제 시행 등으로 간통을 막고자 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매음, 근친상간, 동성애 등의 성문화와 창녀를 만들기 위한 인신매매는 끊이지 않았다. 일본의 유녀(창녀)는 대부분 인신매매로 공급되었는데, 가난한 집에서 팔려 왔거나 유녀의 사생아들이었다. 혹독한 빚에 묶여 평생을 유곽에서 성 노예로 팔려 다니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성과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성병과 온갖 학대 속에 방치된 그녀들의 평균수명은 30세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의 인신매매와 성 착취 문화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기에, 메이지 정부는 「창기해방령」(1872년)이란 걸 공표해 국가 체면을 높여 보고자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유롭고 일탈적인 성을 즐겨온 일본은 창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관리되지 않는 불법 사창만 늘어날 뿐이었다. 때문에 일본 정부는 성매매 면허와 의무적인 성병 검사, 일정 범위 안에 창녀들을 가둬 두는 집창촌(일명 창녀촌 건설)을 전제로 한 국가 공인 매춘면허제인 ‘공창제’로 노선을 바꾸었다.(1876년)           


조선의 전통적 성문화      

 반면 조선은 음란한 풍속을 싫어하는 역사적 전통으로 인해 성매매라는 것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유교, 불교, 도교는 모두 금욕주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남녀유별을 강조한 유교의 영향으로 평소에는 부부라도 안채와 사랑채에서 따로 지내다가 임신이 가능한 시기에만 합방했다. 색(色)으로 인해 감정과 욕망이 들끓으면, 먹구름에 밝은 달이 가려지듯 바른 마음[道心]이 욕정에 가려진다 믿었기 때문이다. 도교에서는 성 에너지 자체를 생명의 정수로 보았다. 곧 성욕이 방출되면 정기가 훼손되며, 성적 절정감은 새 생명을 낳기 위해 생명의 정수가 분리돼 나가는 느낌이라 믿었다. 때문에 방중술(도교에서 남녀 간의 성교를 통해 각기 부족한 음양을 보충하는 수련법)을 익히지 않은 일반적인 성교는 생명을 갉아먹는 행위라 여겨 극도로 꺼렸다. 불교 역시 ‘음란한 마음’[淫慾]을 죄의 근본으로 보았다. 나아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자 비구와 비구니는 비혼을 고수했다.       

 조선은 법률적으로도 성에 관한 범죄를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일례로 화간(부부 아닌 남녀가 합의하여 육체적으로 관계함)은 장 80대, 외도한 유부녀는 장 90대, 간통한 남자는 장 100대, 강간은 교수형이었다. 혹 성매매를 들키면 중인은 궁벽한 지역의 관노비로 만들고, 천인은 장 100대를 친 후 귀양 3천 리를 보냈다. 보통 장 100대면 장독으로 인해 살아남기가 힘들었는데, 만약 살더라도 조선팔도 삼천리를 끌고 다니다가 섬 등으로 귀양 보냈다.(거의 유배지에 도착하기 전에 끌려다니다 고통스럽게 죽는다.) 

또한 주자학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절개’에 목숨을 걸었고, 노동과 기예를 제공하는 관비나 기생들도 공식적으로 성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미천한 신분 탓에 함부로 대해지기도 했지만, 황진이나 춘향이처럼 고고한 절개를 지키고자 하면 함부로 범할 수 없었다. 때문에 절개를 지키다 열녀문을 하사받은 절기(節妓: 절개를 지킨 기생)와 충의로운 의기(義妓: 의로운 기생)가 다수 존재했다. 양반과 천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는 있어도 사람이 품은 고고한 지조는 모두 가치롭다고 인정한 것이다.           


서학의 성문화     

 조선 후기에는 서학이 자리 잡으며 순결뿐 아니라 부부간의 동정에 대한 의식도 생겨났다. 서학에서는 인간의 번식 욕망인 성욕이 인간의 원죄가 전달되는 연결점이라고 믿었다. 또한 거룩한 신을 올바로 신앙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동정을 지키거나 반드시 순결하고 깨끗한 처녀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고 믿었다. 순결하지 못한 과부, 창녀 등과 관계하는 것은 자손까지 더럽히는 일로 금기시되었다.      


그(사제)는 숫처녀만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 과부나 소박맞은 여자나 창녀가 되어 몸을 더럽힌 여자, 이런 여자를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 자기 백성 가운데에서 숫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자기 백성 가운데에서 자식을 더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주님이다. _(「레위기」 21장 13~15절)     


 천주교인들은 장미 모양 구슬로 만들어진 로사리오(묵주)를 돌리며 영적 기도를 바친다. 붉은 장미는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를 상징하고, 하얀 장미는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과 고결함을 상징한다. 성모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낳으시고 종신토록 동정을 지키셨다. 순결한 처녀의 잉태야말로 원죄 없는 생명(예수님)을 낳은 ‘기적’의 근원으로 해석된다. 

 서학을 받아들인 조선의 신앙인들도 더 나은 신앙을 위해 순결과 동정을 지키고 비혼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독신과 동정을 지키는 삶이 하느님께 온전하게 봉사하는 거룩한 삶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이에 겉으로는 부부로 행세하며 관습의 틀에 맞추고, 실제로는 서로의 동정을 지켜 주는 ‘동정 부부’까지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2014년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유중철(요한, 당시 19세), 이순이(루갈다, 당시 16세) 부부가 있었다. 이들은 부부임에도 동정을 지키다가 스스로 천주교인임을 당당하게 밝혀 의연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들의 사례는 또 다른 신도들에게 성적 순결과 부부간의 동정, 그리고 순교를 최고의 신앙적 영예로 받아들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때문에 성적 순결을 지키고자 스스로를 과부나 홀아비라 칭하는 처녀·총각들도 늘어갔다. 이러한 서학의 믿음은 기독교계 여학교의 도덕 순결 교육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혼전 순결과 결혼 후 정조 및 성적 금욕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이처럼 조선은 오랜 시간 욕망을 절제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와 신념을 중시하는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일부의 일탈과 지나친 여성 성 억압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말이다.)          


한국 성매매 산업의 기원     

 이런 조선의 문화가 오랫동안 자유로운 성을 즐겨 온 일제에 맞을 리 없었다. 남성에게는 여성의 성이 꼭 필요하다 믿었던 그들은 일본 본토의 성문화를 조선에 들여왔다. 결국 일제는 1876년 조선 강제 개항 후, 개항지의 일본인 지역을 중심으로 유곽을 만들고 매춘업을 시작했다. 러일전쟁 승리 후에는 통감부를 통해 슬며시 조선 사회에 공창과 사창을 들여왔다. 이후 용산과 함경북도 등지에 일본군이 상주하기 시작한 1916년부터는 이 땅에 완전한 형태의 공창제를 도입했다. 

 공창제의 특징은 공식 매춘 면허를 만들어 세금을 거두고 의무적인 성병 검사를 하며, 매춘 여성들을 한곳에 집결시켜 집창촌을 만드는 것이다. 그 제도의 이면에는 창녀를 ‘성 노예 상품’으로만 바라보는 일본의 문화와 관점이 녹아 있다. 에도 시대, 유녀(창녀)들이 늙거나 병들어 쓸모를 다하면 길가에 버려 쓸쓸히 죽어가게 했듯이, 공창의 창녀들을 ‘성 상품’으로 보고 ‘성병의 근원’으로 치부하면서 거주지까지 한정 지으며 성 노예로서의 효용성을 최대로 뽑아내려 한 것이다. 

 일본이 이식한 이 공창제는 현재 한국에 자리 잡은 성매매 산업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파생 상품(다양한 방식의 불법 성매매, 성 노예 공급을 위한 인신매매 시스템, 집단 강간 문화 등)을 늘려갔다. 더불어 일본의 오래된 강간 문화인 요바이와, 위 계급이 아래 계급의 성을 폭력적으로 착취하는 슈도[衆道, 사무라이 계급의 미소년 소아성애], 약한 이들은 성 노예로 만들고 착취해도 된다는 성 관념도 함께 뿌리를 내려갔다. 


일본의 집단강간문화 주 : 일본 전통 성 인식 때 남자 아이들은 훈도시이와이[褌祝]라는 성교육 의식을 치렀다. 처음으로 어른들이 입는 훈도시(끈팬티처럼 생긴 일본 전통 하의)를 입고 정해진 장소로 가면 약속된 마을의 과부나 유부녀들이 다 함께 성 기술을 알려주고 성 실습을 해주는 일종의 집단 강간의 형태였다.


더불어 성을 자유롭게 즐기다 못해 점점 변태적으로 변해 가는 성 풍조 또한 다른 식민 문화와 함께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고 활짝 꽃을 피워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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