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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Sep 29. 2021

일본의 독특한 성문화 엿보기

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책에는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의 기본적인 성문화 : 요바이      


 일본의 대표적인 성문화로는 고대부터 이어진 ‘요바이’[夜這い]가 있다. 요바이는 혼인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상대와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 것이다. 여성은 얼굴을 가리거나 노파인 척하며 남성의 방으로 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남성이 여성의 방에 강제로 잠입하는 형태였다. 밤마다 다른 남성이 집안 여성들과 동침하고 갔는데, 찾아오는 남성이 적으면 여자 집에서는 남몰래 남자를 사서 들여보내기도 했다. 요바이 오는 남성이 적으면 성적 매력이 없다고 여겨 수치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그럼 요바이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농촌의 남자 아이들은 15~17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아 와카모노구미[若者組]라는 조직에 들어갔다. 이 조직에는 결혼 전까지 있을 수 있었다. 낮에는 부락의 경비와 소방 등의 일을 보고 밤이 되면 네야[寢屋: 청년 숙식소]에 모여 연장자에게 농사 기술과 성 지식 및 성 기술을 배웠다. 교육이 끝나면 무스메야도[娘宿: 처자들의 숙식소]를 찾아가거나 요바이를 가서 배운 성 기술을 실습했다. 일종의 혼인 훈련이었다.      


“지방에 따라서 형태는 다르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여 밤일을 하고 거기서 자거나 했다. 젊은 남성이 그곳(무스메야도)을 방문하는 중에 이성관도 깊어지고 혼인을 위한 훈련도 쌓여졌다. 무스메구미[娘組]의 기능은 주로 혼인에 대한 훈련과 통제에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프리섹스 상황이 있었다. 처녀들은 요바이를 오는 청년의 숫자가 많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고 부모는 요바이를 오는 청년이 적으면 상심했다.” (山崎正夫(1978), 『三島由紀夫における男色と天皇制』, 海燕書房, p.141: 정미혜(2006), p.10. 재인용.)    

 

 혼인 전 성 훈련을 하는 것은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초경을 치르면 엄마들은 믿을 만한 마을 남성에게 약간의 선물을 주고 성교육을 부탁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기에 일부러 점심쯤부터 데리고 갔다. 이 일을 잘 치르고 나야 언제든지 요바이를 할 수 있었다.      


“그 집(성교육을 부탁받은 집)에서는 처녀의 모친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면 처녀를 잠자리에 데리고 가서 성교를 하여 가르친다. 그녀가 돌아갈 때에는 출혈이 묻은 종이나 하얀 포를 주어서 돌려보낸다. 혹은 처녀의 모친이 데리러 오는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초교(初交: 첫 성교)가 끝나고 어엿한 여자가 된 것이므로 젊은이들이 요바이하러 온다.” (赤松啓介(1994), 『夜這いの民俗學』, 明石書店: 정미혜(2006), p.11. 재인용.)


요바이에는 남녀 모두 미혼과 기혼을 가리지 않았다. 주로 처녀와 과부에게 많이 갔지만, 남편이 멀리 출타하면 기혼 여성도 요바이가 가능했다.           


다 함께 성을 즐기는 축제 : 우타가키와 자코네   

   

 개인적인 성문화로 요바이가 있었다면 공동체적으로는 우타가키[歌垣]란 풍습도 있었다. 마을마다 길일이 되면 들이나 길가에서 미혼·기혼 남녀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축제가 우타가키였다. 일종의 성 일탈 축제였는데, 이때 모인 남녀들은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자유로운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독수리가 집을 짓고 사는 쓰쿠바야마[築波山]의 모하키츠[裳羽服津] 언덕 위에, 젊은 남녀들이 모여 서로 어울리는 우타가키, 나도 유부녀와 놀아야겠네. 내 아내에게도 다른 남자가 놀러와 주었으면. 이 산의 신령님께서 예로부터 특별히 허락하신 행사라네. 멋쩍어도 눈감아 주게나. 오늘만큼은 무엇을 하든.  『만엽집』 권9, 1759.   


 일본의 일반 풍습뿐 아니라 종교인 신도(神道)에서도 성 축제는 일상적이었다. 

신사나 사찰 행사 후에는 의례 참석자들이 남녀 혼숙하는 자코네[雜魚寢]라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자유로운 성관계가 가능했다. 어떤 신사들은 제례 후 마주치는 이성과 즉시 교합을 해야 한다거나, 여자는 날이 새기 전에 세 명의 남자와 몸을 섞어야 한다는 등의 규약을 두기도 했다. 놀랍게도 이러한 풍습은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여자라는 여자는 모두 그날 밤중에 이 사람 저 사람 차별하지 않고 몸을 허락하는 것이다. 기혼의 여자뿐만이 아니라 미혼의 처녀까지 좋은 신랑을 얻을 수 있다는 미신에서 아낌없이 그 몸을 미지의 남자 앞에 내던지는 것이다. 여자는 그 빈도수가 많을수록 한층 더 행복해진다고 말하고 있다. … 도쿄에서 기차로 가면 한 시간 반 정도에 도달하는 가까운 곳에, 더구나 소화(昭和: 1926~1988년까지의 연호)의 현대에 이러한 행사가 남아 있다니. 민족의 영원성을 엿볼 수 있어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_「이바라기현 기타소마군 고모[蛟蝄] 신사의 제례에 관한 기록 중」 

         

일본의 오래된 전통 : 유곽의 매매춘 문화     


이처럼 일본의 자유로운 성문화는 전통적으로 혼인 제도와 별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때문에 이미 10세기부터 ‘야호치’[夜発], ‘아소비’(アソピ)라는 전문 성매매 여성이 존재했다. 17세기 에도 막부에서는 아예 유곽을 공식 성매매지로 인정해 주었는데 무척 호황을 이루었다.

주 : ‘경국(傾國)의 불야성’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요시와라는 매일 밤 다양한 계급의 사내들이 몰려들어 온갖 향락과 사치스런 밤문화를 열었다. 


 주변에는 공식 유곽에 못 가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불법 매음이 발달했다. 


주: 차이온나(茶屋女: 찻집 여자), 유나(湯女: 목욕탕 여자), 도메온나(留女: 여관집 여자), 센타쿠온나(洗濯女: 세탁집 여자) 등이 있었다.


 에도 시대 성문화는 갈수록 발달하여 길거리 가게들은 잘 보이는 좌판에서 다양한 성행위 보조기구들을 버젓이 팔기도 했다. 『고쇼쿠타비마쿠라[好色旅枕]』(1695년) 같은 ‘성 보조기구 사용설명서’ 등의 책들도 유행했다.

  또 사찰에서는 동자승과의 남색이, 사무라이들은 미소년과 즐기는 와카슈도[若衆道: ‘어린 소년의 도리’란 의미로 사무라이가 자신의 시중을 드는 어린 도제 사무라이와 성적 관계를 맺어 신뢰를 다지는 것]라는 남색이, 가부키(전통 공연) 공연에서는 동성애와 매음 등, 다양한 방식의 성문화가 유행했다. 


 이들의 특징은 위 계급이 어리고 낮은 계급의 성을 성별을 가리지 않고 수탈했다는 것이다. 보통 ‘폭행 또는 협박에 의해 상대방의 반항을 곤란하게 하고 간음하는 것’을 강간이라 정의한다.(이병태, 『법률용어사전』)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여자의 방에 몰래 침입하는 요바이나 자기보다 낮은 계급인 동자승이나 미소년의 성을 마음 놓고 착취하는 일본의 전통문화는 강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강한 자의 욕망에 의한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성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문화들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당연하고 재미있는 전통으로 여겨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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