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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02. 2021

한국에 꽃핀 일본의 요바이 정신

이 글은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자로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창작지원작에 선정되었고,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텀블벅 펀딩도 300%를 달성하며 성공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일제 식민사관과 산업화시대의 폐단으로 왜곡된 현재의 전통문화/가족문화의 원형을 밝히고,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갔던 한국 역사 속 여성문화와 양성조화의 문화를 밝히는 데 앞장서는 책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책에는 이보다 더 알차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의 예술가 기생이 창녀로 전락하게 된 유래     

 조선의 정기를 말살하고, 일본과 같은 성 산업을 도입하기 위해 일제는 조선의 기생을 창녀로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본래 조선의 기생들은 수준 높은 기예와 지적 풍류를 자랑하고 있었다. 궁의 장악원과 관에 소속되어 수준 높은 전통 무용, 국악, 창 등을 익히고 계승하던 주체들이었다. 하지만 한일합방 이후 장악원이 폐지되어 갈 곳이 없어진 그녀들은 명맥을 유지하고자 기생조합(훗날 일제식 권번으로 변경)을 만들어 활동했다. 기생들이 전승한 전통 무용과 예술은 오늘날까지도 중요 무형문화재의 뿌리가 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어렵게 예술을 갈고 닦은 기생들의 자존심은 매우 고고했다. 일제는 그녀들을 소위 일패 기생(예술을 일삼던 본래의 기생), 예기(藝妓)라 불렀다.       

 

어찌 일개 유아탕자의 수중물이 되고 마는 것이 예기의 근본이랴. … 가무 그것은 예술이며, 적어도 우리는 예술가로다. _(예기 윤옥향의 글 중)     

 일제는 조선의 전통문화를 미신으로 몰아가는 한편, 전통 예술의 맥을 잇던 기생들을 창녀로 만들어 공창으로 몰아넣고자 했다. 이에 우선 기생들을 예기(藝妓: 예술을 하는 기생)와 매춘 면허를 받은 창기(倡妓: 공창 매춘부)로 나누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후 창기들에 대한 처우를 차츰 예기와 비슷하게 맞춰 가면서 대중들의 ‘기생 이미지’를 슬며시 창녀로 바꿔 나갔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예기인 일패 기생들은 장옷 대신 붉은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검정색 외코신을 신어 일패 기생임을 표시했다. 이패(일패보다 예능이 부족한 기생) 기생과, 삼패(성매매가 전문인 창녀) 기생은 이것이 불가능했지만 일제는 차츰 허용함으로써 끝내 일패 기생과 창기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결국 조선의 기생들은 거의 창기처럼 매음을 주업으로 하는 이들로 인식이 바뀌어 갔다. 더불어 일패 기생이 보유하던 전통 예술과 풍류의 맥도 함께 사라져 갔다. 덕분에 조선의 풍류와 놀이 문화도 차츰 성적으로 변해 가며 금기시됐던 매춘이 노골화되어 갔다.          


본격적인 공창의 도입과 발달 과정     

 조선의 공창이 늘수록 일제가 가져가는 세금도 늘었고, 사창이 발달할수록 이익을 얻는 일본인도 많아졌다. 때문에 요리점에서 노래와 춤을 추는 예기, 음식점 직원인 작부, 카페나 여관 직원인 여급 등에 의한 음성적인 사창의 발달을 묵인했다. 이에 창기뿐 아니라 예기, 작부, 여급 등으로 성병 검사 대상을 확대했다. 접대업을 하는 여성들을 암묵적인 매춘부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이는 일반 접대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과 성 산업의 구도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일제는 불법 사창을 잘 단속하지 않았다. 이미 공식적으로 다 알려져 버린 공창 대신 매춘 산업을 다른 접대업 전체로 슬며시 이전시킨 후 은밀한 사창을 묵인하는 것, 그것이 국제적 비난을 받는 매춘 시장의 규모를 축소․은폐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제의 성 산업은 카페, 술집, 요리점, 여관 등의 접대 업종 전반으로 파고들어 갔다.

 일제는 조선 여성의 성을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해 접대 가능 나이도 낮추었다. 일본 여성은 18세부터 가능했지만 조선 여성은 16세부터 접대업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접대업을 시작했기에 임금과 환경은 일본 여성보다 훨씬 열악했다. 특히 러일전쟁으로 일제의 주력군이 주둔하던 함경북도는 아예 접대 가능 나이를 15세까지 낮추기도 했다. 


 조선에 일제식 매춘 산업이 뿌리를 내려가면서 성병도 심각한 수준으로 퍼져갔다. 1934년 자료에 의하면 당시 접객 여성의 57%가 성병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일제는 공창뿐 아니라 사창까지도 굴욕적인 강제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성 접대를 받는 남성들은 성병 검사의 대상이 아니었다. 성병의 근원은 오직 매춘부의 몸이라 인식했고, 현실적으로도 함부로 끌고 가서 검사할 수 있는 것은 매춘부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시기 조선 전체의 성병 발병률은 45%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의 공창제와 사창 문화는 일본 본토에서 사회문제가 되었던 여성 인신매매를 조선 땅에도 반복되게 만들었다. 창기나 작부를 허가받을 때, 남성 보호자(아버지, 남편 등)나 호주의 동의서는 필요했지만 여성 본인의 동의서는 필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가난한 집이나, 결손 가정의 주부나 딸들을 취업 알선, 부잣집 혼처, 유학 등의 거짓말로 꼬여낸 후 포주에게 팔아 버리는 인신매매가 빈번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글을 몰랐던 가난한 집 여성들은 잘못된 계약서나 화대 장부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평생 전차금(前借金)에 묶여 이용당하다가 버려지기 일쑤였다. 

 이렇게 공창이 확산되며 조선의 놀이 문화도 변질돼 갔다. 한편에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당시 세태에 대한 조소와 반성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아산 둔모에 콩 볶는 소리가 들린 지도 이제는 30년이 지났다. 병정의 꽁무니를 따라서 현해탄을 건너온 ‘니혼 무스메’(일본 계집이란 뜻)의 역사도 어느덧 30년이 되었는가 보다. 조선이라고, 옛적인들 기생이 없었으리오만은, 창기니 작부니 하는 새 이름을 가진 여자가 분 냄새와 합해 정조를 팔고 술판에 헛웃음을 실어 남자의 등골을 뽑게 되기는 역시 갑오년 이후의 일일까 한다. 《동아일보》(1924년 5월 10일), 2면.          


 일본에서도 공창의 매춘부들은 거의 인신매매로 끌려온 여성들이었다.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일본의 공창 문제에는 비난이 많았다. 국제연맹은 「부인 및 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을 체결하고(1921년) 인신매매 문제가 심한 일본에도 조인을 촉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미루고 또 미뤘다. 국제사회의 안 좋은 눈길과 매춘 사업 포기가 가져올 후유증을 저울질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1925년에서야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의 공창은 제외한다는 조건으로 인신매매 금지 조약을 비준했다. 더 깊이 살펴보자면 그나마 조선의 공창을 제외한다는 조항 덕에 일본은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즈음 일본인들은 일본 매춘부보다 화대가 싸고 어린 조선 매춘부들을 많이 찾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의 인신매매 사업도 한창 커져 가던 중이었다. 유명 유흥업소들은 가난한 부모들에게 사들인 수양딸(어릴 때 수양딸로 들여 기생 수업을 한 후 다른 포주에게 비싸게 팔았다.)들이 수십에서 수백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렇기에 방대해져 가는 조선의 공창이 인신매매 국제조약에서 제외된다면 창녀 확보에 크게 무리가 될 것도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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