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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04. 2021

조선에 펼친 일제의 공창과 위안부 전략(2)

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책에는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일제가 가진 여성의 성에 대한 관념은 상당히 이중적이었다. 집 안의 아내들은 남편에게 안락하고 즐거운 가정을 제공할 기예를 기본 소양으로 갖춰야 했고,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 남편을 바깥일에 전념케 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아내들은 전장에 나간 남편이 안심하고 싸울 수 있도록 정조를 굳게 지킬 것을 교육받았다.      

“자기 아내의 순결을 안심하고 전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군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서울신문》 1953년 3월 22일: 주진오 외(2017), p.317. 재인용. 
    

 때문에 남편을 전장에 보낸 부인이 정조를 잃는 것은 “자기만의 향락을 누려 보자는 불순한 감정으로 인간으로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매도했다. 하지만 남성에게는 다른 잣대가 적용됐다. 남성이 이성을 멀리하면 우울증이나 성격 이상 등의 문제가 생긴다며 사회에는 공창을, 전장에는 위안대를 설치했다.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 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_(특수 위안대의 설치 동기)        

  

일본군의 특이한 점     

 일본의 오래된 사무라이 문화는 인간의 생명보다 전체의 영속성을 더욱 중요시한다. 그래서 여성 인식뿐만 아니라 인권 의식도 그리 좋지 못했다. 때문에 일본의 전쟁 수행에는 유별난 점들이 있었다. 

 첫째로 패배자의 목숨은 존중하지 않았다. 때문에 적군의 포로가 되면 즉시 자결하고, 패배한 적군은 현지에서 학살하여 포로로 만들지 말라고 지도했다. 이로 인해 뤼순 대학살(약 2만 명), 난징 대학살(약 20~30만 명) 등,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대규모의 학살이 잇따랐다. 마찬가지로 일본군이 퇴각할 때면 끌려간 조선인과 위안부들도 학살당하거나 버려졌다. 

 둘째, 늘 위안부들을 끌고 다녔다.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군은 항상 주변에 유사 위안소나 위안소들을 설치했다. 명분상으로는 군인들의 성병을 막기 위해 ‘관리된 공창’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미군의 〈일본군 포로 심문보고서 제49호〉

첫 번째, ‘위안부’라는 말은 특이한 일본적 표현이다. 두 번째, ‘위안부’는 일본군이 싸우기 위해 가는 곳이면 어디서건 발견된다. 세 번째, 일본제국은 위안부의 위안으로 병사들이 전쟁을 위해 멸공봉사하기를 바랬다. 네 번째, 병사들의 성병을 관리했다. 


사기와 인신매매를 통한 위안부 조달     

 일본의 전쟁 수행 방식은 자원을 현지 조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본군은 위안부 수요가 급증하는 데 반해 공급이 부족해지자, 결국 병참기지라고 여긴 조선에서 현지 조달을 시도했다. 때문에 일제는 조선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조선 여성의 조혼을 금지시키고 낙태를 묵인했다. 그리고 젊은 여성들에게 교육받고 사회로 나가 노동할 것을 권장했다.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근대적이며 남녀평등을 위하는 정책같이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조선의 인구 증가를 막고, 미혼 여성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꼼수였다. 

 결국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집 밖으로 나온 순진한 소녀들은 취업 사기, 유학 사기, 결혼 사기, 협박, 근로정신대 공출 등으로 끌려가 광산, 공장, 위안소 등에서 영문 모를 착취를 당했다.    

  

“20만 명의 부녀자를 노예사냥처럼 전장에 몰아넣고, 패전 후 현지에 버려둔 채 철수함으로써 대다수를 죽게 한 행위가 유태인을 가스실에 가두어 집단 학살한 나치스범죄와 무엇이 다른가!” _(정신대 납치에 앞장섰다가 후일 과거를 참회한 요시다 세이지 씨의 증언)      

“그것은 모집이 아니라 노예사냥보다 더한 체포 구금이었으며, 1943년 무렵에는 미혼 여성들은 거의 근로정신대에 끌려가서, 주로 젊은 주부들을 연행했다.” _(《한국일보》 )          



일본군의 무리한 위안소 운영     

 일본의 잘못된 성 관념으로 인해 허다한 조선의 여성들이 인신매매 당해 비참한 상황을 맞이했다. 

일본 군위안부의 원칙은 병사 100~150명당 위안부 1명 충당이었다. 때문에 군이 직접 운영하는 군위안소는 '터무니없이 무리한 운영'1)을 했다. 일례로 한 위안소의 경우, 위안부들은 오전의 2시간 산책 이후 저녁 9~12시까지 위안소에 있어야 했다. 이용하려는 병사가 많았기에 하사관 이하 병사들의 1회 이용 시간은 30분씩이었다. 때문에 주기적으로 이루어진 성병 검사에서 ‘미란’(糜爛: 성기가 헐어 문드러짐)이란 결과를 받은 여성들이 많았다. 열악한 운영 실태는 다른 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 30명이 일본군 4천 명을 상대했다는 중국의 보고서도 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일본군은 해결책보다

 ‘위안부 수가 적어 단지 정욕을 채우는 데 불과하다. 좀 더 위안부를 늘려서 정신적 위안도 줄 수 있도록 하라’

는 더욱 무리한 요청만 본국과 주고받을 뿐이었다.2) 

본래 세상에는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일본군이 직접 끌고 다니며 관리하는 공식적인 ‘군위안소’ 외에 사실 더 많은 군전용 위탁위안소들이 일본군 주둔지를 따라다녔다. 수많은 포주가 더 많은 조선의 소녀들을 타국의 군전용 위탁위안소에 공급했다. 때문에 알려진 정식 군위안부보다 훨씬 많은 여성이 취업 사기나 인신매매 등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역사가 되었다.3) 학계에서는 그녀들의 수를 대략 20만 명 정도로 헤아린다. 


1) 이용이 끝나면 병사들은 돈과 바꿀 수 있는 군표를 주고 갔지만 외출도 제대로 못하는 위안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2차 대전이 끝나면서 군표는 모두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군표를 지급했다는 이유 때문에 보상을 했다느니, 접대부였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2) 현재 중국 후베이성 우한[武漢]의 일부에 해당하는 한커우[漢口] 지역은 1940년 당시 일본의 조계지(상대국을 개항시키면서 얻은 외국인 전용 거주 치외법권 지역)였다. 그곳에 주둔하던 제3사단 예하 독립산포병 제3연대의 문서 중.(양수조, 2004). 
3) 당시 한커우의 한 지역인 적경리라는 한 마을에서만 30채의 위안소와 위안부 300명이 있는 특수위안소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성문화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민간 유흥업자들이 전시임에도 부대 주변에 20개의 창녀촌을 만들었고, 약 3천 명 이상의 창녀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 많은 수가 인신매매나 취업 사기로 끌려와 전차금(포주가 매춘부를 사올 때 들인 일종의 빚)에 묶여 돈 한 푼 제대로 못 버는 조선 소녀들이었다.(강정숙, 2010, p.142.) 


일제의 군위안소는 왜 비난받아 마땅한가?     

 인간의 감각은 늘 더 큰 자극을 추구한다. 때문에 게임이든 성이든 그것에 일단 무뎌지기 시작하면 더욱 깊은 중독에 빠져든다. 일본은 과거부터 엄격한 신분 계급제와 살벌한 사무라이 문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성 탐닉으로 풀었다. 문제의 본질과 정면 승부하지 못하는 비겁한 방식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했다. 엄습하는 전쟁의 고통을 더 약자인 여성을 강간하는 자극으로 해소하려 했다. 병사들의 두려움을 ‘여성 정복’이라는 잘못된 목표와 포상으로 가리고자 했다. 곧, 성욕 분출이라는 욕망의 힘으로 이성을 억누르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잘못된 성 관념은 오히려 주체할 수 없는 성욕과 폭력적인 성문화만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매일 위안부들을 검사하던 일본 군의관조차 통탄할 정도였다.      


‘일본 군인은 왜 이토록 성욕의 면에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는가’ 하고 나는 대륙에 상륙함과 동시에 즉시 통탄했고 전쟁 생활을 하는 1년 동안 내내 통감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그다지 이상하다고도 여기지 않고 이 방면에 대해 훈계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군이 경영하는 위안소를 왕성하게 설치하여 군인을 위해 천업부(더러운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를 제공했다. 그리고 창부로 인해 성병을 군인 사이에 만연하게 했고 결국 그들을 수용하는 병참병원을 만들었다. … 군 당국은 군인의 성욕을 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중국 부인을 강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위안소를 만들었지만, 강간은 더욱 왕성하게 이루어져서 중국 양민은 일본 군인을 보면 반드시 무서워했다. 장교는 솔선하여 위안소에 갔으며 병사에게도 이를 권유하고 위안소는 공용으로 정해졌다. 생각이 있는 병사는 위안소의 내용을 알고 군 당국을 비웃었을 정도이다. 그런데 위안소에 가지 못하는 정도의 병사는 병신이라고 매도하는 장교도 있었다. 요컨대 전쟁 생활은 살풍경하기 때문에 미쳐버릴 듯하다. 이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병사에게 여자를 안게 하는 것보다 좋은 방책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군인이 전쟁을 하러 와서 틈만 나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위안소에 다니는 모습을 보고 중국인은 비웃고 있었다. _(당시 육군 군의관 하야오 도라오의 기록 중)     


 일본은 패전 후 미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즉시 공창을 폐지했다. 그러는 한편, 다수의 일본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미군만을 상대하는 위안소(RAA,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 특수위안시설협회)를 도쿄에 조직했다. 약 7만 명에 이르는 매춘부들 대부분은 자원한 일본 여성들이었다. ‘전체를 위해 한 몸을 희생한다’라는 전체주의식 투지도 대단해서 하룻밤에 47명의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특유의 가미카제식 인사 원리와 ‘남성은 여성의 성으로 위안을 받아야 일탈하지 않는다’라는 성 관념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유엔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민주주의 이상에 어긋난다며 연합군의 출입을 금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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