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정 Oct 13. 2021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공창이 우리에게 남긴 것

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책에는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일제의 성 전략은 우리 역사로 건너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도 그대로 계승됐다. 해방 후인 1947년, 한국은 이미 공창제 폐지와 매춘 금지를 입법·공포했었다. 미군에 의해 설립된 ‘부인국’(1946년 설립, 훗날 부녀국)이 여성운동 단체들과 함께 전개한 폐창운동의 뜻깊은 결과였다. 미군정도 공창과 사창이 민주주의의 이념에 어긋난다는 것에 합의했기에 완전한 폐기를 인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게 돌아갔다. 일본군이 두고 간 군 시설에는 미군 시설이 들어왔다. 일본군 주변에 위안소들이 있었듯 미군기지 주변에는 기지촌이 생겨났다. 일본이 매춘 여성들에게 강제 성병 검사를 실시하던 방식 그대로 미군정도 기지촌 여성들을 검사했다. 창기와 작부들은 곧 양갈보와 양공주가 되었다. 그리고 미군을 상대로 하는 ‘댄스 홀, 카바레, 카페, 빠-’ 등, 사창을 겸비한 유흥업소가 우후죽순 늘어났다. 하지만 밀매음은 미군정에 의해 슬며시 묵인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권은 유엔 병사들의 성적 일탈을 예방한다는 명분 아래 오히려 ‘양갈보’들을 조용히 지원했다. 양갈보들에게 면허세와 특별행위세 등을 징수했는데,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은 외화벌이와 세금벌이의 한 방법이 되었다. 때문에 애써 이룬 ‘공창 폐지 상태’를 유지한다거나 기지촌의 밀매음을 개선할 의지가 없었다. 그렇게 여성의 성은 ‘필수불가결한 상품’이라 여기며, ‘패배자와 약자는 성마저 착취당해도 된다’ 여기고, 공창과 위안대를 만들어서라도 남자들의 성욕은 해소시켜야 한다는 일제식 성 관념은 우리 풍속에 계속 녹아들어 갔다.     


그리고 약 50여 년이 지난 2004년 9월, 일명 「성매매방지법(법률 제7212호)」이 대한민국에서 시행됐다. 그러자 남성계의 반대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한국남성협의회라는 단체는 「성매매방지법」이 “남성의 신체 자유와 행복 추구권을 침해한 것”이며 “남성들에 대한 인권 침해뿐 아니라 생존권, 나아가 행복추구권까지 현저하게 박탈하고 있다”라는 내용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나아가 진정서가 처리되지 않으면 헌법소원까지 진행하겠다고 공표했다. 


〈“성 특별법, 신체자유․행복추구권 침해” 진정〉 2004년, 11월 2일, SBS 뉴스


매춘을 금지하는 성매매 특별법이 남성의 인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이며, 생존권까지 위협한다는 이 주장은 당시 많은 남성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그러는 동시에 아내들의 혼전 순결과 높은 정조 관념은 당연시됐다.



이전 13화 조선에 펼친 일제의 공창과 위안부 전략(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