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라고 시작하지만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라고 마무리하는 기형도의 시, "오래된 서적"은 암울한 고백을 토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적막함 때문에 간간이 생각이 난다. 현실의 단절감과 좌절에 몸부림치다 요절한 시인의 일생이 예언처럼, 자신의 영정사진을 묘사하는 자화상 같아 먹먹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동시에 시인을 괴롭힌 이율배반적인 현실과 세상의 부조리를 그저 견디고 버티고 살고자 하는 나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내 자기연민의 감정의 미로에서 나갈 방법을 찾도록 경종을 울린다.
목요일 오후 진한 커피 한잔을 그리워하며 진료실 앞에서 초조하게 대기했다. 급하게 잡힌 진료라 맨 마지막 예약 명단에 올라 있어, 앞에서 밀린 진료로 예약시간을 사십 분이나 넘겨 의사와 대면했다. 피곤에 절은 의사가 나를 보며 그래도 얼굴에 미소를 띠려는 노력이 보였다. 결과가 안 좋구나, 말없이 책상의 모니터에 펼쳐진 내 몸속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거의, 아직 좀 더 검사할 것이 있어 확신은 못하지만, 뼈 스캔, CT, MRI 검사 결과가 모두 같은 걸로 봐서 뼈로 암이 전이된 게 맞는 것 같아요."
의사가 70퍼센트의 뼈 전이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30퍼센트의 아닐 가능성을 남겼지만 예상할 수 있는 다음 치료 일정을 이야기하는 걸 보니 암세포가 소멸되지 않고 활동을 재개한 게 확실해 보였다. 그 독한 항암도 견뎌냈으니 표적치료는 덜 힘들고 경과도 좋을 거라고 했다. 혈액 종양 내과로 전과되고 PET-CT 검사일정과 진료 예약이 이루어졌다.
그토록 마시고 싶던 커피 한잔을 병원 간이 카페에서 사들고 나와 병원 앞 벤치에 앉았다. 커피가 유난히 쓰고 텁텁하고 맛이 없었다. '앞으로 어쩌지? 초기일 테니 설령 치료 성과가 안나도 생존율도 적어도 삼사 년은 되겠지? 암전이가 아닐 수도 있는데 너무 깊이 몰두하지 말자. 아니, 대략 30퍼센트의 아닐 확률에 기대어 희망을 갖고 있어도 70퍼센트의 확률은 계속 희망을 침범하겠지. 내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누가 남아 있나? 내년으로 미루고 계획하던 사회 참여는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이 세상에서 여태 내가 남긴 족적은 있는가?' 오십 년 넘게 산 세월이 내게 티끌처럼 날아들었다. 그러한 잡생각은 사소한 생각으로 깨졌다. '지하철 붐비기전에 집에 가자.' 그리고 생각이 정리 되었다. 늘 하던대로. 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살아온 내 태도로 봐서 지금 허망함을 바로 날리고 의사의 지시를 따라 충실하게 치료를 받을 것이고 또 잘 견뎌낼 것이다. 일어서 집으로 향했다.
한강을 건너며 퇴근시간에 무심히 지하철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마스크로 반쯤 가려진 얼굴에 지친 일상의 고뇌가 써져있었다. 누구에게나 삶은 편치만은 않구나. 건강하던 시절 내가 일을 마치고 올 때도 내 삶이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아마 내 능력 밖의 가능성을 나의 정체성으로 만들기 위해 현실은 늘 부정됐기에.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 나는 존재하는 것" 기형도의 "오래된 서적"이 인생의 양 극단 사이에서 하우적 거리는 나의 이력서처럼 펼쳐졌다. "나의 영혼은 /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이상대로 살고자 했지만 현실에 무너진 시인의 고백은 화살처럼 내 속을 파고들었다.
합리적 이성은 허상에 불과한 세상에서 개인의 불행에는 아무도 책임이 없다. 불합리하게 개인의 불행에 책임지지 않는 세상에 원망을 퍼부으면서도 사회에 참여하고자 했던 내일의 계획은 수정되겠지만 세상 탓, 내 탓은 이제 의미가 없다. 이전에도 지금도 나의 인생은 변함없이 대기상태이다. 넋놓고 마냥 기다릴 시간이 없다. 시간을 잘 활용하자. 충분히 인생을 만끽할 시간이 있다. 진료실 앞에서 목마름을 참으며 40분을 대기하느니 그 시간 시원하게 차 한잔을 했다면 나는 시간을 초조하게 버렸다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간을 여유로운 자유시간으로 활용 할 수도 있었는데. 대기 상태를 초조한 두려움을 가중시킨다 몰아세우지 말자. 그 시간은 자유시간이다. 진료실 앞에서 아무리 동동거려봐야 내 순서는 멀었다. 다시 암과 싸울 예상을 하지만 미리 스스로 고립하고 세상과 단절하지 말자.
현실은 기형도의 시구절처럼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떤 이는 쉽게도 길아 찾아나가도 하지만, 나는 쉽게 그러지 못하지만 이 현실의 미로에 빠져나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환한 낮이 출구를 비추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도 출구가 폐쇄되지 않는 한 나갈 수 있다. 다만 이제 미로 속 실패한 길을 다시 걷지 않도록 닫힌길을 표시하고 걷자. 어쨌거나 나는 살아갈 것이다. 나는 아직 존재하니까.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칙이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는 것, 즉 인간은 먼저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것, 미래 속에 스스로를 투자함으로 의식하는 것임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용문헌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p, 25)
인용 문헌
사르트르, 폴 (왕사영 역),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청아출판사, 1995
https://brunch.co.kr/publish/book/6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