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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Oct 13. 2024

고독사 아니고 재택사

자유롭게 행복하게  재택사하자

  새벽녘 지운이 깨 엄마의 이마에 손을 얹으니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지운은 석션기로 가래를 뽑아내고 타이레놀을 갈아 물에 타 엄마의 꼭 다문 입에 마우스피스를 물려 틈새로 흘려 넣었다. 하지만 타이레놀은 엄마의 입에서 줄줄  허옇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일부나마 삼킨 게 있는지 지운 엄마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지운은 엄마를 일으켜 세워 안고 등을 두드렸다. 엄마의 뜨거운 몸에 안달이 난 지운이 냉장고에서 얼음과 물수건을 꺼내와 동이 틀 무렵까지 엄마의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가래를 빼면서 얼음찜질을 했지만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미음을  한 수저 떠 입으로 가져갔지만 엄마는 입으로 넘기지 못하는 혼수상태였다. 지운은 엄마의 얼굴을 찬 물수건으로 씻기고  의식 없는 환자에게 갈아입히기 편한 원피스를 꺼내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엄마의  상태를 알리고 입원 준비를 했다. 준비물은 대부분 병원에서 보호자인 지운이 사용할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정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 늘 그랬듯 사설 구급 대에 전화를 했다. 구급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지운은 엄마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가늠했다. 불덩이 같던 열이 내리고 편안하게 잠이 든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두 명의 사설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이 들것을 들고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선 나이가 좀 더 있는 구급대원이 지운에게 말했다.  

“아, 아하, 이를 어쩐다. 학생, 어머니 돌아가셨어.”

가방을 들고 구급차에 올라탈 준비를 마친 지운이 주저앉았다.    

“아녜요. 좀 전까지 가래 나오고 기침 나오고  열나고 이제 겨우 잠드신 거예요.”

구급 대원들은 어머니의 눈동자를 확인하고 맥을 짚으며 지운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운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태 같이 있으면서 어떻게 몰랐을까. 납득할 수 없는 지운이 구급대원들에 애원하며 말했다.

“아녜요. 병원에 가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늘 그랬던 거 아시잖아요.”

지운이 손을 엄마의 이마에 대어 체온을 짚으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두 남자는 이불로 엄마를 덮어 가렸다. 지운은 이불을 끌어내리며 외쳤다.

“우리 엄마 아직 안 죽었어요. 봐요. 몸이 따뜻해요. 병원에 데려다주세요”

 젊은 대원이 말했다.

“일단 병원으로 모시고 가죠. 뭐라고 하면 병원 오다가 구급차에서 돌아가셨다고 하죠.”

“아 그게 차 안에 돌아가셨다고 하면…… 아 학생이……..” 나이가 든 대원이 말을 잠시 멈췄다가 지운을 보며 말했다.

“일단 병원으로 갑시다. 병원에서 언제부터 이 상태냐고 물으면 그냥 모르겠다고 하고…….”

두 사람은 이불을 덮어 지운의 엄마를 가려 구급차 안에 태웠고,  옆에 앉자마자 지운은 이불을 걷고 엄마의 코밑으로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그러나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지운은 몸이 떨려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불을 더 걷어내고 엄마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심장박동소리를 들으려 귀를 밀착하고 떼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신경외과 의사가 달려왔지만 그 역시 고개를 저으며 응급실에서 엄마의 사망선고를 내렸다.

 제일 먼저 연락했지만 서울 길 모른다며 모여 함께 오느라 지운의 이모들은 지운의 친구와 선배들보다 더 늦게 저녁나절이 돼서야 도착했다. 두어 번 밖에 본 적 없는 지운의 큰 이모는 곡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초상집에 곡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여태 울고불고 눈물바람으로 영정사진과 빈소를 차리던 지운이 뜨악했다. 누구 하나 알려주지도 알려하지도 않았던  곡 읊는 소리가 장례식장을 압도했다. 지운의 큰 이모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가 무수한 경조사를 치른 터라 전문 직업인처럼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이고 큰 이모의 음산한 곡소리에 잠시 넋이 나가 서있는 지운에게 그녀 엄마의 바로 아래 동생이자 가장 친했던 조치원 이모가 물었다.

“오늘 언제 돌아가신 거야? 병원에서 돌아가신 거지?”

병원에 도착한 이후로 지운은 구급대원 아저씨들과의 암묵적인 약속을 지키려 “아마도 구급차 안에서 돌아가신 거 같아요.”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조치원 이모가 지운의 옆구리를 세게 찔렀다. 어리둥절한 지운이 이모를 쳐다보자 지운을 끌고 장례식장 구석으로 가 말했다.

 “정말 구급차 안에서 돌아가신 겨? 병원에서 죽은 겨? 확실하게 말혀봐.”

조치원 이모가  급하게 말하느라 평소 안 쓰던 사투리를 썼다.

“담당 의사가 병원에서 돌아가신 걸로 서류에 적었어요”.  

“암, 그래야지. 그리고 지금부터는 절대 구급차서 돌아갔다고 말하지 마. 괜히 친척들 사이에 객사했다고 말 나니까. 나머지 이모들하고도 다 그렇게 말을 맞출 테니까.”

“그깟 게  뭐 중요하다고 아무렴 어때요.”

“아이고, 네가 어려서 뭘 모르는 소리다. 그런 소리 해대면 본데없이 키웠다고 언니가 욕먹어.”

지운은 엄마가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병원에도 집에도 얼굴 한번 제대로 안 비치던 이모들이 객사니 병원사니 떠들어대자 야멸치게 말했다.

“본데 따지지 말고 저 화투판이나 좀 치우세요. 곧 목사님 하고 교인 분들 오실 텐데 창피스러워요. 그리고 실은 저 오늘 아침에...... 아녜요.”

 지운은 이모들이 얄미워 집안에서 가셨고 얼굴이 편안하게 보였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이모들 마음이 개운하지 못하게 하려고 괜히 심술을 부렸다. 지운은 타지에서 떠돌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죽음을 맞는 ‘객사’라는 말이 친척들 사이에 돌까 봐 전전긍긍하던 그다지 편한 사이가 아니던 엄마의 동생에게 배알이 뒤틀렸다.  어머니가 구급차에서 숨을 거뒀네, 병원에서 돌아가셨네, 철딱서니 없이 떠들어대며 매정한 이모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었다. 객사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죄스럽게 지운의 어머니는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다 오십 중반의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고생하다 세상을 하직했다. 죽음을 맞을 나이가 결코 아니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을 혼자 양육하며 서울에서 살던 지운의 엄마는 오십 대 중반의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  지역 유지 소리 들으며 남부럽지 않게 살던 이모들은 이혼이라는 말에 동네 창피하다고 펄펄 뛰었고 자식 건사도 도맡은 지운의 엄마와 사서 고생하는 거라며 거의 단절한 채 살았다. 복지는 남의 나라 얘기였던 8,90년대 여자 혼자 의식주 해결은 물론이요, 자식 교육 시키느라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가,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기실 지운이 그때 엄마 나이가 되며 이해한 바로는 전조증상 무시하고 자기 몸은 돌보지 않은 결과로 남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지운이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그나마 다행인 점은  쓰러진 후 병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지만 마지막은 집에서 딸과 함께 있는 시간에 눈을 감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가장 마지막 순간만 잘 보낸 고달픈 인생이었지만 마지막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잊은 편한 얼굴이 딸 이지운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현재도 지운의 엄마처럼 50대에 돌연사나 중대 질환이 발병할 확률이 높다.  게다가  비혼으로 혹은 가족과 단절하고 나 홀로 살아가는 50대 1인가구의 비율이 전체에서 절반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는 50대 독거 암환자 여자 이지운이 이 땅에 드물지 않다는 것이고  현재 50대라는 나이대는 노년/고령자들에 비해 의료, 돌봄, 활동 등의 지원에 소외된 사각지대에 선 나이라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은퇴할 나이가 된 50대는 예상 수명이 늘어난 현재 세상에 얼마를 벌어놨던 점점 빈곤 해질 수밖에 없고 사회적으로 단절되며 궁핍해지며 지인들과의 교류도 낮아질 수밖에 없어 점점 고립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오십 평생 혹사하며 써온 몸은 탈이 나 뇌전증이나 뇌출혈 같은 돌연사가 많은 질병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죽음에 이르러 일정기간 내에 발견되지 못하는 고독사의 가능성이 50대가 제일 많은 이유일 것이다. 사회나 지역 단체서는 ‘무연고자’ ‘고독사’, ‘노인빈곤’ 등의 용어부터 들먹이며 사회적 공포를 조장하고 50대 이상의 싱글이 인구절벽, 노령연금 고갈의 원인을 제공한 비행장년들인 것처럼 묘사한다.

  50대 여자 이지운의 주변을 보면 그녀 자신을 포함해 열 손가락이 넘치는 친구들이 비혼의 삶을 살고 있다.  암 투병으로 죽음이라는 삶의 끝도 예상 미래에 포함시키기로 한  그녀는 향후  만족스러운 삶의 방향을 고찰하기로 한다.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가 막 하길 '역설의 역설처럼 나이가 들수록 몸이 아플수록 익숙한 곳에서 자유롭게 혼자 사는 삶의 만족도가 높다'라고 한다. 그래서 이지운을 통해,  50대 비혼 여자의 삶을 추적하며 사실증명을 시도하고 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우에노 지츠코의 주장에 의 조건으로 1인 가구의 삶을 인간에게 당연한 죽음을 감추거나 언어로 왜곡하는 공포감 조성부터 하는 사회행태에 경종을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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