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를 필사적으로 건너는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이정재가 초록색 트레이닝 복을 입은 포스터만 보고 요즘 소위 잘생긴 사람들 옆에서 '오징어가 되다'라고 사용하는 말을 활용한 드라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옛날 어린 시절 놀이와 생존 게임이 결합된 무시무시한 자본주의적 살육전이었다.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쉽게 총으로 빵 처리되는 걸 보자니 어떻게든 죽음을 멀리 연장하려 안감힘쓰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마치 기훈이란 인물이 내 모습인 듯 보이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철이 없었지만 엄마의 손길로 모든 어려움이 쉽게 해결되던 그 시절이 사무쳤다. 아직도 '엄마'를 부르며 집안으로 달려들어가면 모든 게 해결되었던 시절처럼 나도 모르게 힘들때 '엄마'라 부른다 - 혼잣말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듯하다. 그런데 문득 엄마도 그때 해결 못해줬던 일 하나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막다른 골목 끝에 있었고 그 앞에 공터가 있었다. 맞은편 이층 양옥집엔 벚나무가 있어 사월 중순이면 벚꽃이 눈꽃처럼 흩날렸고 그곳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친구들과 땅따먹기, 공기놀이, 고무줄넘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종종 여럿이 동시에 고무줄을 탈 때 다 같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폭 칙칙폭폭.......”
그럴 때, 간혹 그 벚나무 집 맏딸인 사십 넘은 노처녀가 이 층 베란다로 나와 우리를 야단치며 놀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개 나와 친구들은 “시끄러워”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흩어지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앞장서 저항을 했다.
“가스나들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왜 맨날 남의 집 앞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어른 말이 야속해서가 아니라 그때 나는 그 벚꽃을 좀 더 즐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름의 권리 주장을 했다. “여기 우리 집 앞이기도 한데요.” 당연히 어른한테 말대답한다고 더 짜증스러운 반응 나오더니 갑자기 어디선가 수도 호스를 끌어와 우리들 쪽에 대며 물을 뿌렸다. 우리는 일단 물벼락을 피해 우리 집안으로 도망쳐 들왔지만 상당히 분했다. 나와 친구들은 앞집 노처녀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방에서 분필 한 자루를 찾아들고 나가 그 집 문 앞에 큰 글씨로 또박또박 적었다.
“뚱뚱 아줌마 미워요. 뱃살도 심술도 많아서 시집도 못 가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악담을 퍼부었다. 물론 우리의 행적은 바로 들통이 났다. 화가 잔뜩 나 우리 집에 들이닥친 앞집 여자에게 엄마는 사과를 했다. 엄마는 그녀 앞에서 나를 붙잡고 “어른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다신 그러지 마!” 그리고 이어 “사람 외모 가지고 그러면 안 돼.”라고 단호하게 그러나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엄마도 그렇게 말해 놓고는 당황했던 건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 엄마의 웃는 모습에 그 여자는 더 화가 났던 모양이었다.
“야! 너 얼마나 시집 잘 가나 보자. 어린 게 되바라졌어.”
그렇게 새초롬한 말을 내뱉으며 뒤돌아 나가다 덧붙였다.
"지는 뭐 크면 왕자가 그냥 채갈 줄 알고."
그때 내가 잘못을 빌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저 엄마 뒤에 숨어 다시는 그 앞집 아줌마를 만나는 일이 없기만을 기도했다. 엄마는 나가는 여자 뒤통수에 대고 “에구, 애 하고 뭐 하는 거야. 나 참. 노처녀 히스테리도 아니고”라고 말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노처녀 아니 비혼 여자의 화는 내게 직격으로 향한 것 같다. 주문에 걸린 것처럼 어느새 나도 성격 까칠한 노처녀가 됐으니 이건 아주 제대로 벌을 받는 것 같다.
어린 내가 그때 그랬고, 지금은 당하듯 미혼자는 사회적 패배자 취급을 받는다. 냉정한 사회에서, 홀로 잘 살아가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저러니 여태 결혼을 못했지"라는 흠집만 잡힌다.
사랑의 성공도 객관화된 방정식으로 만들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들의 침입으로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그래서 사랑을 기적이라 칭하는 이들이 있는지 모른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어느 날 만나 동시에 가슴 설레며 사랑으로 발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이상과 현실은 늘 거리를 유지한다. 가까워 지려하면 현실은 용케도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틈을 벌린다. 그 벌어진 틈새로 나의 사랑과 결혼은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그땐 골목길에서 뛰어놀 체력도 있었고 뒤로 숨을 어머니도 있었다. 일요일 점심때라 그런가 흰 죽과 장조림 냄새가 그립다. 감기 몸살을 호되게 앓고 일어난 날 위해 끓인 흰 죽과 내 옆에서 엄마가 먹기 좋게 장조림 고기를 찢어 숟가락에 얹어주던 날이 기억이 난다.
점심으로 속 편하게 흰 죽이나 쑤어 먹을까. 그런데 짭쪼름한 엄마표 장조림이 없어 그 맛이 안 날 거 같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안 하지만 더더욱 아무것도 하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