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가는 날

삶의 질과 기대

by 창골 샌님

지난봄부터 마음이 들썩댔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피카소 100주년 기념전이 열린다는 기사를 본 후 머리로는 전시회장을 수십 차례 찾았지만 몸 상태가 따라주질 않아 8월 막바지에 이르도록 엄두를 못 냈다. 게다가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마치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나중에 파리로 직접 그림을 보러 가지 뭐. 이제는 나중으로 미루는 일은 하지 말자고 마음먹었지만 무리를 하고 나면 꼼짝없이 일주일 이상 앓아눕는 상태에서는 한 두 가지쯤은 나중을 기약하는 것도 인생에 기대가 생겨 괜찮을 듯싶다. 기다리고 대기하는 일은 질색이지만 내가 좀 더 활력 있는 미래를 즐길 여지가 생기니까.

미술에 재능이 있거나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다소 허영끼도 작용하고, 살아생전 찢어지게 가난했던 화가의 사후 수십억을 호가하는 그림을 보며 인생의 이율배반성과 영원성을 얻는 명작의 예술성 사이를 오가며 생각이란 것도 좀 해보기 위해, 늘 국내외의 유명 미술관전이나 유명 작가 전시회가 있는 곳을 찾아보고 관람을 가곤 한다. 대개 야간 관람이 있는 수요일이나 토요일 저녁에 미술관을 찾아가는데 많은 인파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미술품을 감상하기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미술관에 간다는 건 늘 그를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기대는 설렘을 낳고 삶의 활력이 되어 꿈틀대며 열기를 뿜어내곤 한다. 봄부터 여름이 지나기까지 오늘은 갈 수 있을까 매일 몸의 상태를 가늠했다. 항암치료 동의서에 길게 나열돼 있던 모든 부작용에 시달리면서 시간이 가면 좋아지겠지 했지만 몸에 투하된 화약 약물과 방사선의 독성은 쉽사리 빠져나가지 않고 온몸의 활기를 눌렀다. 미술관에서 서서 거닐며 그림을 본다는 건 내가 그만큼 살만해졌다는 증거인데... 어느덧 나의 일상 복귀 시발점은 내가 미술관에 가는 날이 되었다.

설사 미술관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하더라도 항암과 사라진 여성 호르몬 여파로 듬성듬성한 머리와 림프부종으로 퉁퉁 부은 팔은 결코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아니지만, 설사 만나도 어쩌면 모른 척 지나쳐 버릴지 모르지만, 아예 못 알아볼 수 도 있지만, 그가 생각나는 건 내 낭만의 아쉬운 작용이겠지. 어쨌든 진작부터 미술관을 갈 수 있는 날을 손꼽아왔다.

미술관과 그가 연결되어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 것은 분홍 셔츠를 입은 청년 때문이었다. 항암 치료 끝 무렵, 집에서 나와 평상 시라면 오 분도 안 걸리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고통이었다. 몇 걸음 걸으면 손발이 뻣뻣해지고 저리면서 심장이 요동을 쳐 숨이 턱밑까지 차 올라 길가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 길바닥에라도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걸터앉을 곳이라도 있을까 두리번거렸다. 중학교 교문 앞에 외부차량이 주차를 못하도록 펜스가 쳐 있어 거기 걸터앉기라도 하면 한결 나을 거 같아 걸음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혼자 걷기 힘드신 거 같은데........"

손에 물병을 들고 백팩을 멘 청년이 말을 걸었다. 항암 탈모증을 가리려고 더위에도 두건에, 챙이 달린 모자까지 겹쳐 쓴 외양이며 휘청거리다, 어기적거리다 몸의 중심이 흐트러진 채로 걷는 모양새가 꽤나 안쓰러워 보인 모양이다. 아니면 어머니나 친척이 치료받는 걸 보고 알았을 수도 있고. 낯선 청년의 호의는 반가웠다. 그러나 시간 여유도 있고 혹여 할머니 취급하나 싶기도 하여 내 힘으로 가고 싶었다.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저으며 거절을 했다. 그러자 청년은 머쓱해하며 얼굴까지 빨개졌다. 청년에게는 거절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괜한 오지랖이라 생각해 그의 호의가 위축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바로 저 병원에 가요.”

“아, 네. 그럼.”

겨우 화색이 밝아진 청년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복 받을 거예요. 오늘 좋은 하루 될 거예요”

내 목소리도 잊어버릴 만큼 침묵 속에 살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니 수다스러운 동네 아줌마처럼 말했다. 청년은 “네”라고 답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나 건널목에서 건너지 않고 서서 다시 나를 보았다. 그는 세월아 네월아 걸어가는 나를 기다렸다. 병원 앞 삼거리엔 신호등이 없다. 옛날 재개발 구역이라 신호등이 오히려 교통체증을 가중시킨다는 민원 때문에 심야에만 신호등을 켜는 곳이라 그 건널목을 건널 때마다 성질 급한 차가 달려들까 늘 두려운 곳이었다. 내가 건널목 앞에 도착하자 그는 다시 다가와 내 팔을 꼭 붙잡고 다가오는 차들이 멈추도록 손짓을 하며 함께 건넜다. 그리고 내가 “정말 고마워요”라고 거친 숨을 내쉬며 말하자 그는 나의 팔을 다시 잡고 병원 정문 앞까지 걸었다. 그리고 “그럼 전 이만.”고개를 꾸벅하며 걸어가는 그의 옆모습을 보니 입고 있던 분홍 셔츠에 땀이 서려 옆 자락은 갈색처럼 보였다.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 주사를 맞으며 병상에 누워 있자니 분홍 셔츠 입은 청년이 생각났고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그 사람도 분홍 셔츠가 잘 어울렸었다.


이십여 년 전, 초여름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시청 근처의 어느 카페에서 서로를 모른 채 각자 커피를 마셨다. 아마 당시 유행처럼 곳곳에 포진해 있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란 이름의 카페였을 것이다 - 후일 샤갈은 ‘눈 내리는 마을’이란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는 것을 그가 알려줬다. 그날 그는 오래된 연인에게서 이별 통지와 동시에 청첩장을 받고 허망한 마음에 점심시간이 끝났음에도 회사로 복귀도 않고 하염없이 걷다 카페에 들렀고, 나는 서점에 들렀다 담배가 피고 싶어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그러나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뿜자 주위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환청처럼 혀 차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이 드신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IMF 사태의 종말과 월드컵 응원 열기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레드데블’도 ‘붉은 악마’도 마음에 안 든다며 ‘붉은 응원단’-이 의견도 빨갱이 같다고 성토당했지만- 아니면 다른 좋은 이름 다 두고 왜 악마를 선택했는지 열띤 토론 중이었다. 그런 틈에서 더 이상 담배를 피기도 머쓱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올 참이었다. 나는 카페 안을 괜히 두리번거렸다. 맞은편 구석 2인석 소파에 혼자 앉아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분홍 셔츠의 목과 가슴 부위가 땀에 젖어 있었다. 축축한 느낌. 너무 빤히 그를 봤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는 매가리 없이 앉아 나의 눈빛을 피하려 들지도 앉았다. 결국 민망해진 건 나였고 눈을 돌렸다. 분홍 셔츠의 남자가 계산을 하고 나갔다. 내가 좀 쳐다봤다고 나갔나. 바람맞았나 보군, 나는 생판 모르는 그에게 삐죽거리다 동정했다. 나도 카페를 나와 덕수궁 앞을 지나다 시내에 나온 김에 ‘샤갈 특별전’이 열리는 미술관에 갔다.

평일 오후 미술관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난 시대의 불운한 일생을 산 예술가의 작품들을 미술관에서 본다는 게 사치처럼 여겨지는 현실. 그러나 화가들의 그림들에 서려있는 삶의 불안과 환희 그리고 기대감을 직접 대면한다는 건 카타르시스를 준다. 고통이 승화된 예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전시된 그림들과 마주하면서 나는 샤갈의 꿈속을 날고 허공을 떠다니는 몽환적인 푸른색과 흰색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카페에서 봤던 분홍 셔츠를 입은 남자를 다시 보았다. 그때부터 그림보다 그 남자를 열심히 관찰했다. 화려한 그림의 색채가 오히려 그의 젊은 생기를 앗아가는 같았다. 너무 말라서인지 미술관의 조명에 그의 피부는 말린 푸성귀처럼 누렇게 떠 보였다. 분홍 셔츠는 빛이 바랜 인디언 핑크색으로 보였는데 오히려 그게 그를 고뇌하는 예술가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의 훔쳐보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호기심의 대상이라는 것은 유쾌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혹시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 삼층으로 이어진 전시를 보기 위해 계단을 올라야 했기에 나의 시선은 어차피 그를 벗어나야 했다. 오래된 건물의 계단은 폭이 좁고 가팔랐다. 뒤에서 우르르 한 무리의 학생들이 왁자지껄 올라오며 책가방을 돌리며 장난치다 책이 잔뜩 든 가방에 나는 옆얼굴과 어깨를 강타했다. 순간 무방비 상태의 내 몸이 휘청거렸다. 본능적으로 계단의 난간을 잡으려 손을 뻗쳤다. 하지만 손이 허공에 맴돌고 나는 뒤로 넘어갈 거 같았다. 학생들도 놀라 나를 잡고 그가 성큼성큼 뛰어올라 등 뒤에서 나를 받쳤다. 그 덕에 나의 몸은 쉽게 균형을 찾았고 붙잡아준 그는 믿음직스러웠다.

샤갈의 감흥과 어울리진 않았지만 그날 저녁 그와 함께 국수를 먹으러 갔다. 그리고 그가 내게 주말에 과천 국립 미술관에 가자고 했다. 그는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늘 전화를 하면 “미술관 갈래요?”라고 물었다. 그땐 그게 그렇게 좋았다.

불쑥 찾아온 설렘은 삶의 생기가 되었고. 미술관은 너무 뜨겁지도 냉정하지도 않은 낭만을 열정 속에 유지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나는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이 모델인 인물화를 좋아했고 그는 환상과 현실을 가로지르는 풍경을 담은 그림을 좋아했다. 서로 다른 취향은 호기심처럼 흥미를 유발해 서로를 끄는 매력이 되지만 서로에게 익숙해진 후 그 서로 다른 취향은 접점이 없이 평행선으로 간다. 우리는 그렇게 2년간 만남을 이어갔지만 서로 사귀는 사이라 규정한 적이 없으니 헤어지자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연락처를 잃었다. 그런데 낭만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가끔 특별 전시회가 열리는 미술관 포스터 광고를 보면 그가 생각난다. 그리고 미술관에 갈 때면 여기저기 힐끔거려 보곤 한다.


병마에 삶의 질은 현저히 추락했다. 다시 허영심이 생긴다. 미술관에 가야겠다. 이제 찬바람이 분다. 암 전이와 맞서려면 정신도 건강해야겠지. 만나도 초췌한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그라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니까. 올 가을에는 무슨 전시가 있는지 검색을 해봐야겠다.

20191128_4310936_1574920585.jpeg 나와 마을(1911) /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keyword
이전 11화우정에 금 가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