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지인의 딸이 유치원에서 집안의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들고 온날 그 부부는 급하게 그러나 고심하며 집안의 가훈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
그러나 유치원 선생님이 이 문구는 가훈이 될 수 없다며 다시 만들어오라 했단다. 좋은 말인데 그 유치원 선생님의 선입견을 타파하기 위해 이번엔 "착하게 살자"로 적겠다는 우스개 소리를 했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말자체만 놓고 보면 인간관계를 소중히 하고 재고할 수 있는 좋은 말이건만 1968년 개봉한 신파극의 전형으로 취급되는 불륜 멜로 영화의 제목이기 때문에 의미도 함께 추락한듯하다. 신파가 삼류라는 오명은 이제 불가분이 된 거 같다. 하지만 신파도 나름 역사적 뼈대가 있다.
신파(新派)는 말 그대로 조선시대 말엽 서양의 새로운 지식과 논리의 발견이어서 신파였지만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신파라면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울고불고 눈물 짜는 최루성 극을 대표하는 삼류가 되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만 봐도 신파 영화의 이야기 자체가 불륜을 미화하고 본처를 악녀처럼 묘사하는 논리도 없고 도덕이나 사회상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고물상에 팔고 엿 바꿔 먹었으니 삼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신파극은 서양식 이야기 공식을 갖춘 형식으로 유입되어 일제 강점기를 거쳐 일제의 식민사관과 전쟁 선전용으로 이용되다 625 전쟁을 거치며 어려운 시절 사람들을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 줄 대중오락으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60,70년대 신파극은 가장 공감대 형성이 잘되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로 변천하였다. 지금은 신파(新派)의 원 뜻은 온데간데없고 신분 차이나는 사랑, 불륜을 애틋함으로 포장하거나 출생의 비밀이나 애증의 복수극 등 구닥다리 클리셰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의 개연성은 찾기 힘들고 심지어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인물들의 행태를 보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곤 한다. 이는 신파는 주인공들의 절실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감정 표현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신파극의 감정 과잉은 관객에게까지 흘러들어 눈물샘을 자극해 북받치는 뜨거운 감정에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래서 신파는 대중문화계의 욕받이로 전락했어도 그 욕받이 역할마저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마약 같은 장르가 되었다.
그래서 신파를 삼류라고 욕하면서도 신파 영화를 보면 행복하다. 나처럼 삼류라서 즐겁다. 요즘은 뼈 전이 최종 진단을 기다리며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그래 난 이겨낼 수 있어' '겁내지 말자 어차피 사람은 다 죽잖아. 인생을 허송세월 하지 말고 차분히 계획을 세워 살라는 신의 계시야'등등 긴 세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것도 잊은 신을 찾기까지 한다. 이렇게 맞은 불면의 밤, [너는 내 운명]과 [애자]를 연속으로 다시 보며 눈물 콧물 흘리고 우느라 티슈 한통을 다 썼다. 생각 없이 시간 때우기 용으로 보기 좋을 거 같아 보기 시작했는데 신파의 절절한 감정은 기어코 내 눈물을 짜내고 ‘인생 뭐 있어? 이렇게 헤헤 웃다가도 울고 짜는 게 인생이지!’ 라며 근거 없이 세상 이치에 도달한 도인의 마음마저 갖게 했다. 게다가 신파를 보며 수준 이하라고 비웃는 나의 오만에 체루탄 투하하듯 터트리는 눈물샘은 나의 유치함을 씻어나가 좋다.
신파극들의 특징은 감정이 흘러넘치니 갈등의 본질을 왜곡하여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내달린다. 며칠 굶은 식구가 쌀이 생겼으면 죽이든 밥이든 해서 나눠 먹으면 될 일을 신파는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구한 쌀로 물을 부어 양을 불리며 죽을 끓였는데 하필이면 완성된 죽이 든 솥을 엎어 결국 온 식구가 굶는다는 식이다. 서사의 논리적인 전개는 감정 분출을 위해 이렇게 밀려 나가 신파를 유치한 퇴행 서사라고 비웃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비웃으며 관객은 원래 신파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기에 눈물이 넘쳐흐르는 것이라 핑계대기 좋다. 덕분에 오히려 관객 자신이 처한 현실의 비극을 과 몰입하여 감정과잉이 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이렇게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구태의연하다 천시받으면서도 꾸준히 애용되는 신파의 서사는 여전히 일차원 적이지만 감정에 솔직하며 심지어 10년 전 작품이지만 [너는 내 운명]의 경우 대놓고 신파라고 표방하지만 진일보한 서사를 보여준다. 에이즈 환자와 농촌 총각을 통해 사회적 이슈와 신파극보다 더 통속적인 신문기자를 비롯해 지식인을 통렬히 비판한다. 이런 세상 편견을 무시하며 사회적 이슈에 대항하는 두 주인공은 정말 사랑밖에 모르는 인간의 순수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가장 근본, 사랑의 힘을 역설한다.
나도 트로트의 흥을 이해하고 신파의 울림을 알게 됐다. 이제 신파를 통속적인 삼류 이야기라고 거두절미하고 혹평하고 조소하는 이들에게 ‘너 나 잘하세요.”라고 핀잔 줄 연배가 됐다. 그러니 사회 소시민으로 살아온 날들에 대해 이제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게 아니라 원래 더 컸다’는 근거 없는 이유로 ‘왜 나만?’이라 악쓰며, 내가 제일 억울한 피해자인 체 하는 상황극을 이제 벗어나 보자. 어떤 유혹에도 스스로를 다독일 줄 알고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섰으니 자기 연민 같은 감정은 혼자 궁싯거리지 말고 이제 드라마를 보면서 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