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
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을 먹는 날. 호텔 조식의 가격이 꽤 비싼 편이었지만 어떻게 먹는 것인지 궁금해서 예약해 보았다. 알고 보니 다음날 아침 호텔 방으로 아침식사를 가져다 주는 방식이었다. 조식 시간에 맞추어 작은 테이블 위에 빈틈없이 올린 음식을 가져다 준다.
빵, 야채, 과일, 스프레드, 육류, 치즈, 착즙 주스까지 구성도 다양하다. 양이 너무 많아서 점심까지 먹기에도 충분할 지경이다. 괜히 비싼 것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그 오래되고 좁은 엘레베이터를 통해 음식을 어떻게 올렸을까 하는 것이지만.
둘째 날 어디를 갈까 하다가, 부모님과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어도 나는 카타콤을 가 보고 싶었다. 아직도 그 규모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서 길 잃기 좋다는 거대한 지하 묘지 카타콤. 몇 번 파리에 왔지만 가 보질 못해서 가기로 하고, 친구와 카타콤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카타콤에 도착해 친구를 만나고 나니 사람이 너무 많다. 줄 서 있는 사람을 열심히 둘러보며 견적을 내어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다리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 결국 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카타콤은 포기하고 다른 곳을 가 보기로 한다. 지금 에펠탑에 간다면 에펠탑 위로 올라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혹시나도 역시나다. 어제와는 달리 가까이 갈 수 있는 에펠탑에 가까이 가니, 다리 4 개 근처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20분 정도 기다려 봐도 도저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결국 에펠탑에 올라가는 것은 포기하고 잠시 근처를 구경한다. 근처 매점에서 파는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으면서 부모님이 기념사진 촬영 하는 것을 구경한다. 얼린 물을 파는 잡상인들이 물을 높이 들고 끝없이 외친다. 원유로, 원유로!
에펠탑에서 오르셰 미술관 가지는 센 강을 따라서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 파리는 온갖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다양한 목적의 사람들이 있다. 설문조사 호객꾼들이 달라붙어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이, 친구가 진지하게 대답을 해 주려 하고 있다. 야 너가 그런걸 대답해 주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면서 허탈하게 웃으며 친구를 끌고 나온다. 그러자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잡상인도 아니고 호객꾼도 아닌 것 같은 기묘한 사람들 한 무리가 지나가며 뭐라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한다. 저 사람들 프랑스어 하는거야? 아닌것 같은데? 진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친구는 고개를 슥 젓는다.
러시아 월드컵의 결승전이 열리는 날, 결승전까지 진출한 프랑스 덕에 파리의 분위기가 뜨겁다. 곳곳에서 프랑스 국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응원의 열기로 뜨거운 사람들도 있지만, 고풍스러운 조각상들과 센 강변의 한가로운 분위기는 그 와중에도 호젓한 분위기를 지킨다.
오르셰 미술관은 옛날에 기차역으로 쓰이던 거대한 건물을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만족스러워서, 부모님께 하나씩 들려 드린다. 중앙에 거대한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구경하고 이런저런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이내 취향이 너무 다른 탓인지, 시간을 정하고 나중에 만나기로 한다.
오르셰 미술관에서는 교과서에서 몇 번 봤을 법한 그림을 볼 수 있다. 그중에 내가 잘 아는 그림이 나와 친구에게 이야기 해 준다. 귀스타브 모로의 오르페우스 이다. 인상적인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있기에 친구에게 이야기 해 주니,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신기해한다. 한국에서는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한번씩 읽게 해 하며 장난쳐 넘겨 본다.
중간중간 사진을 찍으며 위쪽에 올라가면 센강 쪽 전망이 보이는 최상층이 있다. 꼭대기까지 올라오느라 힘든 사람들을 위한 푹신한 의자도 있고, 유명한 그림들도 있다. 그런데 구경을 하다 보니 알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반가움에 앞서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서 세계일주를 간다고 했었다. 파리에 언제쯤 간다고 해서, 오 그때 나도 부모님과 파리에 있겠는데 하며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오르셰 미술관에서 만나게 될 둘은 상상도 못했다.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건강과 안전 조심하고, 남은 일정 무사히 마치라며 간단하게 인사를 건낸다.
미술관 구경을 마치고 밖에 나와 매점에서 음식을 사 먹는다. 아침 식사에서 챙겨온 빵을 먹으며 간단한 점심 요기를 한다. 친구는 치즈와 햄이 들어간 크레페를 사 먹었다. 한국에서 크레페는 달콤한 디저트 느낌으로 햄과 치즈를 넣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따뜻한 크레페에 살짝 녹은 치즈와 어우러지는 햄의 조화는 상상 이상으로 맛있다.
저녁 예약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어디를 갈까 했는데 친구가 장소 하나를 추천한다. 큰 백화점이 있는데 요리에 관련된 것만 판다고 한다. 요리에 관련된 것만.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바로 가기로 한다
백화점 처음부터 끝까지 요리 관련된 것들만 있다. 다양한 식재료들부터 시작해서 요리도구들까지 있다. 파리에 몇 번 오는 동안 이런 장소를 몰랐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는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하며 친구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고기와 젤라틴을 섞어 익힌 상태로 병에 담아 둔 파테 느낌의 병이 잔뜩 준비되어 있는 것이 신기하다. 내 눈에는 전혀 맛있어 보이지 않지만, 친구는 정말 맛있다며 입이 마르게 칭찬한다.
물이 진열된 거대한 찬장에는 각각 다른 종류의 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케이크와 트러플 같은 것들도 구경할 수 있다. 해산물 진열대 근처에는 바로 요리해 먹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사서 먹을 수 있는 것 같다. 시간이 있다면 먹어 보고 싶지만, 저녁을 예약해 뒀기에 먹기는 쉽지 않았다. 해산물 대신 친구가 추천해 준 말린 버섯 모음과 향신료 같은 것들을 샀다. 친구와 부모님이 백화점 중간 카페에서 쉬는 사이, 나는 나머지 층들을 돌아 본다. 고층은 조리 기구가 한가득이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음을 아쉬워하며 한바퀴 돌아본 뒤 다시 카페로 돌아간다.
카페로 가 보니, 월드컵 결승전이 막 시작된 모양이다. 카페의 큰 티비에서 월드컵 결승전이 나오고, 직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다같이 축구 경기를 보고 있다. 다들 똑같은 곳을 보고 있는 뒷모습이 재미있다.
저녁 식사를 몽마르뜨 언덕 근처로 예약해 두었기에, 시간에 맞춰 몽마르뜨 언덕을 구경한 뒤 가기로 한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몽마르뜨 언덕을 올라가려면 노면전차를 돈 내고 이용하거나 언덕을 직접 걸어 올라가는 방법이 있는데, 이때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몽마르뜨 언덕 올라가는 길은 그야말로 호객과 강매의 대명사였다. 그때 당시 몽마르뜨 팔찌단 이라는 악명높은 별명이 있었다. 부모님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고민 없이 노면전차를 타고 언덕 위쪽까지 올라간다.
사크레 퀴르 대성당은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져서 흔히 생각하는 고딕양식과 다른 모습이 독특하다. 위에서는 넓게 펼쳐진 파리의 전망을 볼 수 있다. 성당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는 부모님과 언덕 근처를 구경만 하기로 했다.
저녁 시간에 맞춰 옆쪽 계단을 통해 몽마르뜨 언덕 근처 골목으로 돌아가 음식점으로 향한다. 내려가는 골목의 계단은 한산하다. 중간 사람으로 가득찬 카페를 지나갈 때 독특한 냄새가 난다. 나는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했지만 이게 그거다 라는 느낌이 든다. 대마지 이거? 응 대마야.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음식점에 거의 다 와 가니, 축구 경기가 끝난다. 음식점 밖에서나 안에서나 결승전을 보던 사람들이, 일단 프랑스의 승리로 결승전이 끝나자 함성을 내지른다. 하지만 약간은 고요한 분위기가 유지된다. 결승전이 끝나고 잠깐동안 심판의 협의를 거쳐 최종 승리가 결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약간 지나자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승리를 축하하며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월드컵에서 승리한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흥겨움이다.
밖에서 축제 분위기가 벌어지는 사이 우리는 음식점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우리 가족과 친구 뿐이다. 몽마르뜨 언덕 근처에 있는 합리적인 가격의 코스 요리 음식점이었는데, 근처 가게들을 돌아보니 후기가 괜찮아서 선택했었다. 왁자지껄한 밖을 피해서 음식점 안쪽에 네 명이서 자리를 잡는다.
네 명이서 각각 다른 코스 요리를 시키니 다양한 요리를 조금씩 먹어볼 수 있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재미있는 것은 후식으로 치즈가 나온 것인데, 푸아그라보다 한 단계 높은 고난이도 메뉴이다. 나와 부모님은 이건 진짜 못먹겠다고 했다. 친구는 엄청 좋아한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길거리가 축제 분위기의 군중으로 바글거린다. 사방팔방에 나부끼는 프랑스 깃발을 보면서 지하철로 향했다. 파리 야경을 보기 위해 예약해 둔 곳으로 가려는데, 매우 혼잡할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작은 지하철이 들썩거리면서 움직인다. 지하철이 들썩거릴 수 있냐고? 말이 안되는 것 같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걸 보기 전까지는.
친구는 중간에 내려야 했기에 지하철 문이 열리는 짧은 순간 작별인사를 건낸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마지막 인사를 나눌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중에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데,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면 좀 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도 되지 않을까. 다행히, 지금까지 연락이 되는 사람이라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몇 정거장만 가면 되는 상황인데, 맞은편에서 지나가는 지하철 안이 술에 잔뜩 취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인다. 게다가 지하철 경적까지 울리는 것을 보며 부모님을 모신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을 지하철 구석에 몰아넣고 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문이 열리고, 딱 봐도 취한 것 같은 사람들 한 무리가 들어와서 프랑스 국가를 열창하며 파티 분위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몇몇 사람들이 노래를 같이 불러 주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가 타고 있던 지하철의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한 정거장이 지나자 술 취한 사람들은 다시 내렸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적지인 몽파르나스 타워에 도착해 검문검색을 마치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나는 심적으로 너무 지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성향이 각각 다른 부모님 두 분을 모시고 신경쓸 것이 많은 상태에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감정이 안 좋아진 것 아닐까 싶었다. 부모님 두 분을 모시고 모든 것을 내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행을 한 것은 처음이었으니, 나도 신경쓸 것이 많은 상황에서 지쳤던 것 같다.
약간의 감정다툼이 있었지만 어쨌든 결국엔 옥상에서 파리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해 지기 직전에 도착한 덕에, 옅은 노을 아래 밝아져 오는 파리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잠깐이나마 여행 동안 있었던 무거운 감정들을 다시 생각해 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에펠탑이 반짝거리는 불빛을 점등할까 해서 늦게까지 기다렸지만 이날은 불을 켜지 않아서, 그냥 야경 구경만 충분히 하고 내려왔었다.
전망대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니, 완전히 어두워진 밤인데도 길거리가 사람으로 가득하다. 원래는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려 했지만 들썩거리는 지하철을 봤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는다. 지금 탄다면 더 혼잡할 것 같아서 그냥 걸어갈까 하며 구글 지도를 자세히 본다. 숙소까지 거리가 생각보다 멀지 않다. 결국 숙소까지 천천히 걸어가기로 한다.
한밤중의 파리를 큰 길따라 걷는다. 지금은 보기 힘들게 된, 야외에 자리를 만들고 영업하는 레스토랑이 한가득이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네온사인과 신호등을 보며 걷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기다리는 사이, 앞쪽에서 차들이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승용차 위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멀리서 보이는 신기한 광경에 카메라를 꺼내 영상을 찍는다.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까지 보여준다.
중간중간 멋진 레스토랑을 보며 걷다 보니 숙소 직전의 센 강 다리까지 도착한다. 다리 위 혹은 강변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노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이 될 거라는 생각에 부모님과 함께 숙소 근처 레스토랑 안쪽에서 맥주를 한 잔씩 마셨다. 바빠서 정신이 없는 모양인지 맥주잔 아래쪽 구석이 심각하게 깨져 있다. 하하 이거 재밌네 하면서 잔돈을 팁으로 남겼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 여행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