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마후문
한국으로 돌아와서 몇 년 만에 미사에 참여하였다.
미사는
카톨릭 교회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종교의식이다.
마침 신부님이 새로 부임해 오시고
처음 집전하는 미사였다.
신부님의 나이를 알 수는 없었다.
그저 희끗희끗 해진 머리카락과 사제 서품을 받은 지
30여 년이 지났다는 말씀을 통해서
나이를 짐작할 뿐이었다.
신부는 한 성당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다.
보통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도 계신다.
생각해 보았다.
대략 50대 중반의 나이라면 이 성당에서 저 성당으로
몇 번의 이동을 하셨을까?
어림잡아 10번은 될 것이다.
카톨릭 사제는 혼자다.
물론 사제 서품을 받기 전까지는
그래도 비교적 평범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제가 되면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혼자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인생이니
혼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기준에서는 혼자이다.
외로운 길이다.
그 외로운 길을 자신이 선택했을까?
믿음을 가진 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선택은 결코 오롯이 스스로 한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고 강제도 아니다.
신학교 입학부터 시작하여,
부제서품을 받고,
사제 서품을 받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신부의 길을 포기하는 이도 있다.
사제로서의 삶은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길이다.
본인의 강인한 의지와 하느님의 뜻이 만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참고로 카톨릭에서는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종교 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유는 생략한다.)
중국 최초의 세계지도로 알려진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동양의 선교에 뜻을 품고 명나라에 왔다.
그리고 유교 문화권의 천주(天主)라는 표현이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Deus(Deus는 라틴어로 신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와 일치한다고 보고
하느님을
천주(天主)라고 지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한자 문화권에서는
크리스트교를 천주교라고 표현한다.
천주교 사제로서 살아가는 길,
신의 뜻과 함께
믿음과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길이다.
내 편도
한때는 사제의 길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사제들이 수도 생활을 하는 성소에서
어느 노 신부님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해 질 무렵,
창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이
십자가 아래서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하는
은퇴한 노 신부님을 비추었다.
해가 노을을 남기고 저무는 황혼기여서 그랬을까?
신부님의 지나온 삶을 비추는 노을이
쓸쓸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 모습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던 남편은
그 해가 지는 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꿈도 떠나보냈다.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은 신부님께 꽃다발을 건네며
환영식을 열었다.
그렇게 새로운 신부님을 맞이하였다.
사람을 맞이하는 일은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함께하는 것이다.
그 성당에서 머물다 떠나는
몇 년의 시간이 다가 아닌 것이다.
신부님은 신자들의 환영에 답을 하듯,
찬송가를 부르셨다.
찬송가를 부르시기 전 하신 말씀이
젊으셨을 때는 노래도 잘 불렀는데,
오랜 세월 담배를 태우다 보니
낭랑했던 목소리가 변했다고 말씀하셨다.
마침내
신부님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무반주였다.
그 나지막한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에서
신부님이 걸어온 인생길이 보이는 듯하였다.
신부님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혼자서 생각해 본다.
그리고 가사 속의 단 하나의 단어가
나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가시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던 그 길에
쓰인 가시관
가시관이라는 단어가 들리는 순간,
생각해 보았다.
그 성당으로 오시기 전까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떠날 미래까지 그리며
노래를 부르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아마도 사제로서의 삶도
가시관을 쓰고 한걸음 한걸음 무겁게 나아갔던
그분의 길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그때,
내가 쓴 관이 나의 모든 시간을 말해 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신부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 속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떠올려본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운명이었을까?
신부님이 쓰고 계신
보이지 않은 관은 무엇일까?
그 관은 쓰인 관이면서도
또한 스스로 쓴 관일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운명의 관을 쓰고 태어나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나면서부터
황금빛 왕관과 함께하는 예정된 삶을 살아간다.
다른 이는
도저히 벗어던질 수 없는 관의 무게로 아파한다.
또 다른 이는 자신의 운명의 관을 바꾸기 위해
오늘도 자신과 싸우면서 나아갔다.
가시관과 왕관,
그 어느 사이에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보이지 않는 관(冠)을 쓰고 있다.
주어진 관을
원하는 형상과
원하는 빛의 관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의지와 믿음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의지.
스스로의 의지를 의심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믿음 말이다.
나는 오늘도
나에게 쓰인 관을
내가 원하는 관으로
아름답고 빛나게 하기 위해
의지와 믿음의 날을 보냈다.
내 인생의 황혼기에
과거의 관과 지금의 관,
미래의 관,
그 모든 것이 나의 걸음을 말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