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갈빗살과 쌀국수
1990년대 후반기 IT 산업은 ISP, 웹 에이전시, SI 기업 이 세 가지 부류의 기업들 중심으로 성장했다. 2000년대 인터넷 산업의 중흥기(혹은 닷컴 버블)를 몰고 올 강자들도 이때까지는 별다른 수익 모델 없는 벤처 창업기업일 뿐이었다.
ISP, 웹 에이전시, SI 기업 중 웹 에이전시는 이 당시 시챗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웹 사이트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만들어줄 공급기업은 턱 없이 부족했다. 수요과 공급의 극단적 불일치는 공급자의 갑아닌 갑질이 유효했을 뿐 아니라,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고급 기술력을 가진 디자이너와 개발자의 몸값은 청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몸값은 근로자의 노동비가 아니라 공급기업이 수요기업에게 던지는 견적서에 담긴 공급가격을 의미한다. 이때는 재경비율 120%에 기술료 20%가 먹힐 때다. 한 마디로 초기 메이저 웹 에이전시는 꿀을 빨았다. 고객과 노동자 모두에게.
시각디자인을 전공해서 뭘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한 미술 전공자들은 포토샵, 일러스트, 플래시 이런 웹 디자인 툴(Tool)을 배워 웹 에이전시에 합류했고, 개중에는 학력과 학벌이 Top Class인 맨파워도 즐비했다.
웹 기획, 웹 디자인을 업으로 삼은 자들에게 메이저 웹 에이전시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나 역시 그랬다.
2001년 10월, 나는 당시 웹 에이전시 Top 5 중 하나였던 디자인스톰(DesignStorm)에 합류하게 된다. 회사 위치는 강남역과 뱅뱅사거리 중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사한 지 3일 차 되었을 때부터 파견을 나갔다. 고객사에 파견 나간 분들이 많았기에 누가 같은 본부 소속인지 알지도 못했다. 파견지 근무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월간회의와 내 입사 기념 회식이 있어 본사에 들렀다.
회의실 입구에서 나는 들어가고 그녀는 나오고 있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단발에 웨이브를 한 머리, 회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그 티셔츠 밖으로 드러낸 길고 하얀 팔.
마주치며 스쳤던 순간에도 느꼈던 큰 키와 여리 여리한 몸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특별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큰 눈망울에 고양이 눈매를 가진, 그런 분이었다.
회의실을 둘러보니 나와 내 사수였던 과장님, 디자인팀에 남자 선배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여자분들이었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미인들이 많았는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나와 서울 서초 초등학교를 지나 강남 사랑의 교회에 못 미치는 어디쯤에 소갈빗살을 파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 나고 찾아가 보라고 하면 몇 번 더듬을 수도 있는데 그 맛은 생생히 기억한다. 소고기를 먹을 기회도 별로 없었거니와 게다가 소갈빗살은 거의 처음이어서 모든 소갈빗살이 원래 그런 맛인지 알았는데, 남자 과장님의 "이 고기에는 분명 약을 쳤을 거야. 아니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라는 말에 흔하지 않은 맛임을 그때야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논골집 갈빗살 맛과 매우 흡사한.)
첫 회식 후에도 나는 회사 분들과 종종 그곳을 찾았고, 가끔씩은 첫눈에 반했던 그분도 같이 동석했는데, 얼마 전 옛 사진을 뒤적거리다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진을 발견하곤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런데, 그때가 얼마나 오래된 거냐면 테이블 위에 재떨이와 담배가 올라와 있는 사진이었으니 20년도 훌쩍 지난 얘기인 셈이다.
첫 회식에 거나하게 취했고, 2차 가라오케에서는 테이블 위에 뛰어올라 내 캐릭터를 확실하게 보여줬던 것 같다. (30명이 넘는 부서에 남자가 딸랑 3명인데, 잘 노는 한 놈이 들어왔으니 반가웠던 분들도 꽤 있었으리라..)
다음 날, 그즈음에 진급했다는 분이 점심을 쏜다고 해서 뭘 먹을지도 모르는 체 뒤 따라갔다. 어제의 광기가 쪽팔리기도 했고 처음 대하는 음식인지라 뭘 시켜야 할지 우물쭈물할 때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는 얼굴이 거의 홍당무처럼 빨개졌던 것을 기억한다.
강남에 입성하고 첫 대면으로 마주한 두 번째 메뉴는 '쌀국수'였다.
분명, 삼성역 근방이나 방배역 주변에는 없었다. 그 쌀국수 전문자 '포호아(Pho Hoa)' 말이다.
다른 분들은 뭘 또 찍어 먹기도 하고, 넣어 먹기도 했는데 숙취로 입맛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는 그 맛있고 진한 국물을 몇 모금 마시고는 밖에 나가 줄담배를 폈다. 이토록 Shy 한 Boy야.
파견이 끝나고 본사로 복귀했다.
내게 맡겨진 2차 프로젝트는 '혼다 모터사이클 코리아 홈페이지 구축'이었고, 나는 CP(Content Planner) 역할을 했다. CP(Content Planner)는 광고 회사의 기획자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웹 에이전시는 예나 지금이나 디지털 마케팅 대행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아 큰 이질감 없이 사용하는 직무 용어였다.
사회생활 초기에는 웹 기획(Web Planner)이라 불리는 커리어를 업으로 삼았다. 이 시기에는 웹 마스터(Master), 웹 에디터(Editor), 웹 디자이너(Designer)라고 불리는 인터넷 서비스 산업이 만든 새로운 직무가 꽤 있었다. 나는 웹 기획으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2~3년 내에 웹 마스터로 직무 전환을 계획하고 있었다. 웹 기획, 웹 디자이너, 웹 개발 등은 웹 + X 단어가 직무를 매우 명확히 설명하는 반면에 웹 마스터는 뭘 마스터하겠다는 건지 다른 직무에 비해 애매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웹 + X로 불리는 직무 중에서 가장 빠르게 커리어의 종류에서 사라진 것이리라. 웹 마스터는 쉽게 얘기하면 지금의 프로젝트 PM이나, 조직의 상위 관리자쯤으로 생각하면 된다(네트워크/서버 관리자, 뭐 이런 무식한 얘기하지 말아라). 당시에는 웹 마스터 자격증이 별도로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의미 없는 커리어일 것 같다.
2000년 초기에 Information Architecture(IA), User Interface(UI)라는 단어는 업계에서조차 더 이상 전문용어가 아니었다. 반면, User eXperience라는 개념은 이때까지는 Usability(즉, 사용성)라고 더 흔히 불렸다.
요즘에는 웹 기획자라는 용어 대신 UI/UX 기획자라고 커리어를 지칭하는데 이는 2007년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면서 화면 UI가 모바일로 확장되어 더 이상 웹이라는 매체로 업무를 한정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생긴 변화일 것이다. 상대 기획자가 언제부터 커리어를 시작했는지 알아 보려면 Information Architecture(IA)에 대해 물어보면 된다. 이를 알고 있으면 2007년 이전이고, 모르면 2007년 모바일 시대 이후이다. 간혹, 2007년 이전에 커리어를 시작했음에도 IA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과는 비즈니스는 물론, 프로젝트도 안 하는 게 낫다. 직무에 대한 전문 지식 함양에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실제 아웃풋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우니.
개인적으로 루이스 로젠펄드(Louis Rosenfeld)가 쓴 <Information Architecture>나 제이콥 닐슨(Jakob Nielsen), 스티브 크룩(Steve Krug)이 쓴 <성공하는 웹 사이트, 실패하는 웹 사이트>, <Don't Make Me Think> 등의 저서들을 좋아했고 여러 번 숙독했다. 웹 기획도 엄연히 전문 분야이고, 웹 기획자도 한 직무 분야의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고객과 대면하여 커뮤니케이션하다 보면 디자이너의 작업을 돕는 그저 화면 UI나 그려주는 '시다바리'(내 후배들은 시다바리로 시작하는 유형의 업무를 내가 얼마나 경멸하는지, 그 일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해야 이런 인식을 받지 않는지 잘 알 것이다.)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클라이언트의 대부분은 양복을 입은 대기업 직원이고, 우리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중소기업 직원이어서 사회적 고하 구분으로 우월감을 뽐내는 담당자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뭐.. 나도 도긴개긴 해서 그들과 편하게 얘기할 때는 내가 그들보다 나은 학교를 나왔고, "내가 니 선배다!"라고 얘기할 만한 구실을 찾기도 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게 특별한 발표 역량이 있다는 것을 안건 이 회사를 다니면서다. 제안발표나 프로젝트 중간발표를 할 때마다 흥분과 재미를 느꼈고 격려를 받을 때는 큰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아마도 그때를 위해서 많은 책들을 읽고 나름의 전문성을 갖추면서 말하고 싶은 스토리를 늘 연습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는 유일한 남자 선배 사수가 있었는데, 사실 뭘 배운 것은 없으니 사수라기보다는 직장 선배에 가까울 뿐이지만, 나름 그분을 통해서 새롭게 축적한 경험과 지식이 있는다. 그건 바로 프로젝트 관리 방법론이란 것이다. 아주 훗날 프로젝트 경영 MBA를 선택하는데도 분명 영향을 줬던 만남이었다.
어느 날 이 선배가 삼성 SDS의 프로젝트 수행 방법론을 참고해서 만든 우리 회사의 프로젝트 수행 5 Methodology 라며 A4 용지 수백 장을 파일링한 자료를 갖고 왔다. 지금도 그때의 환희를 잊지 못한다.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그날 처음 경험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사이드 프로젝트로 하여 수개월 내에 내가 이 회사의 No.1 CP 임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가 한 동안 나를 지배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웹 기획자로서 나름의 전문성을 갖추는 것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비저닝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직업인으로 한 뼘 더 성장했던 것 같다.
디자인스톰(DesignStorm) 역시 오랜 시간 근무하지는 못했다.
내가 입사하여 근무한 2001년 ~ 2002년 사이는 1990년대 하반기에 인터넷, 웹 기술을 학교나 학원에서 배운 미래의 전문가들이 속속 현업에 참여할 때였다. 웹 기술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근단적 불일치가 해소되면서 많은 맨파워들이 인터넷 비즈니스를 넥스트 성장동력으로 삼은 기업들에 합류를 했고, 더 이상 갑 같은 을 짓을 에이전시들은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좋은 맨파워들은 포털과 IT 전문 기업들로 이직을 하였다.
나 역시 그 준비를 했고, 곧 검색 포털 중 '야후에서도 못 찾으면 엠파스(Empas)'라고 하는 회사로 이직을 앞두고 있었다.
비록 1년 2개월에 생활이었지만,
디자인스톰 시절은 이렇게 짧게 끝내서는 안 될 것 같다.
다음 편에서는 앞서 언급한 첫눈에 반한 그녀와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1년을 어떻게 2년처럼 살았는지 좀 더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로 이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