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과 탕수육 그리고, 버거킹
군대 가기 전, 대학 1~2학년 때 내 몸무게는 55~56 kg를 넘은 적이 없었다.
키가 크지 않은 것을 감안해도 꽤 마른 편이었던 게, 허리 사이즈가 26Inch였으니.
허리 사이즈는 우연히 알게 됐다.
당시(1990년대)는 ‘리바이스, 캘빈 클라인, 마리떼 프랑스와 저버, 닉스, 게스, 겟유즈드 등’ 청바지 브랜드의 전성시대였다. 가격대도 상당했는데, 1993년도에 바지 한 벌 가격이 10만 원 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1993년도 최저임금이 시간당 60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고, 2024년도(시간당 최저임금 9,860원)와 추산하여 비교하면 최저임금은 약 16.43배 증가했으니 단순 비교로 1993년도에 체감하는 10만 원 대 청바지는 2024년도에는 160만 원이 되는 꼴이다. (어디까지나 ‘단순’ 비교이다.)
군대 가기 전까지 헤비메탈 그룹사운드에서 드럼을 쳤다. 앞서 언급한 브랜드 바지를 입고, 상의는 미치코런던 맨투맨, 신발은 무크. 이 조합이 나름 나와 친한 무리들의 패션 코드였다. 머리도 기르고, 말보로 담배도 엄청 폈다.
어쨌든, 이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브랜드와 모델은 <리바이스의 501>이었는데, 이 바지를 사러 갔다가 허리 사이즈가 26Inch였던 여자 점원이 자신의 허리 사이즈와 내 사이즈가 같다고 굉장히 호들갑을 떨었던 터라 ‘허리 사이즈 26Inch’는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군 제대 후 살이 조금 붇기는 했지만, 여전히 60kg은 넘지 않았다. 그러던 내 몸매가 지금의 아저씨 몸매로 탈바꿈하는 데는 불과 4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2000년 1월 2일, 테헤란로의 끝자락에 위치하는 삼성역에서 대치동으로 이어지는 그 중간 어느 지점에서 첫 회사, 첫 직장 생활을 하게 된다. 이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밖에서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 거의 매 끼니를 배달시켜 먹었고, 밖에 나가 식사를 하는 건 밤샘 작업 후 24시간 장사하는 백반집에서 아침을 해결할 때뿐이었다.
이때는 건물 내에서도 담배를 피울 때였고(심지어 정규 근무 시간이 지나면 사무실에서도 담배를 폈다.), 주 5일이 정착되기 이전이어서 토요일에도 근무를 했으며 야근이란 개념은 없었고, 밤새는 것도 특별할 게 없는 때였다.
점심은 대부분 백반을 배달시켜 먹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설렁탕, 제육볶음 등이 주 메뉴였고, 가격은 3,000~4,500원대로 기억한다.
저녁은 거의 90% 이상 중국집 음식을 배달시켰는데, 야근 식대는 회사에서 지원했기에 요리도 많이 시켜 먹었다. 심하게 먹을 때는 1인당 식사 메뉴 1개에 요리 1개를 먹었다. 이렇게 먹고 스타크래프트 한 게임하고 야근하고, 야근하다가 출출하면 컵라면 먹고, 자리에서 엎드려 자다가 일어나서 아침 먹으러 가고. 그렇게 몇 날, 몇 주, 몇 개월을 반복했다.
이때는 기획, 디자인, 코딩, 개발의 역할이 불분명했고, 약속된 업무 프로토콜과 상위 관리 체계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아서 몸과 시간을 갈아 넣어 언젠가는 완성될 미지의 이상을 좇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내가 지금도 가끔 지인들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IT 기업들을 보면서 잘 될 회사인지 그렇지 않은 회사인지를 판단하는 나만의 기준 중 하나는 ‘IT 기업이 자신들의 분야 외의 IT를 얼마만큼 알고, 업무에 활용하고 있는가’이다.
내가 생각하는 IT 사업이란 것은 ‘IT 기술을 통해 세상을 보다 편리하고, 쉽고, 효율적이며, 합리적으로 만드는 일련의 혁신 활동’인데, 자신들은 여전히 불편하고, 어렵고, 비효율적이며, 불합리한 환경에 업무하고 있다면 그 혁신이 과연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의심된다는 것이다.
그런 견지로 나는 닷컴 버블의 원인 중 하나를 IT 기술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초기 사업자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엉터리 사업계획서에 눈먼 돈을 투자한 엔젤투자자들의 잘못된 기대치를 꼽는다. 내 첫 직장도 그런 곳 중에 하나였다.
첫 직장을 다닌 지 4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두꺼운 겨울 옷에서 얇은 봄 옷으로 갈아입었던 그즈음에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26Inch ~ 28Inch 바지를 여전히 입고 다녔기에 허리춤 밖으로 뛰어나온 옆구리 살들에 친구들이 놀람 섞인 투로 놀린 것이다. 거울을 보니 턱 선도 없어졌고 엉덩이, 허벅지 살들이 다 터 있었다.
오랜만에 대중목욕탕을 갔고, 몸무게를 쟀다. 72 kg
바지를 사러 갔다. 26Inch 사이즈를 달라고 하니 점원이 위, 아래로 훑는다. 26Inch는 어림없다는 표정이다. 몇 개 사이즈로 몇 번을 갈아입어봤다.
내게 딱 맞는 사이즈는 32Inch였다.
27살, 4개월 만에 생애 처음으로 72 kg, 32Inch의 몸매가 됐다.
이 몸뚱이 지표에 대한 느낌은 보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도 있고, 작은 키에는 좀 무리가 되는 몸매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는 말 그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옆구리에 지방이 쌓이는지, 턱 밑살이 늘어나는지 마는지를 살펴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아직은 체력이 충분할 나이였기에 며칠 밤을 새우고, 주말 근무를 해도 크게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그냥 잘 먹고, 잘 자면 다음날과 또 그다음 날까지 충분히 전력으로 일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고 퇴근길에 버스에 내려 집까지 걷는 10여분 동안 김밥 4줄을 목구멍에 쑤셔 넣으면서도 살찔 거라는 생각보다는 오늘 하루 멋지게 잘 살아내었다는 충만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면 그뿐이었다.
이렇게 몇 년을 살았더니 옆구리를 타고 넘치던 그 지방덩어리는 이제는 완전히 내 몸의 일부가 되어서 떨쳐내려 애써도 그럴 수 없는 오래된 나쁜 기억처럼 내 몸에 완전히 정착했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애써 떨치려 하지 않는다.
26년 직장 생활 동안 수많은 끼니를 회사에서 해결했다. 그 시간만큼 어떤 살은 빠졌고, 어떤 살은 새로 쪘으며 그 살 중에는 26년 묵은 것도 있고, 10년 묵은 것도 있으며, 1년이 채 안 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은 밤 샘을 하며 먹었던 라면에서, 어떤 것은 내 입사 환영 회식에서, 어떤 것은 진급 회식에서, 어떤 것은 수십 명의 구성원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먹었던 안주에서. 그렇게 그렇게 세월을 타고 이야기를 타고 인생을 탄 후에 내 몸에 정착한 것이다.
2000년대 한참의 시간 동안 우리는 찌개류의 식사를 할 때면 남녀노소, 직급의 고하 관계없이 한 냄비에 각자의 숟가락을 넣어 한 톨의 이질감 없이 함께 식사를 했다. 특별히, 지위가 높다고 하여 따로 챙겨 드려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그때 그 시절은 그게 보통의 식사 문화였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식사 문화였다.
첫 회사에서 첫 직장 생활은 단 7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될 것 같지 않은 사업전략이었고 맨파워도 형편없었으며 사업계획도 너무 허술했다. 비록 사회생활 첫 경험이라지만, ‘불편하고, 어렵고, 비효율적이며, 불합리한 환경’을 감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상위 직급자들과 문제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사실, 이게 내 좋은 면 혹은 나쁜 면의 개성이라면 개성인데, 어떤 불편한 것이 인지되면 반드시 풀어야 했고, 풀어낼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면 갈등보다는 미련두지 않고 떠나는 길을 택했다. 그 당시 일자리는 넘치고 흘렀다.
두 번째 회사는 테헤란 밸리에서 상당히 먼 방배역 근처에 있었다.
이 회사는 연세대학교 벤처 동아리가 만든 회사였다. 대부분의 개발 인력들이 연세대 벤처 동아리 출신의 Co-Founder 들이었고, 이 점이 나에겐 큰 메리트로 다가왔다. 이 회사의 대표이사는 나와 같은 93학번이었고, 기획팀 팀장은 나와 같은 학교 출신 선배였으며 내 또래 동갑내기들이 전체 구성에 1/5을 차지할 만큼 믿고 의지할 동료들이 많았다.
영업을 총괄했던 팀장은 IMF를 경험한 대기업 출신이었고, 당시 상위 인터넷 서비스 기업들과 상당수 제휴가 되어있었을 뿐 아니라, 규모는 크지 않아도 글로벌 사업도 전개하고 있었던 터라 이전 회사에 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았다.
이 회사에 다니면서부터 배달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방배역 근처는 먹을거리가 많았고 회사 근처 버거킹에서는 가끔씩 치킨버거 단품을 1,900원에 2개 판매를 했다. 연봉이 좀 작다고 생각한 것 외에는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생활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금요일에는 또래끼리 모여 술을 마셨고(정말 엄청 퍼마셨다.) 회사 숙소에서 잤다. 그리고, 토요일 오전은 꾸벅꾸벅 졸다가 오후가 되면 퇴근을 했다.
벌써 24년이 지났는데도 그 동네 구석구석과 다락방 같은 간이 공간이 있던 털보내 식당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2001년, 닷컴 버블이 한참 커가고 있었다.
새롬기술이라는 VoIP(Voice of Internet Protocol) 기업이 있었는데, 이곳에 미팅을 갔다가 안내 데스크 담당자가 너무 싸가지가 없어서 뭐라고 대거리하려 했더니 함께 같던 선배가 “야! 쟤가 재산이 얼만지 아냐? 아마 수십 억 원은 있을 걸? 왠만한 사람은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은 거야” ‘이게 뭔 소리??’
상황은 이러했다. 시나브로 가가호호 인터넷 통신망이 깔리고 있을 무렵, 새롬기술은 코스닥에 상장을 했고, 한 마디로 대박이 터져서 우리 사주를 갖고 있는 직원들은 수억 원에서 수십 억 원의 돈방석에 앉을 때였던 거다.
한 마디로 로또 같은 회사들이 곳곳에 있던 때란 말이다.
회사를 다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운이 좋으면 그 수억, 수십 억 원을 벌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많아 보이는 회사를 몇 개 추린 후, 이력서를 뿌렸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로 생각했던 곳에 이직을 하게 됐다.
방배동 라이프가 끝나고 다시, 테헤란 밸리의 중심으로 가게 된 것이다.
- 까칠한 펜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