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먹고살거야?
1997년 11월 21일에 시작된 대한민국의 외환위기는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 기업들의 구조조정, IT 산업의 성장으로 2001년에 조기 종료가 되었다. (2001년 8월, IMF 차입금 195억 달러 전액 상환)
한국전쟁 이후, 엄청난 성장 가도를 달리던 대한민국 경제에 급브레이크가 걸렸고, 이 급브레이크는 대한민국 경제와 그 경제의 주역이었던 기업, 그 기업의 핵심 자원이었던 노동자, 그 노동자로 인해 생계를 유지한 가정에 이르기까지 일거에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이 당시 약 6,000개 이상의 기업이 부도 처리됐으며, 1998년 한 해 동안에만 약 100만 명 이상의 실직자가 발생되었다. 1997년까지 합하면 약 150만 명 이상이 실직하여 실업률은 7%까지 급등함으로써 역사상 최고의 실업률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가장의 실직은 곧바로 생계유지의 어려움으로 이어져 가족 해체에까지 이르렀다. IMF의 위기가 본격화되었던 1998년의 경우, 자살자 수는 12,552명에 달해 전년 대비 45.6% 증가하였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경험하였으며, 이 경험은 대한민국 국민의 DNA에 IMF 포비아(Phobia)를 새겨 넣었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등장하는 IMF라는 단어는 북한의 위협 못지않은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실현가능성과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전쟁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다.)
IT 산업은 이 IMF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다.
IMF가 한 창이었던 1999년은 대한민국 IT 산업의 시작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초기 IT 산업을 이끌었던 인터넷 서비스의 강자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탄생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볼 것은 IT란 용어의 탄생과 발전이다.**
IT라는 용어는 1958년 미국의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이다.
1970년대 후반, 컴퓨터 산업과 정보 시스템의 성장에 따라 IT란 용어가 학술지나 산업 보고서에 자주 등장
1980년대, PC와 네트워크의 확산으로 IT가 하나의 산업 개념으로 자라 잡음
1990년대, 인터넷 상용화, 반도체의 발전, 소프트웨어 시장의 성장과 함께 IT가 하나의 독립적인 산업으로 확립되었고, 1990년대 후반부터 ‘IT 기업’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정착됨
2000년대, IT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IT가 국가의 경제 성장과 직결되는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됨
글로벌 IT 산업 관점에서 IT 붐은 분명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초기 IT 산업의 효익은 대한민국이 가장 많이 가져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인터넷 서비스 산업은 많은 실직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주었고, 이로 인해 1998년 7%에 달하던 실업률은 2000년 4.4%, 2002년 3.3%에까지 점진적으로 감소하게 됐다. 이 실업률 해소의 공적이 초기 IT 산업을 이끌었던 기업들에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1998년 -5.1%의 경제 성장률을 1999년 10.7%, 2000년 8.9%로 돌려세우는 엄청난 저력을 보여줬는데, 그 저력의 핵심 역시, 초기 IT 산업을 이끈 인터넷 기업들이었다.
집집마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설치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인터넷은 몰라도 야후는 안다.’는 얘기들이 우스개 소리로 돌았다.
‘선영아 사랑해!’라는 전단을 보며 가슴 설레었던 대한민국 선영이들은 마이클럽닷컴으로 모였으며, 대학생, 중년층 할 것 없이 그리운 동창들을 만나기 위해 모두들 아이러브스쿨에 몰려들었다.
각자의 개성과 공감대를 갖고 있던 많은 젊은이들이 다음 카페를 개설해 모였다. 그리고, 남여노소를 불문하고 맞고를 하기 위해 프리첼에 계정을 개설하고, 인터넷에 나만의 독립된 공간을 싸이월드를 통해 만들었다.
대한민국 1세대 인터넷 기업들의 탄생이었고, 닷컴 버블의 절정기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는 얘기를 하나 하자면, 닷컴 1세대는 인터넷 서비스 만 만든 게 아니었다. ‘안동찜닭’은 마이클럽닷컴, 1인 노래방과 온라인 노래 콘테스트는 ‘넷띠앙’이 그 효시이고, 아래 소개할 웹 에이전시 중 한 곳은 IT 기업인들의 휴게 공간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바(Bar)’를 여러 곳 운영했다.
인터넷 서비스 산업은 ‘검색(Search), 커뮤니티(Community),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커머스(Commerce), 컨텐츠(Content)’ 이렇게, 5가지 분류로 나뉘어 ‘벤처기업’들을 우후죽순처럼 양산했다. 그럴싸한 사업계획서 몇 장으로 수십 억 원을 펀딩 받을 수 있는 그런 때였다.
인터넷 서비스 산업만 성장한 게 아니었다. 인터넷 서비스의 혈관 역할을 하는 네트워크 기업들도 더불어 성장을 하였고, 그중 SKT가 가장 활발하게 자신들의 네트워크 망에 앞서 설명한 검색, 커뮤니티, 커머스 등의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기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했다.
인터넷 서비스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이제 기업의 홈페이지는 홍보와 마케팅을 위한 필수 채널로 인식되었다. 디지털 마케팅이란 개념이 꿈틀대고 있었고, 온드(Owned) 미디어의 첫 번째(Primary) 채널인 기업 홈페이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폭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웹 에이전시(Web Agency)라고 하는 웹 사이트 구축과 운영 대행업체들이 생겨났다. ‘디자인스톰, 클라우드나인, 클릭, 홍익인터넷, 이모션’, 대한민국 5대 웹 에이전시들은 이런 수요에 편승해 초기 인터넷 산업을 이끄는 리딩 컴퍼니의 역할을 하였다. 인터넷 산업 초기에는 이렇다 할 IT 교육(기획, 디자인, HTML 코딩, 웹 개발 등) 기관이 없었는데 이들은 에이전시 사업과 동시에 인력을 양성하는 IT 사관학교의 역할도 하였다.
초기에는 웹 에이전시에 많은 맨파워들이 모였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나는 디자인스톰의 일원이었다. 오해에 소지가 있겠지만, 이 당시 웹 에이전시에는 고학력의 맨파워도 참 많았다. 디자인스톰은 삼성 SDS 사내 벤처에서 시작하여 분사한 회사였는데, 검색 포털의 비즈니스 모델이 성숙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디자인스톰 수준의 상위 웹 에이전시는 IT 구직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기업 중 하나였다.
초기 인터넷 기업들은 대부분 테헤란 밸리를 중심으로 모였다. 네트워크 등 IT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춰져 있을 뿐 아니라, 신축 건물에 저렴한 임대료도 한몫했고, 협력, 협업할 기업들이 촘촘한 공간 내에 있는 것은 여러모로 상호 도움이 되었다.
불 꺼지지 않는 테헤란 밸리의 탄생이었다.
기업들이 모이고 또 새롭게 생겼다.
강남 변두리에서 시작한 벤처도, 지방 도시에서 시작한 기업들도 어느 정도 투자자금이 생기거나 입지가 다져지면 삼성, 역삼, 선릉, 강남역을 가로지르는 테헤란 밸리로 이전을 했다.
기업과 사람들이 모이니 이들을 먹이고 재우기 위한 식당, 술집, 모텔들이 들어섰다. 새로운 상권으로 맛집, 멋집이 집결했다.
테헤란 밸리 사람들은 밤 셈 근무로 지친 몸을 이끌고 이곳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회식도 이곳에서, 사업 협의도 이곳에서, 가끔은 상사의 뒷담화도 테헤란 밸리 뒷골목의 어느 식당에서 했다.
테헤란 밸리는 대한민국 IT 산업의 모체였고, IMF라는 국난을 극복한 전우들이 모인 제2의 전선이었다. 그리고, 테헤란 밸리의 많은 식당과 주점들은 그 전우들의 쉼터였고 영양제였다.
- 까칠한 펜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