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탐구 보고서
어느 때부턴지 시점을 특정할 순 없지만,
심신이 지쳤을 때 혹은 낙심하거나 권태감을 느낄 때 나는 종로 3가 그곳을 찾는다.
그곳은 많은 이들이 스쳐 지나는 지하철. 특히 1호선 종로3가역이다.
종로 3가 1호선 역의 특별한 분위기를 느끼려면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이 아닌 매우 어정쩡한 시간,
오후 1시부터 4시 사이에 의정부, 소요산 방향의 플랫폼 어디라도 앉아 있으면 된다.
이 시간 대가 되면 저녁 시간 강남이나 이태원, 홍대입구역에서 보는 젊은 청춘의 무리처럼 나이 드신 노인분들이 대거 등장을 한다. 어디서 오신 건지 어딜 가시는 건지 특별한 목적지가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노인들이 전철을 타고 이동하거나 플랫폼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나는 열차를 묵묵히 쳐다보고 있곤 한다. 때로는 매우 재밌는 분들도 있다. 70~80대 정도 돼 보이는 노인 커플. 할아버지는 60~70년대 유행했을 하얀색 슈트에 중절모를 쓰고는 큰 소리로 젊은것들이 문제고, 민주당이 문제고, 세상이 문제라고 떠들고 그 옆에서는 세상에 온갖 반짝이는 것은 모두 몸에 걸친 것 같은 그리고, 쪼글쪼글한 입술에 빨간 립스틱으로 한껏 멋을 낸 할머니는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면서 할아버지의 취중 일갈을 응원한다. 뭐 이런 분들도 노인분들 중 간혹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특히 할아버지들에게는 어떤 생동감이나 활기 같은 것을 느끼기 어렵다.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느낌은 '권태'뿐이다.
그들에게서 권태를 느꼈던 것은 종로3가역을 찾을 때 내 심정이 그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느끼는 권태라는 건 목표가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가슴이 뛰지 않는 경우, 목표가 내 마음을 동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기에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경우, 목표와 방법은 있지만 공동체의 공감대를 얻지 못했거나 그 공동체의 역량에 매우 실망하여 나조차 무엇도 하기 싫은 경우... 그러하다. 그런 여러 가지 경우의 권태가 있지만 가장 깊고도 오랜 시간을 옥죄는 권태의 원인은 목표와 동기의 부재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는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라는 국민의 '할' 도리를 부여받는다. 의무의 실천은 누군가의 가르침이나 독려를 통해 이뤄진다. 그리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발적인 의지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목표를 정하고 타인의 보상 여부에 관계없이 이를 자의적인 '성취'를 목적으로 삶의 상당 시간을 살아간다.
결단코, 그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목표와 그의 성취를 위한 시간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다가 어떤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멀어지고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성취의 과정이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나태함과 권태함을 느낄지 모르겠다.
자신의 의지에 따른 성취만큼이나 사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있으랴.
걸음걸이가 너무나도 위태해 보였던 한 노인은 간신히 내 옆에 앉아서는 물끄러미 열차의 지나는 모습을 보다가 자신을 힐끗쳐다보는 나를 느꼈는지 문득 시선을 내게 돌린다. 잠시 마주친 눈동자에서 부러움을 느낀 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본 나를 나무라는 의미로 시선을 마주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눈동자에 스며있는 건 내 젊음에 대한 부러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자리를 떠나 회사에 복귀를 했다.
종로 3가 그곳을 찾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종로 3가 그곳은 인생의 반환점을 일찍이 돈 내게 무언의 가르침을 준다.
'일, 사랑, 건강' 행복을 위해 내가 삼은 3가지 기본기가 아직도 든든하고 탄탄하게 나를 지탱하고 있음에 행복하고 감사하다. 다음주에도 많은 계획이 있다. 오롯하게 내게 향해 있는 내 몫의 일과 계획이다. 그리고, 중요한 연대와의 약속이 있다. 그 계획들이 나를 다시 흥겹게 한다.
권태함에 찾았던 종로 3가 그곳에서,
권태만을 느꼈던 지난 날의 청춘과 중년의 그들의 모습에서 내가 오늘을 감사하며 또 행복이란 삶의 목표를 이어갈 이유를 찾는다.
- 까칠한 펜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