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lna Dec 17. 2023

어른의 덕목 2. 관계(1) - 느슨하게 놓기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한다.

"H가 얼마 전에 결혼했잖아. 연락 안 왔어? 둘이 잘 지냈었잖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그것보다 더 오래된 후배의 소식을 들었다.

아니 너한텐 당연히 연락해야 되는 거 아니야? 하는 후렴을 들으면서도

이상하게 섭섭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나 자신에게.



어른의 덕목 2. 관계(1)



나는 (입시 때문이겠지만) 중고교 시절보다는 대학시절에 훨씬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길었다.

대충 강의가 모두 끝나는 시간 즘에,

강의실 앞 나무에 모두 모여 맛집이며 카페며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새 화장품을 발라보기도 하고, 인증샷이라며 셀카를 찍어대거나, 밤늦게까지 맥주잔을 부딪히곤 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친구들의 기숙사 방에 시도 때도 없이 모여있었다.


하루 종일 뭔가에 대해 재잘거렸다. 영화, 책, 수업, 맛집, 사람, 사건, 경험.

그리고 그 많은 주제에 대한 견해들이, 우리는 참 비슷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통한다고 여겼다.

나의 많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의지할 수 있어 든든했고

또 나도 기꺼이 친구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자 했다.



그 시절 나는 인간관계를 것을 영속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수없이 많은 '인간관계'들이 내 곁에 머물렀고

나는 그들과 단단한 결속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유대감은 10년, 20년이 지나도 영원하리라.

늘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리 나중에 결혼해도 근처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은 저녁을 같이 먹자.

우리 또 다 같이 해외여행 갔다 오자. 그런 말들도 그때는 쉽게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다들 떨어져서 살게 되니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서로 보고 느끼는 게 달라져서였을까.

언제나 내 곁에 존재하고, 내 편을 들 것 같던 사람들이었는데


오늘 좀 꿀꿀하다 싶을 때 함께 저녁 먹으며 털어버리기도 어려웠고

아무런 주제에 대해 아무렇게나 떠들던 시시콜콜한 대화도 예전만큼은 쉽지 않았다.

당연히 나랑 의견이 똑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당황한 마음을 속으로 삼키거나

한번 얼굴 봐야지- 하는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날짜를 픽스하지 않는 여러 날들.




속이 상했다. 섭섭했다.

우리가 어떤 친군데,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었는데.

지가 힘들 땐 내가 밤새 전화를 들어주었는데,  

지가 만나자고 할 때 나는 두일 제쳐두고 뛰쳐나갔었는데.


섭섭함은 쌓여 억울함이, 억울함은 쌓여 불신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섭섭하노라 말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나는 너를 이만큼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너한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나 봐 하는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 봐 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끝이 나기도 했다.

누군가와는 별 시답잖은 일로 싸워서 진짜 끝을 냈다.

또 다른 이와는 그런 싸움 없이 그냥 멀어졌다.



한동안은 인간관계는 덧없는 것이구나 하며 깊은 공허를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왜 이렇게 사람을 좋아해서 쓸데없이 기대하고 돌려받지도 못할 애정을 베풀까

남은 믿지 말아야지. 나도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해야지.


떠나간 이들에 대한 배신감과 섭섭함으로 울적했다.

내가 지나치게 인간관계에 집착하나 생각하기도 여러 날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나도 서서히 깨달았다.


그들이 변한 만큼 나도 변했고, 그래서 우리 관계의 모양도 변했다는 것을.

내가 혼자 관계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어쩌면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 인생에 존재하던 어떤 이는 특별한 사건 없이도 변하거나 멀어질 수 있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나갔다 하는 것이 긴 인생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런 깨달음에 오자 탁- 하고 마음이 놓아지는 거였다.

그동안 사람들을 대했던 나의 마음가짐이 어린아이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구나.


관계는 함께 쌓는 것이지만 관계를 대하는 태도는 나의 것이다.

누군가 지금 소중한 친구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가능한 시간 동안 함께하면 된다.


그리고 어른이라면  그이가 변하고, 내가 변할 때

그래서 우리 사이의 거리가 벌어질 때,

그저 우리의 궤도가 조금은 멀어졌구나 하고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그걸 끝으로 그이가 저 멀리 가버리더라도

그냥 받아들이고 잘 지내기를 생각해 주면 된다.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다

한 시절 누군가를 소중히 여긴 내 마음에 대한 예의로.


어른의 인간관계는 꼭 움켜쥔 것이 아니라, 틈 사이 빛이 드는 느슨한 것인가 보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하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손톱만큼 깨닫는다.




H와는 참 오랫동안 서로의 작은 고민도 깊게 대화할 수 있는 좋은 친구였다.

그래도 끝은 왔다.

H와 멀어지던 시절에 나는

걔는 힘들 때만 나에게 연락하고 즐거운 일은 나와 함께하고 싶지 않아 해.

하고 섭섭해하고 억울해했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이제야 다시 너를 떠올린다.

섬에서 근무하던 시절, 언니 보러 왔어! 하며 신호등 앞에 서있던 너.

두 시간이 넘는 시골 버스를 타고 나를 보러 와 겨우 저녁이나 먹고 가면서도

언니랑 얼굴 보고 이야기해서 너무 좋았어, 하던 그 얼굴.

그 순간 네가 나에게 쏟았던 마음만은 참이었을 테다.

지금 다른 궤도를 달리더라도,

네 인생의 어느 순간 소중한 힘을 나에게 써준 마음만은 진짜였을 것이다.


나와 다른 머나먼 길로 떠나버린 저 별이 가는 곳이

나와는 다른 또 다른 좋은 곳이기를.



 








이전 02화 어른의 덕목 1. 자기 이해(1)- '나'라는 우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