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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lna Dec 11. 2023

어른의 덕목 1. 자기 이해(1)- '나'라는 우주

어른인 나는, 나대로 살고 있을까?

" 너 자신을 잃지 마. "


오래된 드라마를 한 편 보는데, 주인공이 한껏 촉촉한 눈동자로 이런 대사를 읊었다.

흥미롭게 보던 드라마가 좀 식상해졌다. 너무 흔한 말이잖아!

너 자신을 잃지 마, 너를 믿어, 네가 원하는 걸 해.

수없이 들어서 그런지 더 반발심이 들었다.

도대체 너 '자신'이 뭔데? 네가 뭐길래 너를 잃지 말아야 하는 거람?




어른의 덕목 1. 자기 이해(1)




어렸을 때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에 빠졌었던 적이 있다.

입양한 딸에게 여러 가지 교육과 아르바이트를 시켜 특정한 엔딩을 맞게 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딸의 '상태'를 스탯창에서 수시로 볼 수 있는데

이 스탯창에는 지력, 체력, 도덕성 같은 딸에 대한 디테일한 요소와 스트레스 지수까지 확인할 수 있다.


수치로 나타낼 수까지는 없더라도 어른이라면

나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많은 영역을 포함한다.

일단 건강 상태에 관한 것.

나는 소화 능력이 좋지 않으므로 채식 위주로 해야 하고,

내 체력으로는 3일 연속 외출은 무리라는 정보.


성격에 관한 대략적인 것.

나는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기엔 수줍음을 조금 타고,

쉽게 화를 내지는 않지만 화가 나면 풀릴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는 것.


기호와 취향에 관한 것.

나는 여러 가지 카페를 다녀보는 것을 좋아하고

록 페스티벌보다는 뮤지컬 공연을 좋아하며

스릴러 영화는 쳐다도 보지 않지만 추리 프로그램은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적-인간관계적인 측면에 관한 것.

대학 동창들과 있을 때는 이런 주제가 좋고

직장 동료들과는 주로 이런 식으로 상호작용을 해왔으며

가족 안에서는 주로 이렇게 하는 편이지- 하는 것까지.


나 자신에 대해 파악해두어야 할 것들은 참 많다.



한 명의 인간이 하나의 우주와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발견하고 탐구할 것들은 무궁무진하고

뭔가 좀 알 듯하다는 기분이 들면 새로운 은하가 발견되기도 한다.  

분명한 건,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른의 덕목을 찾는다며 호기롭게 외쳐놓고

첫 단계부터 소크라테스처럼 '당신 자신을 잘 아시오' 하는 것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의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나를 알아야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으므로.



나는 극도의 아침형 인간이다.

하늘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과 비례하여 뇌의 기능도 느려지는 기분을 느낀다.

불행히도, 이 간단한 나에 대한 팩트를 고교시절엔 몰랐다.

기숙사에 살다 보니 친구들이 새벽 몇 시까지 공부하는지 다 알 수밖에 없었는데

자연스레 친구들처럼 나도 새벽 두세 시까지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사당오락이라는 끔찍한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니까...)

아침형 인간에게 새벽 두 시까지 책상 앞에서 버티는 일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리 없다.

단언컨대, 그냥 내 수면패턴에 맞게 잘 잤으면 성적이 더 올랐을 테다.



이런 일은 수 없이 있었다.

소화 능력이 약한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파스타집을 줄곧 다니다가 체하고 토하고 반복했다던지

그다지 관심 없던 복싱을 동료를 따라 등록했다가 금세 흥미도 관절도 모두 잃었다던지.

유튜브에서 홈카페 영상을 본 뒤 혹해서 값비싼 커피 용품들을 사들였지만, 한 번 쓰고 어딘가에 처박아뒀다던지 하는 일들.


나처럼 자신을 잘 몰라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떠밀려 선택하게 되면

나중에는 내가 이거 왜 했더라?

왜 즐겁지도 보람차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돈과 시간을 날리고 있지?

하는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단순히 음식이나 운동 같은 취향에 관련된 문제라면 사태가 그렇게 심각하진 않다.



진로를 결정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영향을 받아 선택했다거나

사회의 결혼할 때, 아이 낳을 때라는 인식에 휩쓸려 성급하게 결정했다거나

남들의 말만 믿고 덜컥 산 주식이나 부동산의 가격이 내려간다거나 하는

인생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커다란 결정을, '나 자신을 모른 채' 진행했다면

그 이후의 후회와 불만족감은 커진다.

어쩌면 인생 전반에 대한 회한과 좌절로 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온전한 자기 자신을 충분히 알고

뭐든지 그것을 바탕으로 선택해야

만족스럽고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는 감각, 내 인생을 내 모양과 색깔대로 살고 있다는 확신이야 말로

누군가를 어른으로 만드는 첫 단계이고,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목적이다.

어른은 자기 뜻대로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니까.




이쯤 되니 차라리 나 자신에 대한 공신력 있는 스탯창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수시로 업데이트되며  내가 뭔가를 결정할 때마다 참고할 수 있는.

안타깝게도 우리는 나 자신의 상태를 수치로 확인할 수도 없고

나의 세부요소를 관리해 줄 누군가도 없다. 우린 어른이니까.


더욱이 요즘은 특히 무엇이든가에 휩쓸리기 참 쉽다.

늘 모두와 연결되어 있어 혼자 사색할 시간은 적고

그 연결되어 있는 모두들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니

그 이야기들이 다 내 것 같다.

대형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동영상과 뉴스를 추천하고

그래서 때로는 나 자신에게 휩쓸리기도 한다.

 

나 자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깨어 있고, 객관성을 유지하며 나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확실한 건

나를 아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점점 더 휩쓸리게 될 것이고, 점점 더 나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의 우주임과 동시에

내가 유일한 탐사자이자 연구자라는 생각이 든다.

속한 자에게 '나'라는 우주는 캄캄하여 잘 보이지 않고

눈을 둘 바깥 것들은 넘쳐나니

나 자신에게 신경 두기란 참 쉽지 않다.


그래도 나를 발견하고 알아내는 이 탐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계속해서 데이터를 쌓고 연구되어야 한다.

나라는 우주 안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나를 잃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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