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한 톨이라도 버리면 안 된다."
동그란 저녁 밥상에서 '아멘'하고 기도가 끝나면 이레 자동응답기 같은 아빠의 말이었다. 식탁 위로 야채가 송송 들어간 계란말이가 나오는 날에는 하얀 쌀밥이 쏙쏙 입안으로 미끄러졌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많았다. 배추김치랑 갓김치, 열무김치같이 벌건 것들만 가득한 날은 아빠한테 혼나지 않으려고 쌀밥을 입에다 구겨 넣었다. 그때는 밥알 하나도 버리지 말라던 아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작은 거실 한 모퉁이에 쌀가마 다섯 대씩 쟁여 놨던 아빠가 유별나다고만 생각했었다.
아빠의 고향은 전라북도 정읍군북면 신평리, 자그만 초가집에서 칠 남매가 살았다. 아빠 위로 큰 누나들과 큰 형이 있고 아빠는 네 번째였다. 오전에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다 오면 해가 뜨거운 한낮에는 낫을 들고 밭일을 나가야 했다. 아홉 살 어린 아빠가 일하기엔 벅찬 노동이었지만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가 어두워지기 전에 동네를 돌며 쌀뜨물을 구해와야 했다. 돼지들한테 쌀뜨물로 먹이를 주는 것까지 온전히 아빠의 몫이었다. 봄, 여름, 부지런히 땀 흘려가며 고구마, 감자, 옥수수, 콩, 보리농사를 짓는다. 농사일은 그렇다. 게으름 피울 시간도 없이 계절이 바뀌고 오는 계절에 또 충실해야 하는 법. 가을이 왔다. 주렁주렁 달린 농작물들을 차곡차곡 방이나 마루에 쌓아두고 겨울을 준비한다. 온 가족이 동원해서 온종일 수고했어도 수확한 음식물로 겨울을 나지 못했다. 더군다나 매서운 겨울바람은 아무 틈이나 비집고 들어왔다. 가슴이 시린 것도 모자라 주린 배를 달래야 하는 일은 곤혹스러웠다.
어린 아빠의 엄마는 이제 막 태어난 동생을 허리에 동여맸다.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부잣집 대문을 두드렸다. 들고 간 빈 바가지에 뭐라도 채워야 할 텐데. 막걸리 만들다 남은 찌꺼기라든지 가축 사료로 쓰던 쌀겨라도 뭐든 고맙게 받아왔다. 하지만 거저 주는 법은 없었다. 한 바가지당 이틀의 노동비. 오는 여름이 되면 엄마는 그 집에서 이틀 동안 농사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치면 손이 모자랄 제 집 농사는 제쳐두고 여름 내내 남의 집 농사짓느라 바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빈손으로 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아홉 식구가 동그랗게 앉았다. 막걸리 찌꺼기를 받아 오는 날에는 아이들이 취해서 휘청 휘청거렸고 쌀겨를 가져온 날에는 엄마가 큰 가마솥을 꺼내 고슬고슬 볶아 주었다. 볶은 쌀겨 한 숟가락을 오물오물 씹고 물을 마셨다. 지붕 위로 하얀 연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오늘은 살았구나. 가까스로 데워진 방 안의 공기가 아빠 식구들에겐 유일한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어떤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다. 아빠 친구 덕식이가 그랬다.
"배고파서 죽으면 부앙이 나더라. 그때는 모두가 부앙 났다고 그랬어."
아빠가 말하는 부앙은 배와 얼굴, 온몸이 통통 부어서 죽어갔다는 걸 말한다. 부앙 나지 않으려고 엄마는 까마득한 고갯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잠을 청하지 못했던 그 긴긴 겨울밤은 천년같이 느리게 지나갔을 테다. 그러다 흰 눈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푸른 싹을 발견한다. 스산하고 쓸쓸했던 밭에서 겨우내 힘을 키운 보리 순이었다. 아빠에게 보리는 목구멍으로 차오르던 죽음을 뱉어내는 한숨이었다. 새금한 보리풀을 손바닥만 한 길이로 잘라 가면 엄마가 쌀 뜬 물을 구해다가 한 솥 부르르 삶았다. 금세 향긋한 보리풀내가 방안을 덮었다. 보리가 올라오고 나면 쑥이 나오고 다른 봄나물들도 흙내음을 풍기며 살랑거린다. 죽음의 한 고개를 겨우 넘겼던 아빠는 그것을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참 이상도 하지. 내가 아홉 살인가 열 살이었나, 쌀 한 톨로 시작해서 아빠의 보릿고개 레퍼토리가 이어지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또 시작이다' 그랬더랬다. 이제 여든이 된 우리 아빠. 기억이 자꾸 깜박깜박거린다. 며칠 전에는 내 남편과 아이들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아빠의 기억이 더 달아나기 전에 아빠의 보릿고개를 끄집어내고 싶었다. 나중에 듣고 싶을 때 두고두고 들으려고.
오늘 저녁 밥상에서 아홉 살 난 아들이 다 먹었다며 자기 밥그릇을 내밀었다. 그릇에는 밥알이 여럿 남아 있었다.
"밥을 남기면 안.."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 보릿고개라는 말은 시작도 못 했는데, 배가 무지 고파서 누워 있었을 어린 아빠와 아홉 살 아이를 두고 쌀 한 톨이라도 버리지 말라고 했던 마흔의 아빠 모습이 갑자기 겹쳐져서 그랬다. 어쩌면 우리 아들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집에 쌀가마를 가득 쟁여 놓고 사는 것이 아빠의 소원이었다는 걸, 마흔이 훌쩍 넘고 보니 이제야 가슴으로 이해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