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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원 Dec 21. 2023

15회 :  그 책

“정훈관님이 하신 좋은 말씀은 가급적 낮에 하시거나, 아니면 다 책에 있는 내용이므로 책을 읽도록 하고, 취침 시간만은 지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병사들은 내일도 온종일 보초를 서고 훈련을 해야 합니다.”  


라고 나름 예의를 갖추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건의 사항을 수용할 인간이 절대 아니었다. 험악한 인상으로 돌변하여 소리 질렀다. 


“너 이 새끼! 내가 말한 것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나오는 책을 가지고 와! 다음 주 정신교육 하는 시간까지! 안 그러면  곡괭이 자루로 10대를 때릴 거야! 각오해!”  


라고 하면서 씩씩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허접한 내용이 다 나오는 책이 있을 리 없다. 후회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후임 병사들 앞에서 구타당하면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제대 병장으로서 체면은 완전히 구겨질 것이다.   

   

 차라리 미리 찾아가서 잘 못 했다고 사죄하고 용서라도 빌어 보는 것이 나을 것도 같았다. 그러면, 소위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앞으로 병사들의 취침 시간이 더 줄어들 것이 뻔하다. 어쭙잖게 오기를 부려 많은 병사들을 더 고달프게 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소위가 주번 사령하는 날까지 일주일간을 고심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는 선오를 비웃고 다니면서 매우 신나 했다. 어김없이 그날 밤이 다가왔다. 야간 정신교육 한 시간 전이었다. 그는 보란 듯이 미리 구타할 곡괭이 자루를 질질 끌고 다녔다. 


 사죄하고 용서를 구할 시간도 이미 지나가 버렸다. 후임 병사들 앞에서 매를 맞고 망신당할 일만 남았다. 육군 정훈 교재라도 들고 가서 우겨 볼까. 교재에는 물론 그가 한 교육 내용은 다 들어 있다. 하지만, 소위의 개똥철학 따위는 있을 리 없다. 그러면 소위의 화를 더 돋울 것이다.

      

 들고 갈 아무 책이라도 있나 싶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내 책상 위, 그 자리에 늘 놓여 있었던,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보았던 그 책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을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교육장으로 향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더 올랐다.



 관사로 돌아가서 오랜만에 낮잠을 푹 자고 느긋하게 일어났다. 영덕에 하나뿐인 서점에서 군대 시절 들고 갔던 두툼한 그 책을 샀다. 그리고 잘 포장하여 우체국에서 기획부장 앞으로 소포를 보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해변을 걸으면서 유난히 파란 하늘에 정처 없이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한동안 멍하게 쳐다보았다.   끝     



{epilogue}


- 15회에 거쳐 허접한 글을 읽어 주시고 격려까지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몇 년 전에 종심(從心)이 되었지만, 아직도 호기심은 사그라들지 않아 생애 처음으로 소설 흉내를 내어 보았다. 소설 같지도 않은 소설을 쓰면서 새삼 소설가들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실감한 것이 이번에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또, 단번에 읽어야 할 단편소설을 억지로 몇 회에 나누어 연재한다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여 많이 어색했다. 이제부터는 쓰기보다는 몇 달 전에 처음으로 알게 된 브런치스토리에서 좋은 글을 찾아 읽고 즐기고 싶다. 너무라도 부족함이 많은 글을 읽어 주신 분들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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