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의 딸
딸을 보내고 집에 들어와 식탁에 널브러진 반찬 그릇들을 본다. 꽈리고추 무친 거, 가지나물, 매실장아찌가 두어 개 남아있고, 오징어 무친 거랑 김치는 국물만 남아있다. 빈 그릇만큼이나 마음이 허전하고 식탁만큼이나 마음이 지저분하다.
밥그릇에 밥 한 주걱을 퍼 담았다. 남은 반찬에 밥을 먹는다. 마른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한다. 왜 밥을 펐지?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남은 반찬을 버리지 않고 싶기도 했고, 또 허한 속에 뭔가를 채우고 싶었을까.
딸이 집에 갔다. 방학 내내 나랑 같이 있어줄 줄 알았는데, 중간에 친구들과 약속이 생겼다고 했다. 다른 조합의 친구 3팀과 노는 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솔직한 마음은 약속을 취소하라고 하고 싶었다. 학교 다닐 때 너는 친구들 매일 만나고 하루종일 같이 있잖아. 엄마는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번 보는데. 하지만 한참 친구가 좋을 나이인데, 어찌 보면 부모보다 친구가 좋을 때인데 친구를 못 만나게 할 수는 없다. 해주는 것도 없는 최소한의 엄마로 살면서 친구도 못 만나게 하면 그게 엄마냐. 딸을 보내야 한다. 그래도 못내 서운한 내색을 내비치고 말았고, 딸은 개학하기 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떠났다.
이제 울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딸이 다녀갈 때마다 눈물을 쏟곤 했다. 딸 앞에서는 아니다. 딸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철컥,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도 따라가고 싶다. 나도 집에 가고 싶다.
딸이 가고 나면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숨어있던 무기력증과 우울감이 밀물처럼 차오르고 짜증과 원망으로 화학변화를 일으키고, 결국 엄마와 아빠에게로 향한다. 죽음이 드리워진 엄마 얼굴이 보기 싫고, 괜한 일에 아빠에게 짜증을 낸다. 밥상도 티 나게 부실해진다. 딸이 있을 땐 최소 오첩반상을 차려내다가 갑자기 국에 김치와 마른반찬 하나 겨우 내놓는 식이다.
우리 가족이 완전체가 되어 같이 살 날이 올까? 딸에게 엄마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딸이 필요하다. 일어나면 엄마, 하고 나부터 찾는 딸, 오늘 아침밥은 뭐냐고 묻는 딸, 일어나자마자 휴대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딸,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놀아주는 딸, 아픈 할머니의 재활을 위해 조교 흉내를 내는 딸, 책 읽는다면서 방에 들어가 선풍기 틀고 놓고 잠들어 있는 딸, 나와 함께 야구를 보면서 친구들과 카톡 하는 딸, 볼링 치러 가자고 졸라대는 딸, 아기처럼 쌔근쌔근 자는 딸이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 딸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존재다. 엄마 간병에 지친 나는 자꾸 딸에게 의지하고, 딸에게 보상받고 싶어한다.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최소한의 엄마인 주제에 감히 최대한의 딸을 원하다니 욕심도 많다. 이 철없는 엄마를 누가 좀 말려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