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엄마의 새로운 헤어스타일링
엄마는 평생 아줌마 파마를 했다. 파마값 아깝다고 짧고 세게 말았고, 풀어져서 컬이 자연스러워질 때쯤 다시 파마를 말았다. 고데기, 드라이 같은 것도 할 줄 몰라서 늘 뽀글뽀글했고, 집안에 결혼식이 있을 때만 미장원 가서 드라이하고 왔다.
나는 엄마의 뽀글이 파마가 싫었다. 한참 예민하던 청소년기에 꾸밀 줄 모르고 투박하고 촌스로운 엄마를 친구들과 마주치면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엄마가 쓰러지고 난 뒤 처음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꿨다. 엄마 의지가 아니라 내 의지로. 뇌출혈 수술을 할 때 조금만 밀어도 되지만 의사가 수술할 때는 머리를 완전히 미는 것이 수술하기 편하다고 하여 무조건 수술하는 의사가 신경 안 쓰이게 하고 싶어서 완전히 미는 걸 선택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통보했다. 완전히 밀고 새로 기릅시다. 엄마는 얼마 전에 한 파마 값이 아깝다고 속상해했고 나는 머리 길면 파마 예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수술하고 회복은 안 됐지만, 엄마의 머리카락만은 노인+환자인 게 무색할 정도로 까맣고 풍성하게 자랐다. 반년 만에 엄마 머리는 좋은 길이가 되었지만, 지금 한 여름을 나기에는 손질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동생과 내가 엄마 머리를 자르기로 했다. 동생이 보자기를 잡고, 내가 자르고. 미용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용 가위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조금 걱정이 됐지만, 어차피 머리 하러 나갈 수 있는 상태도 아니라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동생과 엄마 머리를 만지고 자르고 있자니 눈물이 솟구칠 거 같았다. 우리 엄마,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쩌다 나와 동생에게 돌봄을 받는 신세가 됐을까. 나보다 눈물이 더 많은 동생 앞에서 울면 안 된다는 생각에 눈물 삼키면서 머리 자르는데 집중하려고 애썼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우리 남매가 엄마 머리를 잘라줄 일도 없었겠지. 이렇게 우리가 엄마 머리 함께 만지며 어릴 때 엄마 품을 파고들면서 엄마 냄새 맡으면서 행복했던 시간을 떠 올릴 일도 없었겠지.
손등이 저릿하다. 감동 파괴자 등장. 엄마의 오래된 재봉가위로 머리를 자르려니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서 손이 아프다. 뭘 사기 좋아하는 동생이 미용 가위 살게, 했다. 뭘 사기 싫어하는 나는 뭘 사, 그냥 아쉬운 대로 이걸로 하면 되는데, 한다. 큰 틀에서 커트는 끝났고, 디테일하게 다듬는 건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손등이 너무 아프다. 엄마 머리가 반곱슬 머리라서 자를 때는 힘들어도 자르고 나니 자연스럽게 휘어지고, 들어가며 자연스러운 컬을 만들어냈다.
아니, 그동안 뭐 하러 돈 주고 아줌마 파마하고 염색하고 그랬대. 그냥 커트만 해도 드라이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반곱슬에 흰머리 브리지한 것처럼 컬러도 자연스럽고 좋은데. 이제 파마하지 마.
동생도 동의했다. 엄마는 자기 머리가 반곱슬인 것도 몰랐을 것이다. 평생을 아줌마 파마로 살다가 이제야 아줌마 파마를 끝내고 딱 맞는 헤어스타일을 찾았다. 이 머리로 나가면 동네 아줌마들이 세련되고 자연스럽다고 다들 부러워할 것 같다. 그런데 엄마는 일어나서 나갈 수가 없다. 이럴 땐 인생이 참 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