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한 엄마의 웃음
딸이 내 옆에서 자고 있다. 잠든 딸을 쓰다듬는다. 다 큰 사춘기 소녀이지만 피부는 아기 피부처럼 곱다. 안경을 벗은 얼굴을 들여다본다. 안경을 벗으면 아기 때 얼굴이 그대로 있다. 아기 같은 딸이 내 옆에서 자고 있다니 행복하다. 하룻밤 자고 휙 가버리는 게 아니라 일주일째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이렇게 온 가족이 함께 살 수는 없는 걸까. 물론 늘 함께 살 때는 이만큼 소중한 걸 모를 수도 있다. 귀찮고 부딪히고 다툴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같이 살고 싶다.
딸이 오고 나서 집안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시끌시끌하다. 딸은 늘 조잘거린다. 고맙게도 딸은 아픈 할머니, 손 하나 까딱 못하는 할머니, 손녀 이름도 기억 못 하는 할머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할머니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아프기 전과 똑같이 말을 걸고, 반응이 없어도 장난을 치고, 놀려댄다.
미스터리한 건 말도 못 하는 엄마가 딸이 이야기할 때만 웃는다는 거다. 우리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웃는 건 아니겠지만(말을 못 하니 이것조차 알 길이 없다), 딸이 말만 하면 웃는다. 여름에 문을 다 열어놓는 시골 복도식 아파트 특성상 우리 집 웃음소리가 복도로 흘러갈텐데 이웃에서 들으면 아픈 사람이 있는데 뭐 저렇게 좋을까 생각할 것 같다. 엄마의 웃음소리, 우리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엄마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데 좋기보다는 신기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엄마는 왜 손녀딸의 이야기에만 웃는 걸까? 내가그렇게 웃기려고 해도 웃어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손녀 말에는 저렇게 웃는가 말이다.
아빠가 엄마를 일으켜 세울때 옆에서 거들던 딸이 곡소리를 낸다.
할머니 무거워. 할머니 너무 무거워서 손녀딸 나가떨어지겠어.
갑자기 엄마의 웃음이 터진다.
할머니 손녀딸이 힘들다는데 웃겨? 아니 이 할머니 보게. 고약한 할머니네.
또 까르르 웃는다.
딸과 아빠가 대화할 때도 웃는다.
할아버지 누가 만나러 가?
홍춘식이랑 행자.
응, 상자?
아빠가 말하는 아빠 친구 이름을 딸이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이름을 대자 엄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어떻게 행자를 상자로 알아듣냐고. 말하는 사람이 문제인건가, 듣기가 문제인건가. 아마도 행자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딸에게는 행자가 상자로 들렸나 보다.
웃겨서 웃는 걸까? 딸이 너무 솔직해서, 너무 엉뚱해서 웃는 걸까? 아니면 손녀딸에게만큼은 사력을 다해서 웃어주고 싶은 걸까? 아니면 몸의 기능 오류에 의해 발생하는 의미 없는 웃음일까? 그렇다 해도 어떻게 딸이 말할 때만 웃는가 말이다. 어쨌거나 엄마의 웃음소리가 고팠던 아빠와 나는 딸이 고맙다. 딸이 어둡고 우울하고 무기력했던 집안을 밝고 생명력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