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그런 건 아니다.
엄마? 나 놀다가 이제 집에 들어가는 중이야.
누구랑?
지민이랑.
지민이는 지난주에 만나지 않았나?
응, 근데 그때 실컷 못 놀았어. 얘기하느라 노래방도 못 가고. 지민이 학원 시간 때문에. 그래서 오늘 다시 놀기로 했거든.
그렇군. 아주 잘 놀고 있군.
비꼬는 건가?
아니, 방학인데 실컷 놀아야지. 실컷 노시오.(아니라고 하고서 비꼬임의 어미처리를 하고 말았다)
근데 엄마, 지민이가 뒤늦게 역사가 재미있어졌대. 지민이가 다른 건 다 잘 하는데 역사는 별로였거든.
뒤늦게? 이제 중3인데 뒤늦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에이, 엄마가 입덕을 안 해봐서 모르는데, 뭔가에 입덕을 하게 되면 왜 더 일찍 알지 못했는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래서 뒤늦게, 라는 표현을 쓰는 거야.
아, 그런 거야?
엄마 사랑 많이 해봤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여기서 사랑이 왜 나오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런 기분 안 들었어? 왜 우리가 지금에서야 만났는가? 왜 더 일찍 만나지 못했는가? 나는 안 해봤는데도 다 아는데...
글쎄, 난 그런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너무 오래돼서 까먹은 거 아니야? 까먹은 척하거나?
뭐,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 지민이가 역사를 좋아하게 됐으니까 너랑 할 이야기가 더 많아졌겠네.
응, 그래서 같이 서점에도 갔지. 역사책 구경하려고.
딸이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역사고, 시험 성적도 가장 잘 나오는 과목이다. 반면 중학교에 가면 공부 잘 하는 아이들도 의외로 고전하는 과목이 역사라고 한다. 홍시 친구 중에도 다른 과목 모두 100점인데, 역사만 80점대인 친구가 있다. 역사, 특히 세계사는 처음 접하면 방대하고 어려운데 다른 과목처럼 학원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냐는 썰이 있다.
근데 지민이는 근현대사, 특히 전쟁사가 재미있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이런 거. 나는 전쟁사도 별로고, 근현대사보다는 고대사가 재미있거든.
그래?
고대사는 빈칸이 많잖아. 기록도 많지 않고 부실하니까 상상의 여지가 많고, 그래서인지 야사나 썰들도 많고. 난 그런 이야기들이 재미있거든.
넌 이야기를 좋아하고, 역사도 결국은 이야기니까. 특히 고대사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돌멩이, 깨진 조각 하나를 놓고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나 엄마한테 고마운 거 있어. 어릴 때 역사 만화책 사준 거. 나의 역사는 그 만화책에서 시작했거든.
그거야 엄마가 학교 다닐 때 외울게 많은 암기 과목으로 생각해서 재미가 없었거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재미있는 이야기더라고. 내 딸한테는 역사를 외우는 과목이 아닌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먼저 알려주고 싶었는데, 마침 이이화 선생님이 감수한 이야기 한국사가 만화로 나와서 전집을 샀었지.
엄마, 그거 생각나? 내가 숨바꼭질하면서 장롱에 숨었다가 엄마가 숨겨놓은 전집 발견한 거?
응, 기억나지. 나는 전집을 한꺼번에 주면 질릴까 봐 곶감 빼먹듯 한 권씩 꺼내주려고 숨겨놓은 거였는데 너한테 들켜버렸지.
그때 전집 발견하고 내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데. 한 권 읽고 나면 그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한데, 엄마가 배송 중이라고 기다리라고 그랬잖아. 나는 어린이집 갔다오면 우편함 들춰보며 얼마나 기다렸다고. 근데 장롱 속에 숨겨놓고 나를 애태우게 하다니.
난 너의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게. 그래서 냉큼 주기 싫었지. 어쨌든 너 전집 발견하고, 하루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10권을 내리읽었잖아.
응, 맞아. 그 하루동안 읽은 역사 지식으로 아직도 먹고 산다니까. 중학교 시험도 그 만화책에서 본 내용으로 충분해. 난 만화책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가 만화책이 나쁘대?
왜 어른들은 은근히 만화책은 책 취급 안 하는 거 있잖아. 엄마도 아닌 척 하지만 은근히 무시하고. 특히 엄마는 학습만화는 아주 불온서적 취급하고 초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도 만화책은 아예 없었어. 부모들이 반대해서 아예 안 넣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만화책 보고 있으면 책 좀 읽으라고 하는 어른들도 있고. 만화책도 책인데. 어른들이 그거 몰라. 책 읽는 거 싫어하는 친구들은 만화책도 싫어해. 만화책 좋아하면 결국 책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학습만화도 아예 안 읽는 것보다는 낫다고. 읽다 보면 다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어. 지금 역사 공부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역사 공부 어떻게 공부하냐고 물으면 만화책 읽어보라고 말해. 뭐든지 가볍고 재미있게 시작해야지. 그다음도 갈 수 있거든.
그래, 만화책이라도 많이 읽어라.
이라도, 라니!
그래, 뭐든 많이 읽어라.
응, 이미 그러고 있어.
속으로 딸이 지금 고전하는 수학도 만화책으로 시작했어야 하나, 지금이라도 만화책을 구해서 읽혀야 하나, 잠깐 생각했지만, 아니다. 수학도 할 만큼 했다. 만화책은 아니지만 수학귀신이니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니 수학을 재미있게 접하게 하려고 나름 노력했으나 책만 재미있게 읽고 수학을 좋아하는 경로로 이어지진 않았을 뿐이다. 모든 게 다 같은 건 아니다. 어쩌다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지. 뭐라도 좋아하는 게 있는 게 어디냐. 어떻게 다 성공하냐. 하나라도 성공한 게 있어서 어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