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 여행

가까운 여행지의 발견

by 소요

성인이 되고 부모의 품 밖으로 나온 나는 주로 원심력으로 살았다. 내 삶의 반경 너머의 무언가를 늘 갈망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궤도 밖으로 밖으로 튕겨져 나가곤 했다.


아기를 낳고 나서는 아기를 중심으로 구심력이 작동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관성의 힘으로 일상의 궤도를 이탈하고 싶을 때는 여행을 갔다. 최대한 멀리,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감을 위해 낯설고 먼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래서 나에게 여행은 일상과 완전히 단절될 수 있도록 최대한 멀리 떠나는 것을 말하는 듯 했다.


하지만 엄마가 아프고 나서는 나의 여행은 불가능해졌다. 엄마는 우리 가족의 강력한 구심점이 되었고,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던 우리 가족은 엄마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주말에만 오다가 나는 아예 엄마 옆에 눌러앉았고, 남편과 딸, 동생은 번갈아가며 주말에 오고 있지만 동생도 남편도 엄마 옆에 눌러앉을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나야 젊을 때 후회 없이 돌아다녔고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엄마 곁에 머무는 것도 괜찮다. 그게 좋진 않지만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부모로 인해 한참 넓은 곳으로 뻗어나가고 새로운 세계를 접속해야 할 딸의 삶을 축소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있다. 하다못해 여름방학인데 어디 여행도 못 가고 집구석 신세라니. 특히 물을 좋아하는 딸인데 바다는커녕 물에 발도 못 담그고 길게 늘어진 여름의 꼬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번 광복절에 왔을 때 팬시하지는 않아도 물에 데려가고 싶었고, 가까이 있는 계곡들이 떠올랐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시골에 가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계곡이다: 특별하다면 내가 어렸을 때 여름에 솥 걸고 백숙 끓이고 돌에 삼겹살 구워 먹고 물놀이하던 곳이라는 거겠지. 사춘기 이후 갈 일이 없어서 어렴풋한 추억만 남아있는 그곳으로 갔다. 엄마는 아빠에게 맡겨두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성수기 때는 꽤 붐빈다는데 평일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람 반 물 반인 물은 나도 딸도 좋아하지 않는데 우리에게 딱이었다. 물도 깊지 않고 잔잔했다. 제대로 준비한 게 아니고 급조해서 특별한 놀이기구도 없이, 하다못해 튜브도 없이, 특별한 먹거리도 없이, 같이 놀 친구도 없이 그냥 몸만 달랑 가서 애가 좋아할까? 반신반의하며 갔는데 딸은 꽤 다채롭게 놀았다.


처음엔 워밍업으로 얕은 물에서 땅 짚고 헤엄을 쳤다. 몸이 풀리자 가슴팍까지 오는 조금 깊은 물에서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힘이 들면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서서히 떠내려갔다가 자유형으로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왔다. 또 힘들면 야트막한 물 가운데 앉아서 물고기를 구경했다. 물고기가 엄청 많았다. 보이면 욕심이 나는지 빈 물통으로 물고기 잡기를 시도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물통을 잡은 김에 물통 안에 물방울이 생기게 만드는 물방울 만들기를 발명했다. 이곳에서 수영과 다슬기 잡기는 허용한다는 플랑카드를 보고 다슬기 잡기를 시도했지만 성수기에 씨가 말랐는지 보이지 않았고, 오랜 취미랄 수 있는 예쁜 돌 줍기에 돌입했다. 돌을 만지면 던지고 싶은 법, 물 수제비 뜨기를 했는데, 통, 통 두 번까지는 성공했으나 세 번까지는 어려웠다. 물 수제비를 뜨다 보니 현기증이 와서 바위 위에 앉아 물멍을 했다가 물놀이가 끝난 후 근처 산 정자 올라가서 예전엔 여기서 보는 계곡이 예뻤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허기진 배에 옥수수를 털어 넣으며 장장 세 시간의 물놀이가 끝났다. 나는 물가에 앉아 혼자 노는 딸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행복하고 좋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으니까 모든 게 풍요로웠다.


엄마 오늘 물놀이 꽤 좋았어. 사람 없어서 조용하고 평화롭고. 물 흐르는 소리, 바람 소리, 물고기 움직이는 소리, 물방울 보글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근데 물 안에서는 몰랐는데 물 밖을 나오니까 팔다리가 아프고 피곤하네. 오늘밤 꿀잠 잘 거 같아. 근데 할머니는 잘 있을까?


나는 엄마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멀리 떠나지 못한 여행인데도 나는 쉽게 일상 궤도를 이탈했고 엄마와 단절을 경험했다. 다행인 건지 아쉬운 건지 멀리 떠나지 못한 여행이기에 일상의 복귀도 쉽고 빨랐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몰랐을 가까운 곳으로의 여행, 제약과 결핍은 또 다른 풍요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가깝고 풍요로운 여행의 묘미를 알았고, 앞으로 꽤 시도해볼 것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