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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Aug 10. 2024

숨 좀 쉬고 갑니다

한숨 대신 깊은 숨

입추가 지났다. 말이 입추지 아직 삼복더위에 쪄 죽을 거 같지만 아니다. 다르다. 새벽 공기가 다르다. 밤새 선풍기를 돌려야 잠을 잘 수 있었던 지난주와 달리 이젠 새벽에 선풍기를 끄게 된다. 발 밑 어딘가에 잔뜩 구겨져 있는 이불을 끌어올려 배를 덮고 창문으로 밀려 들어오는 공기를 느껴보았다.


넌 화날 때 어떻게 해?


무슨 이야기 끝에 이런 질문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갓 초등학생이 된 어리지만 성숙했던 딸에게 물어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어. 한 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화를 다스리는 법, 아니면 숨 쉬는 법을 학교에서 가르쳐주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어린 나이에 단체 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하기라도 한 걸까? 심호흡하는 방법을 시연하던 딸의 얼굴을 보며 따라 하느라 바빠서, 어디서 배운 건지 물어보지 못했고, 신기하게 화가 가라앉은 기억이 났다. 벌떡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갔다. 까만 하늘에 밀도 높게 지표면에 내려앉은 새벽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차갑다.


그래, 숨을 쉬자. 한숨 말고 깊은 숨, 심호흡을 해보자.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자 갓 만들어진 빵처럼 신선한 공기가 코를 지나 가슴으로 밀려 들어왔다. 횡경막이 서둘러 올라가고 최대한 깊숙한 곳까지 공기가 내려갔다. 숨을 참았다가 서서히 내뱉었다. 그렇게 세 번, 횡경막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구석구석에 쌓인 노폐물이 흘러나오고, 나쁜 마음, 험한 말들이 무력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잠시 어지러웠다. 뭔가 빠져 나가고 탈진된 기분을 지나 몸이 가벼워졌다. 아, 살 것 같다.


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시작하는 의식처럼 숨을 잘 쉬어 보기로 했다. 다시 세 번의 심호흡을 하고 엄마에게 갔다. 


엄마, 잘 잤어? 응, 잘 잤어. 아빠는 어디 갔어? 밭에. (밭에 간다고 정확히 말한 건 처음이다) 오! 맞아. 아빠 밭에 갔지. 엄마가 바라던 대로 아빠가 부지런한 농부가 됐어. 엄마, 오늘은 토요일이야. 이따 엄마 아들 올 거야. 아들 오면 좋아? 좋지 뭐. 그래, 나 씻고 올게. 아빠 올 때까지 잠깐만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


씻고 나오니 밭에 갔던 아빠가 가지랑 호박을 들고 왔다. 이제 엄마를 씻길 차례. 심호흡 세 번 하고 엄마를 욕실로 데려갔다. 머리 감기고 심호흡 세 번, 등 마사지하고 심호흡 세 번, 팔 마사지하고 심호흡 세 번, 다리 마사지하고 앉아서 심호흡 세 번, 발 마사지하고 다시 앉아서 심호흡 세 번, 양치하고 심호흡 세 번, 수건으로 온몸 구석구석 닦고 심호흡 세 번, 로션 바르고 마사지하고 기저귀 채우고 옷을 입혀 휠체어에 앉혀 아빠가 데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샤워하고 바로 밥 하러 갔겠지만, 나는 숨 좀 쉬고 가기로 했다.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누워서 사지를 최대한 뻗고 심호흡 세 번을 했다.


숨만 잘 쉬어도 살 것 같구나. 이제 다음으로 가도 되겠어. 이제 밥 하러 가야지. 얼른 가지 찌고 호박 볶아서 엄마 밥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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