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까지 가서 책을 읽어야 돼?
딸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여행을 좀 열심히 다녔다. 왜 초등학교때까지냐고? 아무래도 중학생이 되면 시험을 보기 시작하면서 어른들의 휴가 일정에 맞춰 오랜 시간 여행 가기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추석 명절에 휴가를 붙여서 좀 긴 여행을 가곤 했는데,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보니 이 기간에 시험이 들어가면서 어려워졌다. 또 사춘기가 되면 아무래도 부모와 하는 여행에 시큰둥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따라다닐 때 열심히 다니자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여행의 이유는 우선 내가 여행을 좋아하고, 당연히 그 경험을 아이와 나누고 싶어서...부터 시작하여 백만 가지 정도 늘어놓을 수 있으나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이 글은 여행 가방에 넣어가는 은밀한 독서 프로젝트에 대한 것이다. 뭐 여행까지 가서 책을 읽나 싶기도 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은 의외로 아이에게 평생 가는 독서 습관을 만들어주고 독서의 재미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행이 독서의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특히 해외여행이라면 그것이 자유여행이면 좋다. 자유여행은 기다리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공항에서 기다리고, 기차나 버스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심지어 성수기에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우리나라처럼 빠른 서비스가 안 되는 나라에 가면 음식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여행 갈 때 읽던 안 읽던 습관적으로 책을 챙겨가는데, 기다리는 시간을 못 견뎌하는 아이에게 내가 읽으려고 가져 간 책을 준 적이 있다. 그 책이 마크 트웨인의 '톰소여의 모험'이었다. 어렸을 때 만화로만 봤지 원작을 읽지는 못해서 가져갔는데, 그 책이 초등학교 2학년이 읽기에는 글밥이 꽤 많은 책이었는데도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여행을 하는 동안 심심해지고 기다려야 할 때마다 그 책을 서너 번 정도 반복해서 읽는 것을 보고 여행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몽땅 책 읽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번째 조건이 있다. 상시 데이터 사용이 가능한 스마트폰이 없는 것이 좋다. 아이에게는 안 주고 나는 스마트폰 보고, 그런 식은 곤란하다. 그래서 그런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나 역시 와이파이, 데이터 사용을 스스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다. 여행 중 휴대폰 대신 가이드북과 지도를 사용하고, 정보가 필요할 때는 호텔이나 식당에 가서 와이파이를 사용한다. 이렇게 하면 독서 뿐만 아니라 여행 본연의 목적에도 집중할 수 있다.
기다리는 많지, 스마트폰도 없지, 심심하지, 그렇게 할 게 없을 때 책을 쥐어주면 선택지가 없는 아이는 할 수 없이 마지못해 책을 읽는다. 아직 습관이 형성되기 전이라면 심심풀이 땅콩처럼 피곤해도 산만해도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책, 또는 이솝우화나 그림형제 동화집처럼 단편이 묶인 책이 좋다. 그것이 반복되고, 습관이 되면 어떤 책도 상관없다. 나중에는 내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기다릴 때, 심심할 때, 할 게 없을 때 자연스럽게 책이 떠오르고, 스스로 읽을 책을 챙겨가게 된다.
지난주에 지인분이 하는 사과농장에 사과를 따러 가기로 했다. 초등학교 때 같았으면 부모 졸졸 따라다니며 사과를 땄겠지만 이제는 컸다고 딸이 선언했다. 자기는 사과 안 따고 차에서 책 읽겠다고. 이렇게 부모와 아이의 욕구가 불일치할 때 그것을 책이 메워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게 사과농장에서 읽기 시작한 책이 바로 '채식주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