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소설 2 : 블루 없는 블루홀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다니. 내가 어떻게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 꿈인지 생시인지, 어쩌면 섬망 같은 것일까?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섬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집중환자실로 올라온 날, 보호자 침대에서 쪼그려서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을 때였다. 엄마는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엄마, 왜 그래? 붙잡는 내게 엄마는 '누구세요. 여긴 어디예요?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라고 말해서 나를 아연실색하게 했었다. 간호사는 환자에게 일어나는 섬망, 일시적으로 의식의 혼동이 일어난 것이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다.
"직접 와서 봤는 데도 꿈만 같네요. 뭔가 비현실적이에요."
내 오른쪽 옆에 앉은 여자가 나를 쳐다보며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어디서 본듯한 평범한 얼굴에 한 듯 안 한 듯 수수한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오른팔에는 꽤 화려한 진주 팔찌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진주 팔찌는 어쩐지 친밀함을 느끼게 했는데 내 오른손 약지에 끼고 온 엄마 진주 반지 때문이라면 이건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 수준의 억지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억지스러운 연결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말투와 태도에서 친절이 몸에 밴 듯한 인상을 받았기에 혹시 나를 아는지,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다들 축제 분위기인데 공연히 엉뚱한 질문으로 그 분위기를 깰까 봐 두렵기도 했다. 나는 조용히 눈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벌써 6시가 넘었네요. 이제 만찬장으로 이동하는 거죠?"
안 그래도 화려한 외모에 오렌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연미복에 어울리는 까만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목을 쭉 빼고 객석 끝 쪽을 향해 두리번거리다가 객석 끝에 격식있는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람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가이드 따라가면 된다고 했어요. 근데 그거 알아요? 가이드는 전부 선발된 대학생들이래요. 아, 이제 진짜 배고프네요.”
"만찬도 너무 기대돼요. 도대체 뭐가 나올까요? 만찬 메뉴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게 기자들 비밀 유지 서약서까지 썼다잖아요. 자 함께 가시죠?"
진주 팔찌를 한 여자가 나에게도 함께 가자는 제스처로 팔을 들면서 말했다. 나는 그들이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 나는 이미 자연스러운 일원이었다. 누구도 나를 의심하거나 낯설어하지 않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출판사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강 작가는 시상식에 가족이 아닌 출판사 사람들을 초대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들은 시상식에서 한강 작가를 소개한 엘렌 맛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북유럽 성씨는 참 특이했다. 맛손, 에릭손, 옌손, 올손... 손으로 끝나는 성이 많은 것이 신기했다. 오렌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엘렌 맛손이 시상식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며 그사이 외웠는지 낭독하듯이 말했다.
'한강의 글에는 두 가지 색이 만납니다. 흰색과 붉은색. 흰색은 그녀의 많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눈으로, 화자와 세상 사이의 보호막을 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흰색은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합니다. 빨간색은 생명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고통, 피, 그리고 칼의 깊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멋있지 않아요?"
그녀는 시상 연설도 예술이라면서 스웨덴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인 엘렌 맛손의 책을 한국에서 출간하면 어떠냐는 이야기를 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는 자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역시 책쟁이들은 별수 없다며 갑자기 경쟁자가 되는 거냐며 웃었다.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꿈이라면 꿈에서 깰까 봐 두려웠다. 꿈이던 섬망이던 뭐든 그냥 즐기기로 했다. 엄마를 돌보느라 집안에만 갇혀있는 나에게 꿈은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공간 아닌가. 아니 왜 꿈이라고 단정 짓는가. 진짜 현실일지도 몰랐다. 가끔 현실이 소설보다도 비현실적이고 현실에서 소설 같은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내 인생은 지금까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뭔가 드라마틱한 게 없었다. 엄마가 쓰러지게 되고 딸인 내가 간병인이 되어 엄마 집에 유폐된 것, 그것이 최근에 드라마틱한 일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이마저도 대한민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노벨상 만찬이 열리는 곳은 스톡홀름 시청사 블루홀이다. 오래전 출장으로 왔었던 곳이다. 당시 시청사 가이드에게 여기서 노벨상 만찬이 열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내가 만찬에 참석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가이드가 영어로 설명을 했는데, 스웨덴 영어가 이상하게 잘 들려서 스웨덴에 급호감이 생겼던 기억이 살아났다. 그때 시청사의 건축 양식이 'national naturalim'이라고 말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데 나중에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용어가 없어서 아직도 궁금증으로 남아있다. 만찬장에 들어서자 진주 팔찌를 한 여자가 말했다.
"그런데 여기 이름이 왜 블루홀일까요? 블루가 없는데..."
지금껏 입술 한번 떼지 않고 조용히 있던 내 입술이 갑자기 달싹였다. 갑자기 알은체를 하고 싶어졌다. 다들 흥분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혼자 너무 조용히 있는 것도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혀끝으로 입술 위아래를 축였다.
"이 시청사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가 원래 벽을 파랗게 칠하려고 계획했었대요. 그런데 막상 보니 벽돌 빛깔이 예뻐서 원래 생각을 바꿔 그대로 뒀다고…알고 있어요.”
해요,로 끝맺음하려다 말고 알고 있어요, 라고 했다. 오래 전에 들은 내용이기도 하고, 신중하게 말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가만 있던 내가 말을 해서 놀랐는지 세 명의 일행이 나를 주목하고 있었고, 그중에 가장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오렌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소 요란스럽게 반응했다.
"아, 그래요? 근데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여길 파란색으로 칠했으면 촌스러웠을 거 같아요. 그냥 둔 게 신의 한 수네요. 그런데 스웨덴 사람들이 여전히 블루홀이라고 부르는 거 재미있지 않아요? 블루가 없는 블루홀이라... 스웨덴 사람들의 위트일까요?"
"그런데 영서 씨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요?"
검은 뿔테 안경의 남자가 불쑥 물었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진주 팔찌를 한 여자가 나 대신 말을 했다.
"아, 영서 씨가 건축에 관심이 많아요, 여행도 많이 하셨고요. 그때 인터뷰할 때 스톡홀름에 와보셨다는 얘기도 하셨던 거 같아요. 맞죠?"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인터뷰라... 어떤 인터뷰일까? 나도 그들처럼 출판사 직원인 걸까? 기자일까? 나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블루가 없는 블루홀을 구경하고 감탄하는 사이, 나는 내 속을 헤매고 있었다.
급발진 소설 1 : 드레스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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