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소설 1 : 드레스 코드
번쩍하는 섬광에 눈이 떠졌다.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려보았지만 밖은 깜깜했고 불빛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이불 밖으로 손을 뻗으려다 말았다. 휴대폰을 눌러 조명을 보는 순간 다시 잠들기가 어려워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눈을 감았다. 두 손을 가슴 위에 살포시 포개었다가 오른손을 내려 배를 살살 문질렀다. 역시 한번 깬 잠은 어려웠다. 결국 배에 머물러 있던 오른손을 이불 밖으로 멀리 뻗었다. 휴대폰은 의외로 내 어깻죽지 아래에 있었다.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환한 조명이 눈을 찔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오른쪽 눈만 조심스럽게 치켜뜨고 숫자를 보았다. 2시였다. 2시라는 시간은 낯설었다. 새벽 4시에서 5시 언저리에서 눈을 뜬 적은 있어도 2시에 잠을 깬 적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며칠 전 잠들기 전에 책에서나 보던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때가 새벽 2시였다. 그 후유증일까? 다시 자기는 힘들겠는데. 뭘 하지? 누워서 멀뚱멀뚱거리다가 어제 저녁 뉴스에서 봤던 게 떠올랐다. 노벨상 시상식이 우리 시간으로 새벽 2시에 열린다고 했다.
한번도 본 적은 없어도 분명히 화려하고 멋질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타는 거니까 궁금하긴 했다. 그렇다고 새벽 2시까지 안 자고 기다리거나 그 시간에 알람 맞춰 일어나 생중계를 챙겨볼 만큼 열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한강 작가의 작품을 꽤 읽었고 지금은 ‘희랍어시간’을 읽고 있지만 그렇다고 한강 작가의 빅팬은 아니었다. 오히려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는 관심이 있었다. 회사 다닐 때 스톡홀름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얼마나 바쁘고 정신이 없었던지 스웨덴이 내가 좋아하는 삐삐, 그러니까 삐삐를 쓴 린드그렌의 고향이라는 사실도, 거기서 노벨상 시상식이 열린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장소성을 느껴볼 여력도 없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스톡홀름 시청사와 구시가지인 감라스탄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제대로 여행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언젠가 북유럽 여행을 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타면서 다시 그 마음이 살아난 것이다.
유튜브에 접속했다. 맨 위에 생중계 채널이 떴다.
2024 Nobel Prize Award Ceremony.
LIVE: 10 December 16:00 CET
터치했다. 접속자가 많아서 그런지 접속이 잘 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화면의 정중앙 화살표를 터치. 팝업이 떴다.
당신은 노벨상 시상식에 초대받았습니다. 노벨상 시상식은 엄격한 드레스코드가 적용됩니다.
남성은 연미복, 여성은 이브닝드레스가 기본입니다. 단 출신 국가의 전통의상도 허용됩니다.
준비되었습니까?
이게 뭐지? 유튜브를 보는 데도 드레스코드가 적용된다고? 잠결이라서 뭔가 잘못 본 걸까? 지난 1년 엄마 간병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해서 내가 뭘 잘 모르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신을 차려보기로 했다. 빛이 더 필요했다. 스탠드를 켜고 다시 한번 클릭했다. 같은 팝업창이 떴다. YES 버튼을 눌러보았다. 하지만 다시 같은 팝업이 떴다.
참 별일이네. 나 같은 사람에게 이브닝드레스가 어디 있담.
나는 엄마 간병인 신세다.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라 엄마 집이다. 엄마 집에서 간병인으로 살고 있는 내가 입는 옷이란 목이 늘어진 면티에 무릎 나온 츄리닝뿐이었다. 간혹 외출할 때 입는 흰색 셔츠와 남색 조끼와 청바지, 그나마 내 옷 중에서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카키색 사파리가 있긴 하지만 그게 드레스코드에 맞을 일은 없다. 어차피 우리 집에도 이브닝드레스는 없다.
내 주제에 무슨 노벨상 시상식이냐. 잠이나 자자.
갑작스러운 신세한탄에 나도 놀랐다. 포기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누워서 한강 작가는 뭘 입으려나, 상상해보았다. 작가의 성향상 화려한 드레스를 입을 리 없고 가뜩이나 지금 시국도 어수선한데 더더욱 그럴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설마 한복은 아니겠지. 어떤 의미에서 한복은 드레스보다 더 화려하고, 아무리 수수한 한복이라도 어깨선과 소매선의 독특한 실루엣 때문에 사람을 더욱 부풀려서 어떻게든 눈에 띄게 하는 옷이었다.
갑자기 엄마에게 한복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한복은 동생 결혼식에 맞췄던 혼주 한복으로 그때 큰 마음먹고 서울까지 와서 좀 비싸게 주고 맞춘 거였다. 평생 멋을 부릴 줄 모르고 옷을 차려입을 줄 몰랐던 엄마는 조카들 결혼식 같은 격식 있는 자리에 꼭 한복을 입곤 했다. 시골 아줌마 같다가도 한복을 차려입으면 그럭저럭 품위 있어 보였다.
얼마 전에 장롱을 정리하다가 엄마 한복 상자를 발견했다. 이사를 하면서 엄마 옷을 대거 정리했고(미리 정리한다고 생각했다), 한복도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세탁소에 맡겼다. 동정도 새로 달아 달라고 했다. 앞으로 엄마가 한복을 입을 일이 있을 것 같아 맡긴 건 아니었다. 나 혼자의 은밀한 생각으로 엄마 수의로 입힐 생각이었다. 엄마가 평소 입던 옷을 수의로 하면 좋겠다고 오래전에 생각하고 있었고 그날이 생각보다 빨리 오고 있다는 것을 매일 느끼고 있었다.
드레스룸 깊이 넣어둔 한복 상자를 조용히 꺼내왔다. 얇은 한지를 걷어 내니 청색 계열의 파스텔톤 한복과 그에 어울리는 파우치가 나왔다. 십 년쯤 된 한복이지만 세탁하고 동정을 새로 달아서 그런지 새 한복 같았다. 이왕 입는 거 속치마부터 속저고리, 버선까지 제대로 챙겨 신었다. 엄마 한복이라 노티가 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쿨톤이라 나에게도 무난하게 어울렸다. 지난 주말 머리를 다듬은 건 다행이었다. 엊그제 손톱을 자른 것도 잘한 일이었고. 드레스코드가 이래서 중요한가. 옷을 갖춰 입으니 간병인으로 살던 음울한 나에게서 빠져나온 기분이 들었다. 가끔 기분 전환을 위해서 이렇게 차려입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기분 내는 김에 산 지 1년도 넘은 립글로스도 발랐고 첫 월급으로 엄마에게 사주었지만 아낀다고 엄마가 끼지 않았던 진주 반지도 꼈다.
다시 유튜브에 들어갔다. 화면을 터치하니 같은 팝업창이 떴다. Are you ready? 이번에는 YES 버튼을 눌렀다. 접속자 수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화면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더 이상 팝업이 뜨진 않아서 기다려보았다. 그러면 그렇지, 드레스코드를 맞춘다고 갑자기 접속이 되겠어. 포기하려는 순간 화면에 내 얼굴이 나타났다. 어색한 내 얼굴 위에 노란 형광색으로 된 사각 프레임이 나타나 움직이더니 얼굴을 찾아 스캔했고, 상체로 내려와 스캔하더니 ‘코드 일치’라는 문자가 나타났다. 기술에 문외한인 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게임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노벨상 위원회에서 디지털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갑자기 화면이 작아졌다가 커졌다를 반복했고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지러워서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니 입체감과 질감까지 느껴지는 화면이 나타났는데 노벨상 시상식 무대였다.
말로만 듣던 블루카펫이 저거 구나. 단상 맨 앞줄에는 백인 남성들이 같은 연미복을 입고 빈틈없이 앉아있었고 전구가 나간 조명처럼 어두운 자리가 있었는데 그곳에 한강 작가가 앉아있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낯빛과 작은 체구가 검은 드레스에 폭 싸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눈에 띄기도 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검은 드레스라. 한강 작가다운 선택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희랍어 시간에 나오는 그녀, 장례식장에서 금방 빠져나온 듯 온통 까만 옷만 입는다는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더 신기한 건 음향이었다. 요즘 생중계 음향이 이 정도인가, 오케스트라 연주가 되고 있었는데 마치 콘서트홀 한복판에 와 있는 듯 공간감이 느껴졌다.
타이밍마저 절묘했다. 한강 작가의 순서였다. 'DEAR 한강'으로 시작하는 말로 한강을 호명하자 참석자 모두가 기립했고 한강 작가가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와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실 걷는다기보다 살얼음판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움직이는 것 같았다. 왼쪽에서 걸어 나온 한강 작가는 오른쪽에서 걸어 나온 스웨덴 왕을 블루카펫의 정중앙 THE NOVEL PRIZE라고 프린팅 된 곳에서 만났다. 카메라가 시상자인 스웨덴 국왕을 잡는 사이 한강 작가의 뒷모습이 보였는데, 의외로 등이 살짝 파진 드레스였다. 허를 살짝 찔린 기분이었다. 한강 작가의 너무나 닫힌 드레스를 보면서 어딘가는 좀 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뒤였다. 한강 작가는 스웨덴 국왕과 악수를 하기 위해 상장과 메달 상자를 한 손에 거머쥐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버거워보였다. 메달은 왜 목에 걸어주지 않지? 메달을 목에 걸면 손이 훨씬 자유로울텐데. 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빵빠레 소리와 함께 관객석 쪽으로 돌아 인사를 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오는 쪽으로 카메라가 움직였는데, 한국인 서너 명이 휴대폰으로 한강 작가를 촬영하고 있었다. 한강의 축하사절단임에 분명했다. 그들도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유독 한 사람이 좀 튀어 보였다. 놀랍게도 한복이었다. 아니, 저기에도 한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네, 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세상에, 그건 나였다.
급발진 소설 2 : 블루 없는 블루홀에서
https://brunch.co.kr/@74e337aa07ba477/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