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자유, 흩뿌림, 고난 그리고 다정함

by Pink Brown

바람이 분다


이다음 떠오르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노래의 한 구절이 생각날 수도 있고, 시가 생각날 수도,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때로는 에세이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에 시폰 스커트가 부풀던 기억, 비바람을 헤치고 어디론가 걸어가던 기억, 몸이 기울 정도로 강풍이 불어오는 제주 오름의 정상에서 아이들과 즐거움의 비명을 지르던 기억, 그리고 차가운 밤바람에 걱정과 번민을 날려버리던 기억.


언젠가 어느 가을날 밤이었다.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친구의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이가 추억이 되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그때는 또한 메시지를 보낸 친구의 아버님 사망 1주기이기도 했다. 슬픔과 연민과 어지러운 생각에 괴로워하던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문득 이렇게 말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모든 감정들 다 날려버리고 집에 들어가라고. 친구는 재킷 앞섭을 열고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정말로 바람에 흘려보내고 귀가했다. 때때로 왠지 바람이 감정들과 생각을 모두 담고 저 멀리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정말 가슴을 펼치고 마음속의 것들을 바람에 쏟아낸다고 상상하면 속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착각이 든다. 어떤 형태로 날아갈지는 사람마다 다 상상이 다를 것이다. 나는 주로 나비가 날아간다는 상상을 한다. 마음속에서 작은 나비들이 쏟아져 나와 바람을 타고 나부낀다. 나비의 색은 감정과 생각의 색과 비슷하다. 붉은 분노, 노란 실망, 검은 짜증, 파란 슬픔, 진초록의 기괴함. 겉보기보다는 속이 사뭇 그로테스크한 나는 어릴 때부터 상상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상상은 나의 마음대로라고,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내가 무슨 생각과 상상들을 했을지는 밝힐 수 없다. 상당히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했다고만 말해두겠다. (지금도 때때로 여전히 그러하다.) 그런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온갖 독을 뿜어내다 가슴을 통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바람은 어두운 구덩이에서 나를 꺼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바람이라고 하면 문득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부드러운 바람이 작은 창문 틈으로 실어다 준 아이들의 재잘거림. 차가운 바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한밤중의 개 짖는 소리. 아가들을 재우는 김에 나도 같이 잠들어버렸다가 화들짝 놀라 깨서 후다닥 베란다로 종종걸음 한다. 아가들이 깰까 봐 불도 못 켜고 바깥 전신주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에 의지하여 베란다에서 비몽사몽 빨래를 널며 어떤 때에는 후덥지근한 바람이, 어떤 날에는 시원한 바람이, 어느 날에는 칼바람이, 또 칠흑같이 어둡던 그 밤에는 바람조차 없이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옆에 붙어있는 작은 빌라 1층의 전셋집에서, 학교에서 나는 다양한 소리와 옆집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사람들이 저벅저벅 걸어 다니는 소리와 소나기 듣는 소리까지 모든 소리는 바람을 타고 창문 새로 스며들었다. 소리와 함께 느껴지던 바람의 온도와 질감. 2층 이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순간들이 1층에서는 일어난다. 아가들이 마음껏 뛰라고 들어갔던 그 1층 피아노집(우리는 그 집을 이렇게 부른다)에서의 2년은 소리와 바람과 땀과 행복과 눈물의 시간이었다. 이런 기억들의 바람은 나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을 채워준다. 분위기, 냄새, 풍경, 느낌, 감정들이 조그마한 회오리 안에 동글동글 뭉쳐져 기억 깊은 곳에 얌전히 내려앉는다. 늪지대의 부글거리는 가스 볼 마냥 가끔 의식의 표면 위로 둥실 떠올라 마음을 예쁘게 또는 애잔하게 만들어주는 바람의 기억들. 소중해서 더 꼭 붙잡게 된다. 날아가버리지 않도록.


바람이 분다. 조금은 습하지만 이제 제법 시원한 기운이 도는 바람이 불어와 셔츠 자락과 머리칼을 나부낀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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