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수업이 없어 느지막이 눈을 뜬 김필립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어젯밤 장아라와 나눈 이야기를 차분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스왓과 4C는 잘 정리가 되었고, 사업계획서 도입부 같은 논리적인 문장들도 만들었다. 그 와중에 자기도 모르게 한 스프린트 때문에 칭찬도 들었고.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하는 것은 4C 중에 고객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말이지…?’
김필립은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어제 책상에 올려두었던 메모들을 더듬더듬 집어 들었다.
‘아라 누나처럼 태블릿을… 살 돈은 없으니까 그냥 계속 노트에 잘 적어두든가 해야겠군…’
김필립은 지금까지 적어둔 것을 다시 훑어보았다. 이제부터 생각해야 할 것은 요가복 시장 전체이고 그 시장에 있는 모든 고객들이지만, 김필립이 적어둔 고객은 ‘요가/홈트를 하는 20대 여성’이었다.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 김필립은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을 시작했다.
‘세그먼트를 모두 합치면 전체 시장의 고객이 보여야 하고, 각 세그먼트는 중첩되지 않아야 돼. 그러면 사실 여기 4C의 고객이라는 것은… 그래, 나랑은 겹치지 않는 부분의 고객도 분명히 있을 테니 내 고객이 아니라 전체 요가복 시장의 고객인 거로군. 그렇다면 요가나 홈트를 하는 20대 여성이 이 빗금 친 ‘가치제안’ 부분에 들어가는 고객, 즉 내 고객인 거겠네. 그리고 그게 타겟팅. 그런 얘기로구만.’
김필립은 지금까지 써놓았던 4C와 어제 새로 듣게 된 세그먼트, 타겟팅의 이야기를 같이 곱씹으며 마음속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어제 장아라가 설명할 때는 멍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차분히 예전에 써놓았던 것들과 함께 생각하니 점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요가복 시장 전체를 생각해보자 이거지…?’
김필립은 침대에서 일어나 적당히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았다. 마침 수업도 없는 날이라 하루 종일 이런저런 것을 찾아보고 생각하기 딱 좋았다. 새 노트를 꺼내 어제까지 적어둔 메모를 옮겨 적고 나서 김필립은 새 페이지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전략대로 시장을 나눠야 한다고 했으니까 이게 먼저 들어가야 될 거고…’
김필립은 일단 처음 생각했던 ‘초보자를 위한 요가복’이라는 전략을 염두에 두고 시장 전체를 초급자, 중급자, 숙련자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봤다. 아직까지는 충분히 미씨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덜렁 대, 중, 소 같이 시장을 나눠놓고 전략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고객이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 상품을 고르는 방법을 생각하라고 했지…’
왜 소비자는 하필이면 요가복 A를 골랐을까. 요가복 B나 C가 아닌 이유가 무엇일까. 요가복을 선택한 기준은 무엇일까.
‘일단 이쁜 거란 말이지… 그런데 아니, 안 이쁜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일단은 다 이쁘라고 만들었을 텐데. 그쪽이 아니야. 아…? 가격이라든지?’
가격을 생각하자 뭔가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이 상품을 선택하는 기준을 몇 가지 생각하자 가격, 기능성, 디자인, 브랜드 등등의 요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가지만 생각하고 고르진 않겠지만, 자기가 고를 때 제일 중요한 것을 빼놓고 생각하지도 않겠지.’
김필립은 혼자서 중얼중얼거리며 아까 그린 상자 안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 대충 이런 느낌 아닐까 싶긴 한데…’
먼저 패셔너블한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세그먼트는 요가를 막 시작했건 혹은 숙련자이건 상관없이 어느 정도의 고객층이 있을 듯했다. 모두들 예쁜 디자인,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고 운동하고 싶을 거야. 이런 층이 특히 요가의 숙련도에 의해 구분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중급자나 숙련자 층에는 다른 것보다 기능성을 더 중시하는 층도 있겠지. 역시 요가를 더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요가복도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거나 혹은 적어도 고난도 동작에 최대한 방해되지 않는 옷을 입고 싶어 할 터였다. 반면 초급자나 중급자 층의 일부는 지난번 김필립의 후배처럼 무난하고 튀지 않는 점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가격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 있을 테고, 한정판이 제일 좋은 사람들이 있겠지..?”
요가를 오래 할수록 보통은 잘하게 될 것이고, 애정이 깊어질 터이니 가격에 민감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숙련자 층보다는 초보자나 중급자에 많을 듯했다.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요가를 상당히 오래 해서 평범한 옷은 이미 여러 벌 갖고 있는 매니악한 사람들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보니 그림은 그럴싸한 것 같은데 미씨(MECE)인지는 잘 모르겠네. 일단 그건 나중에 아라 누나한테 물어볼까…?”
어느 정도 틀이 잡히자 김필립은 각 세그먼트의 규모를 알아보고 싶어졌다. 구글에서 이런저런 뉴스들을 검색하자 의외로 많은 자료들이 쉽게 나왔다. 각종 신문들이나 협회 등에서 발간한 자료를 가지고 연도 순으로 정리해보자 꽤 양질의 정보가 완성되었다.
· 2014년 요가 관련 용품 시장은 1조 원, 요가 인구는 200만 명
· 2016년 요가 관련 용품 시장 1조 5천억에 달할 것으로 추정
· 2020년 요가 관련 용품 시장 3조 원
‘그래. 2014년경에 200만 명 1조 원 시장이 2016년에 1조 5천억, 2020년에 3조 원 정도라니까 단순히 계산하면 지금은 600만 명 정도가 요가를 한다고 볼 수 있겠군. 아니 요가는 안 하고 그냥 요가복만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그냥 500만 명 정도로 잡으면 될 듯한데… 어 잠깐만?!’
김필립은 아까 그린 세그먼트 맨 밑에 ‘그 밖의 이유로 요가복을 사는 사람 (100만 명)’이라고 적어놓았다.
‘오, 이러니까 바로 미씨가 되는 것 같은데? 역시 기타 등등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나머지 그룹들도 어떻게든 볼륨을 추정해보고 싶은데. 김필립은 다른 그룹의 볼륨을 추정해볼 방법을 고민하다가 시장의 주요 기업 매출액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2020년 주요 요가복 브랜드 매출 실적
· 젝키스: 1,500억 원
· 에이다: 1,000억 원
· 룰라키위: 700억 원
· 뮤라: 500억 원
· 양대 스포츠 회사 요가복 매출: 700억 원
‘그렇지. 제일 잘 나가는 ‘젝키스’가 매출이 1,500억 정도고 다음 ‘에이다’가 한 1,000억 정도군. ‘룰라키위’ 이게 좀 유명한 듯한데 한 700억 정도 하는 것 같네. ‘뮤라’가 한 500억 정도. 메이저 스포츠 브랜드도 두 군데 합쳐서 700억 정도인가… 다 합치면 한 4,500억?’
전체 시장 3조 원에 비해서 너무 적은데…? 정보들이 약간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시장내 수위의 업체들을 다 모았는데 시장 사이즈의 15%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어딘가 이상했다. 다시 한번 잘 살펴보자 어디가 어긋나 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아하, 3조 원이 요가복만 있는 시장이 아니로군. 요가복과 '그 관련 시장’이다 이거지?’
그렇다면 한 절반 정도, 1조 5천억 정도가 요가복 시장인가? 다시 찾아보니 레깅스 시장만 7,500억 정도라는 뉴스가 보였다. 레깅스와 윗도리를 합치면 1조 5천억이겠군. 시장 선두기업 5~6개의 매출이 시장 전체 매출의 30%. 다른 업계의 선두기업 비중과 비교해 보니 조금 낮은 듯 했지만,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시장’이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많이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 그러면 이제 이 브랜드들이 어떤 그룹의 세그먼트를 주요 고객으로 삼는지를 보면 세그먼트의 사이즈가 대강 나올 듯 하단 말이지. 난 천재라니까.’
김필립은 엑셀을 켜고 각 회사들의 매출액과 주요 고객 세그먼트, 상품 가격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개를 입력하며 표를 만들다보니 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이 패셔너블한 디자인이 중요한 고객 세그먼트는 사실 룰라키위도 에이다도 뮬라도 다 해당된단 말이야. 그리고 여기에 없는 다른 회사들도 거의 다 패셔너블한 디자인이 중요한 세그먼트일 텐데. 특히 룰라키위나 에이다 같은 고가격 브랜드가 다른 회사랑 같이 여기에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따로 하나 만들어야겠어…’
김필립은 다시 처음에 그렸던 세그먼트 그림에 한 줄을 추가하고 ‘슈퍼스타들’이라고 썼다.
‘오케이. 그러면 이 프리미엄을 좋아하는 슈퍼스타들이 에이다와 룰라키위를 합쳐 12% 정도라고 보고, 젝키스와 스포츠 2사를 합쳐 기능파가 15% 정도 되겠군. 아까 요가 안 하는데 요가복 사는 사람들을 100만 명 정도로 봤으니 한 17%가 거기에 가고. 문제는 나머지란 말이지.’
김필립은 반 정도 완성된 세그먼트를 다시 차분히 살펴봤다.
‘아라 누나가 왜 세그먼트에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가 되는군. 자, 이 알뜰파, 개성파, 무난파, 패셔니스타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봐야겠는데…’
남은 56% 중 아까 3% 정도인 뮤라를 포함, 최소한 절반 정도는 패셔니스타가 가져가야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쁘고 합리적인 가격이 대세인 것은 당연해 보였다. 개성파는 아주 적은 수일 테니 4%만 빼주고, 나머지 24%는 적당히 반으로 나누어 알뜰파와 무난파에 12%씩 적어 넣었다.
‘오, 그럴싸한데?’
김필립은 자신이 완성한 표를 보자 흐뭇해졌다. 많은 숫자들이 그저 추측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나름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세그먼트의 구분이나 거기에 속한 고객 수와 비율도 상당히 설득력 있고 그럴싸해 보이기 시작했다.
‘꽤 쓸모 있는 지도가 되겠는걸.’
그렇게 생각하며 김필립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타겟팅할 세그먼트와 고객 수 최다, 판매수 최다, 매출 최다인 곳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타켓팅 할 곳은 ‘무난파’ 같아 보였다. 누가 봐도 지난번에 얘기한 후배와 같은 성향의 고객층이었다.
‘고객 수와 판매수는 패셔니스타가 압도적일 것 같은데? 단가는 슈퍼스타겠어…’
장아라가 내준 숙제를 완성하고 아까 찾아보았던 경쟁사의 특성들도 다 정리하자 김필립은 문득 배가 고파졌다. 늦은 점심시간도 훌쩍 지난 3시였다. 밥 먹는 것도 까먹고 생각을 했구나. 노트를 덮고 김필립은 컵라면을 사러 동네 편의점으로 향했다.
게스티메이션 (Guestimation: Guess + Estimation)
우리가 완벽한 세상에 살고 있다면 마치 교과서처럼 문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문제를 풀 수 있는 충분한 정보가 주어질 것입니다. 비록 그게 대단히 알아보기 힘들다든가 재가공이 필요할 지라도 말이죠.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정보를 원하는 타이밍에 얻을 수 있는 확률은 매우 희박합니다. 혹은 얻는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대단히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지요. 현업 마케터들은 늘 모자라는 예산,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상품 출시일과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장아라가 지난 에피소드에서 이야기했듯 마케팅은 정말 아름다운 수학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마케터가 계산기를 두드릴 만한 적절한 정보를 제때에 손쉽게 얻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스티메이션은 ‘알아맞히다’는 ‘게스(Guess)’와 ‘측정하다’는 ‘에스티메이션(Estimation)’이 결합된 말입니다. 우리나라말로 번역하자면 ‘눈대중’ 정도의 말이 되겠지요. 한국에서도 한때 유명 컨설팅 펌들이 ‘서울 시내에 사는 고양이는 몇 마리일까’ 같은 게스티메이션 문제를 면접에서 낸다고 하여 유명세를 탄 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비슷한 문제를 아직도 물어봅니다.)
이 게스티메이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논리적 사고’입니다. 빠져있는 정보를 채우기 위해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상식적인 가설을 세우는 것이지요. 물론 서울시의 고양이 숫자까지는 맞추기 힘들지 모르지만, 의외로 비즈니스에 관련된 숫자는 이곳저곳에 많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숫자를 기반으로 추측하면 의외로 현실에 가까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세세한 부분은 맞지 않을 지라도, 시장이라는 전쟁터에 나가는 마케터에게 대략적인 시장의 지형을 알려주는 큰 자산이 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알아차리셨을지도 모르겠지만, 김필립은 추론을 하면서 몇 가지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래도 상당히 좋은 게스티메이션으로 장아라가 원하는 것 이상의 숙제를 오늘도 달성하였지요. 그리고 김필립이 저지른 실수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필립의 지도를 장아라는 어떻게 평가할까요. 장아라의 평가와는 별개로 김필립이 자신의 사업에 필요한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을 완성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