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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bbin Chang Oct 05. 2021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원래 까만색?

색깔, 패키지, 커뮤니케이션

어린 시절 더운 여름에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시장을 돌고 나면, 어머니는 늘 시장 어귀 슈퍼에서 마지막으로 바닐라맛 아이스크림을 사주시곤 하셨습니다. 새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던지, 그때부터 달콤한 맛이 생각날 때면 언제나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찾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고 바닐라가 달콤하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 햐얀색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마치 ‘진리의 문’이라도 연 듯한 기분이었지요. 달콤한 맛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새카만 바닐라빈의 향을 가져다 쓰면서 왜 우리가 아는 모든 바닐라는 흰색인 것일까요?


사실 따지고 보면 실제 자연의 색을 그대로 따르지 않은 가공식품들은 매우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나나우유가 있지요. 물론 바나나의 껍질은 노란색이지만 먹는 부분은 분명 하얀색입니다. 이런 점을 노려 ‘바나나는 사실 흰색’이라는 것을 강조한 흰색 바나나우유도 출시된 적이 있지만, 그런 상품조차도 패키지에는 적극적으로 노란색을 사용하였지요. 사과 역시 껍데기만 빨간색이고 초록색 사과도 있는데도 빨간색 패키지를 가진 사과주스나 사과 관련 상품이 많이 있습니다. 망고의 경우는 껍질은 초록색인데 알맹이의 주황색이 주로 사용되지요. 별다른 법칙도, 일관성도 없는 이러한 색깔 선택의 이유는 여러분도 쉽게 짐작하실 수 있듯, 그저 단순히 대부분의 소비자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노란색을 봤을 때 흰색보다 더 빠르게 바나나임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혹은 시장의 상품이 먼저 시작했든 소비자가 시작했든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딱히 아무도 모르는 바닐라의 색을 가르치기보다는, 누구나 알아보는 우유색 바닐라가 소비자에게 더욱 쉽게 다가가는 지름길이겠지요. 그렇다면 마케터로서는 진실이야 어찌 되었든 진열대에서 채 1초도 머무르지 않는 소비자의 시선을 자기 상품에 붙들어 매기 위해 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바나나는 하얀색이고 바닐라는 검은색이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 뿐 소비자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색깔인지 정신분석인지

이렇게 색깔에 대한 소비자의 선입견을 패키지나 광고에 활용하는 이유는 소비자에게 쉽게 전달할 수 없는 무언가를 소비자가 이미 지니고 있는 경험을 통하여 연상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상품 패키지의 경우 눈에 잘 띄거나 디자인 측면에서 아름다운 것도 중요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소비자에게 그 상품의 특성을 설명하여 이것이 바로 내가 찾는 그 물건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요. 특히 ‘맛’이라는 것은 언어로 쉽게 표현하기도, 그렇다고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기도 어렵습니다. 앞서 언급된 사례와 같이 과일과 관련된 맛이라면 과일에서 가져온 색이나 혹은 과일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어떻게든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매운 맛, 부드러운 맛, 상쾌한 맛 같은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점점 난이도가 높아집니다. 빨간 고추와 전혀 상관없는 상품이라도 매운 맛이 연상되도록 빨간색을 사용하는 것은 귀여운 수준입니다. 맥주의 부드러운 거품 이미지가 느껴지도록 흰색, 금색, 갈색, 아이보리색을 다양한 농도로 조합한다든지, 아무 색깔도 없는 물이지만 시원하고 맑은 느낌을 주기 위해 파란색을 사용한다든지 등등, 대체품의 이미지나 대중적으로 인식된 이미지의 색깔을 차용하는 경우가 많아지지요. 맛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서도 색깔이 가지고 있는 온도나 이미지, 즉 시원한 느낌의 파란색이나 자연의 느낌인 녹색, 깨끗하고 위생적인 느낌의 하얀색 등을 이용하여 상품의 특성이나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대중적으로 널리 인식된 이미지와 색을 끌고 와서, 딱딱한 종이와 그림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느낌’이라는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지요.  


색깔은 하나의 언어

이렇게 등장한 다양한 상품들의 광고, 혹은 패키지는 곧 그 상품군의 언어로 통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늘 구매하는 라면의 경우도 매운 라면일수록 더욱 짙은 빨간색과 검은색의 조합이 사용되지요. 덜 매운 라면일수록 노란색의 비중이 많아지거나 주황색 등 연한 적색계통 색들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30여 년 전 매운 라면이라는 포지셔닝을 최초로 시도한 시장의 선두주자 신라면의 컬러코드를 업계 전체가 따라 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어찌 되었던 검은색이 많을수록 혹은 빨간색이 어두울수록 더욱 매운 맛임을 강조하는 무언의 약속이 업계에 통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여러 업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커피업계에서는 언젠가부터 녹색 패키지가 디카페인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지요. 판매 회사나 브랜드를 불문하고, 원두이든 커피믹스든 혹은 커피음료든 패키지에 초록색이 들어가면 소비자들은 쉽게 디카페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커피의 패키지가 빨간색이면 진하고 쓴 맛, 노란색 계통은 연하고 부드러운 맛, 그리고 연한 갈색으로 가면 더욱 크리미한 맛을 나타내는 언어입니다. 물론 블랙커피에는 검은색이 사용되지요. 각각의 상품을 모두 마셔 보지 않은 소비자라도, 업계 전체가 비슷한 색을 가지고 소비자와 소통하면 소비자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즉, 소비자가 경험하지 않은 것도, 경쟁하고 있는 업계 전체가 힘을 합쳐(?) 형이상학적인 콘셉트를 소비자에게 학습시키고 그것을 활용하여 본능적으로 소비자들이 상품의 특성을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이지요. 


맛이나 강도, 특성 같은 것뿐만 아니라, 상품의 등급이나 품격도 색깔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프리미엄을 강조하기 위해 검은색과 금색, 혹은 검은색과 은색의 조합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프리미엄이라고 특히 강조하지 않아도 소비자들은 이런 색이 사용되면 프리미엄 상품임을 쉽게 인지합니다. 거꾸로 싸고 저렴한 상품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일부러 강렬한 빨간색 글자를 사용하거나 보색 대비를 이용하여 촌스러운 느낌의 시인성을 추구하기도 하지요. 촌스럽고 싸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소비자들이 쉽게 상품을 집어 들 수 있게 하는, 패키지나 광고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인 것입니다.


모두들 자기가 가장 맵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포장지는 한결같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매운 라면의 색깔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진: 조선일보)


이렇게 마케팅에 있어서 색깔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보는 패키지나 광고에 있는 색상은 사실 단 하나도 그냥 담당자가 좋아하는 색깔이라 들어가는 것은 없지요. 하나하나의 색깔이 의미를 가지고 제한된 공간과 수단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상품의 특성을 알리기 위해 고민 끝에 선택된 색깔들입니다. 여러분은 선배 마케터들이 만들어 둔 색의 언어를 따라서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쉽게 이해시키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과감한 색을 사용하여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소개하시겠습니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1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소비자를 설득하여 경쟁사의 제품이 아닌 여러분의 상품을 집어 들게 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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