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쌍둥이 아들 두 명이 있다. 쌍둥이 아들의 시너지 효과는 예상하는 것만큼 대단하다. 집을 어지르는 것은 두 배이며 뒷감당의 10분의 9는 당사자가 아닌 보호자의 몫이다. 공부랍시고 하루 한두 시간씩 봐주는 데에 쓰이는 에너지도 두 배이다.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아직 엄마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는 그들이 내 무릎 위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있을 땐 마치 25kg짜리 쌀 두 포대를 내 품 안에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옆자리에 앉아 바나나를 먹으며 엄마가 어떤 글을 쓰는지 뚫어져라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다. 아빠에 비하면 엄마는 만만하고, 본인들의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만큼 애정도 깊다. 엄마껌딱지인 셈.
어느덧 방학한 지 16일 차를 맞이했다. 나의 여유 시간과 웃음기는 사라졌으며, 남은 것은 두통과 샤우팅이다.
공부, 영상 시청, 취침,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놀이를 한다. 정해진 놀이가 아닌, 본인들이 만들어서 하는 놀이다. 그들은 정해진 규칙을 지키며 하는 보드게임에는 큰 흥미가 없다. 엄마가 보기에는 정말 단순하고 별 것 없어 보이는 놀이를 창작한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라도 되는 양 그 놀이에 빠져든다. 그들에겐 주위의 환경은 원경으로 사라지고 놀이의 세계만 남는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싶다.
첫 번째 놀이는 주사위 게임 놀이이다. 닌텐도 게임을 변형한 놀이인데, 원래는 가상세계에서 마리오와 친구들이 주사위를 던진 후, 그 숫자만큼 놀이판 위를 뛰어다니며 아이템을 얻고, 함정에도 빠지면서 최종 목적지에 가는 게임이다. 그들은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이 게임을 실현시키기 위해 책장에 있는 책을 모조리 꺼내어 바닥에 차례차례 이어 붙여 놓는다. 그들이 창작한 보드 놀이판이다. 조그마한 스펀지 주사위를 던진 후 자신들이 마리오가 된 것처럼 그 놀이판 위를 뛰어다니는 것이다. 처음에는 거실에서만 놀이판을 만들더니 점점 확장시켜 이제는 안방에서부터 자신들의 방까지 연결시키는 놀이판을 만든다. 놀이판 위에는 아이템의 역할을 하는 인형이 있다. 아이템을 얻으면 한번 더 주사위를 던질 수 있다.
그냥 보드게임 싹 펼치고 엉덩이 붙여서 한 후 편하게, 깔끔하게 치우면 될 텐데. 그러기엔 성에 차지 않나 보다. 워낙 행동파인 그들이라. 책을 치우는 것은 당연지사 엄마나 아빠의 몫이다. 그러다가 책 표지가 맘에 들어 “엄마 나 오늘 잠자리독서에서 이 책 읽고 싶어.” 라 한다면 얻어걸리는 것이 있기에 묵묵히 오늘도 묵언수행을 하며 책 치우기를 감행한다.
두 번째는 장벽 쌓기 놀이. 갑자기 어제 이불을 모조리 꺼내더니 침대 위에 장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참 조용하길래 무엇인고 했더니 과연 그들은 베를린 장벽에 버금가는 건축물을 쌓은 것이다.
쌍둥이 아들들은 24시간 붙어있다. 모든 것을 같이 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면 조금이라도 개인 생활을 한다 치지만 방학이 되니 더욱 그들은 서로의 버팀 막이자 짝꿍이 된다.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하지만. 친구와 24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서로의 독립성이나 개인적인 휴식을 위해선 각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크면서 그들은 혼자 있기를 원하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둘이 같이 있는 것이 훨씬 득이 된다고 본다.
그들은 놀이를 창작한다. 유년시절에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틀에 박히지 않은 놀이들을 만들어 내어 그 놀이에 몰입하여 보냈던 시간들은 그들에게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놀이할 때 강하게 참견하지 않는 편이다. 육아관 중 서로 일치하는 게 몇 없는데, 이것은 드물게 맞는 영역이다. 개입을 최소화하여 그들이 더 창의적이고 아이다운,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놀이를 발견해 내고 그 속에 즐거움과 기쁨을 찾기를 원한다. 우리도 편히 쉴 수 있다는 핑계와 함께. 앞으로도 우리는 아이들이 자유로운 놀이를 할 수 있도록 방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