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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생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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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Jul 27. 2024

어무이

시가 있는 에세이 (5)

어   무   이


 욕밨다.

 괘안타.

 잘했다.


 시상이 다 그런데

 우짜노, 니 잘못 아인데

 맘 크게 묵으라

 니는 얼라 때부터

 유달랬데이, 재주 많애서

 뭐 해도 밥 묵고 산다.

 걱정 말그라


 니는 할만큼 안 했나

 니 쫓아낸 시상이 무정타


 살몬 다 살아진다

 몸 간수나 잘 해라

 에러분 날 잠깐이다

 쪼메 쉰다고 생각해라


 잘했다

 괘안타

 욕밨다.



 노래 잘 하지, 글 잘 쓰지, 공부 잘 하지, 그림 잘 그리지---,  우리 아이는 못하는 게 없어요. 어릴 때 어머니는 친구 분들을 만나기만 하면 자식자랑을 하느라고 여념이 없으셨다.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들의 수다는 남편 험담에서 시작해서(내 아내는 예외!) 자식 자랑에서 불이 붙는 듯 하다. 

 사실 내 얘기를 하실 때면 낮 간지러웠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자식에 대한 기대였다고 생각하지만 살아오면서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한 적이 없는 듯하다. 노래 잘 한다지만 동네 노래자랑 나가서 번번이 미역국이었고 글 잘 쓴다지만 제대로 문인으로서의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 편이었지만 50줄에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공부 잘 한다고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림도 그렇다. 어릴 때 ‘라이파이’라는 만화를 열심히 보다가 만화의 주인공을 그대로 그려 내었더니 어머니의 마음속에 내가 그림 잘 그린다는 착각을 심게 되신 것뿐이다. 라이파이만 잘 그렸지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내 그림숙제가 교실 뒷벽에 붙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는 한국의 어느 옛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만만한 일생을 살지 못하셨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 나셨고, 해방을 맞았으나 625전쟁 통에 장남과 장녀 두 금쪽같은 자식들을 잃으셨다. 그래도 아들 셋 딸 둘, 오남매를 더 낳아 키우셨지만 가끔씩 벽장 속 깊이 간직한 형과 누나의 배냇저고리를 꺼내 보시면서 눈물지으시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5.16 혁명이 일어나면서 금융조합 간부이셨던 아버지가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 실직 당하시면서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의 힘든 일생이 시작되었었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실패, 그리고 투병생활, 이러한 역경이 어머니를 꽤 지치게 하였지만 자식들에게는 항상 비관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다 보면 반드시 열매를 거둘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셨다. 그리고 그 확신은 청장년, 아니 장가들고 아들 낳고 중년이 될 때 까지 이어졌다. 50을 넘겨도 나는 어머니에게 영원히 어린 아이였다. 차 조심하고 해로운 것 먹지 말고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고 밤중에 이불 잘 덮고 자고  ---- 항상 자식에 대한 염려를 하시다가도 내가 어려움에 부딪혀 낙담하거나 좌절하는 기미만 보이면 ‘괘안타. 괘안타. 쪼매 지나면 모든 일이 잘 풀릴꺼다.’ 하고 위로 하셨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확신은 그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얻는 것인 듯 했다. 


 밴쿠버로 오기 전 형님 집에서 전 가족이 모여 환송회를 하던 날도 어머니는 계속 ‘걱정하지 마라. 니는 잘 살 것이다.’ 하고 위로하셨다. 그러나 연신 화장실을 들락날락 하시면서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는 모습을 본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었다. 아무리 형과 동생들이 있다지만 늙고 병들은 어머니를 두고 고국을 떠나는 마음은 얼마나 회한과 안타까움에 잠겨 있었던지 ---     


 성경에서 예수님이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라고 하셨지만 심지 않은 데서 거둘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나는 열심히 교회에 나가서 찾고, 구한다. 명예와 권력과 물질을 게걸스럽게 찾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어머니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한다. 서울에 계신다면 비행기 표를 사야겠지만 어머니는 우리가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갈 수 없는 나라’에 가서 계신다. 비행기 표 대신에 때가 되면 하나님이 나를 그곳으로 편도 표를 끊어 보내 주십사고 구한다.

열심히 마음 밭에 그에 대한 믿음을 심고 돌보며 기다리면 반드시 거둘 날이 올 것이고 다시 한 번 어머니의 구수한 사투리를 들을 것이다.

 “한 세상 사느라고 욕밨제. 인자 쪼메 쉬그라.”     


<되돌아보니>


2024년 8월 28일. 어머니 20주년 기일이 다가 온다. 내가 밴쿠버로 이주 후 1년 만에 돌아 가셨다. 일주일에 한두 번 꼬박 전화 드렸지만 옆에 있음만 하랴. 슬하에 자식 일곱이 있었지만 둘은 육이오 전쟁 때 하늘나라 보내고, 나머지와 지지고 볶고 잘 사셨는데 느닷없이 둘째아들이 외국에 가서 산다고 하니 어머니 마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IMF때 다니던 은행이 없어져 졸지에 실업자가 된 아들을 보며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 ‘살면 다 살아진다. 는 말씀에 내 나라에서는 살 수 없어 택한 타국 행. 이제 좀 살만해져 어머니 모시고 아름다운 캐나다 산천 구경시켜 드리고, 고생했던 지난 일 얘기해 보고 싶건 만, 이제는 꿈속에서나 기약해 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 뵈러 갈 날 차츰 가까워져 오니, 만나서 회포를 나눌 꿈이 소박하다. 기다리세요. 어머니. 언젠가 다시 뵈면 20여년 타국살이 희로애락 다 들려 드릴게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큰형님과 누나 함께 잘 계시죠? 아버지도 무탈하시고요? 한 세상 사느라 욕 봤으니 거기 가면 이제 좀 쉬어야겠어요. 저 세상 이야기 날밤 새우며 들려주실 어머니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벌써 기다려집니다. (2024년 7월 2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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