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동씨 움직이는 가족상점> - 4화
- 4화 -
밖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소현아, 아빠가 오셨었나 봐.”
아직 6시도 안 됐는데?
9시에 오시기로 한 아빠가 6시도 안 됐는데 벌써 오셨나 보다.
나는 당황하며 벽시계를 보고,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오징어랑 콩나물, 두부가 담긴 장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때 핸드폰에 문자가 울렸다.
<아빠>
“아빠 내일 올게. 엄마랑 저녁 먹고 같이 자.”
아빠는 우리 몰래 장을 본 바구니만 놓고 가셨나 보다.
말 대신 작은 마음을 놓고 간 거처럼.
어쩌면 엄마가 집에 온다는 비밀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엄마 손을 꼭 잡고 잠들었다.
따뜻한 엄마의 품에서 잠들며 아빠가 놓고 간 장바구니 이야기를 나눴다.
“너희 아빠는 참. 아무 말 없다가 꼭 이런 엉뚱한 걸로 표현하려고 해.”
그리고 그날 이후, 엄마랑 아빠는 나를 사이에 두고 작은 마음들을 주고받았다.
나는 어느새 두 사람 사이를 잇는 작은 오작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말했던 ‘우리 집의 희망’이라는 뜻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거 같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엄마의 문자가 울렸다.
<엄마>
“아빠랑 먹어. 엄마가 치킨 사놓고 간다. 그리고 아빠한테 트럭 앞바퀴 못 박혔다고 펑크날 수 있다고 알려드려.”
치킨은 아빠의 최애 메뉴다.
난 피자가 더 좋은데... 요즘은 나보다 아빠를 더 챙기는 것 같다.
나는 엄마 문자를 보여 드렸고, 아빠는 바로 트럭으로 달려가셨다.
앞바퀴를 살피던 아빠는 곧바로 카센터로 가셨다.
예전 같으면 서로의 말에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짜증만 냈을 텐데, 이렇게 서로의 말에 반응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빠는 엄마가 요즘 어떤지 하루에도 몇 번씩 묻는다.
“엄마 아픈 대는 없고? 뭐 필요한 거 없대? 추운데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해. 맨날 춥다 춥다 하잖아.”
아빠는 핫팩 한 상자를 내 앞에 놓으셨다.
“이거 붙이는 거야. 특히 배랑 등에 한 장씩 딱 붙이면 하루 종일 따뜻해. 엄마 추운데 밖에서 일하시잖아. “
아빠는 엄마가 백화점 야외 매대에서 일하는 걸 이미 알고 계셨다.
나는 말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
엄마가 집에 와서 덕희 이모 대신 나를 봐주는 것도 알았고, 엄마가 준 통장도, 엄마가 일하는 곳도 모두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아무 말없이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나 보다.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늘 지켜만 보는 아빠 때문에 고구마 백만 개 먹은 기분일 때가 많다.
아빠의 말없는 이런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게 우리 아빠의, 조금 특별한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아빠는 트럭을 몰고 엄마가 일하는 백화점 앞을 지나셨다.
멀리 야외 매대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12월 초라 날씨가 추웠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엄마를 보며 아빠는 잠시 멈춰 섰다.
아빠는 엄마의 벌겋게 언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따뜻해진 핫팩 두 개를 꺼내서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이거... 아빠가 준거라고는 말하지 말고."
“알았어!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
이라고 말하며 아빠한테 윙크를 하자 아빠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추우니까 빨리 가서 엄마 줘. 그리고 엄마 곧 퇴근 시간이니까. 오늘은 엄마 집에서 자고 와.”
엄마랑 자고 오라는 말에 신이 난 나는 아빠를 격하게 포옹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달려가서 핫팩을 건넸다.
엄마는 내가 건넨 핫팩을 받으며 말없이 미소를 보이셨다.
엄마는 멀리 서 있는 아빠의 트럭을 보고 어색해하며 손을 흔드셨다.
잠시 동안, 엄마와 아빠가 아주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두 사람의 어색한 모습에 덩달아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으흐흐.”
근데 이 어색함이 왜 좋은지 모르겠다.
며칠 뒤 내가 기다리던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
대부분의 초등학생이 다 그렇겠지만, 크리스마스트리도 좋고 캐럴 송도 좋고, 반짝이는 조명도 좋다.
무엇보다 산타할아버지가 아닌걸 다 알고 있지만, 산타선물을 받는 게 제일 좋다.
올해는 어떤 선물을 받게 될지 너무 기대가 된다.
크리스마스이브날 아침 무슨 선물일 있을까 하는 기대로 눈을 떴다.
아쉽게도 기대했던 선물은 없었다.
“아빠! 뭐야! 진짜!” 하며 마당으로 나가는데.
이동 트럭의 글씨가 ‘백이동씨 움직이는 상점’에서 ‘백이동씨 움직이는 가족상점'이라는 글씨로 바꿔 쓰는 모습을 보았다.
아빠는 트럭에 ‘가족’이라는 단어를 천천히 써넣고 계셨다.
가족이라는 글자를 쓰는 아빠의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페인트 칠에 집중한 아빠는 아무 말도 안 하셨지만, 운전석엔 또 엄마를 위한 핫팩이 놓여 있었다.
페인트칠을 끝내고 아빠는 나를 태우고 백화점 앞으로 갔다.
백화점 앞에는 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트리와 따뜻한 캐럴송이 흐르고 있었다.
엄마는 일을 하다가 아빠의 트럭을 보고 잠깐 시선을 멈추셨다.
아빠는 어색하게 엄마 주변을 맴돌다가 직접 엄마 손에 핫팩을 쥐어 주었다.
오작교인 나를 통하지 않고 엄마와 아빠가 직접 선물을 주고받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빠는 뭐라고 말을 할지 몰라서 입만 달싹거렸다.
아무 말도 안 하셨지만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와 엄마의 마음이 통한 건지 엄마는 아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셨다.
아빠는 엄마가 잡은 손은 보며 얼굴이 붉어졌다.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이 붉어진 아빠의 얼굴을 더 붉게 비추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깨고 싶어서 한마디를 던졌다.
"아빠 얼굴! 조심해. 그러다가 터지겠어."
아빠는 내 말에 하하하 웃으셨고, 엄마도 같이 웃었다.
크리스마스날, 엄마는 처음으로 백이동씨 이동 트럭에 함께 올라탔다.
시골마을로 가는 트럭 안에는 예전보다 환한 웃음이 가득 흘렀다.
마을에 도착하자 이장님은 처음 본 엄마지만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이장님 댁 마당에 아빠가 노래할 수 있는 작은 무대를 만들어주셨다.
아빠는 엄마를 위해 <동백 아가씨>를 불러주었다.
어느 때보다 아빠의 노랫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엄마의 눈가도 금세 그렁그렁해졌다.
노래가 끝나자 엄마는 조심스레 아빠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애썼어요.”
엄마의 말에 아빠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엄마는 아빠를 안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노래 부를 때가 제일 빛나요."
그 말을 들은 아빠는 한참 동안 엄마 품에서 울었다.
아빠가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마치 오래 참고 있던 마음이 터져 나온 것처럼.
크리스마스 이후, 백화점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빠와 나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엄마와 아빠가 함께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멀리서 서로를 바로 보는 눈빛이 함께 살던 때보다 더 따뜻해 보인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더 멀어지지 않기 위해 끈끈해질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 가족이 좋다.
엄마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베란다 화단에 작은 동백꽃나무를 심으셨다.
“봄이면 꽃이 필 거야.”
아빠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봄이 되면 붉은 동백꽃이 필 거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날 우리의 봄도 상상해 본다.
우리 가족은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조금씩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 길 위에 내가 작은 다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아마 올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은 우리에게 운명처럼 나타난 '가족상점'인지도 모르겠다.
산타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