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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맘의 가족동화

<백이동씨 움직이는 가족상점> - 2화

by 글쓰는 맘

-2화-


그날, 엄마가 집을 떠나던 날.

나도 가방을 싸서 엄마를 따라 집을 나섰다.


“나도 엄마 따라갈래. 아빠 무서워.”


엄마는 나를 꼭 끌어안으시며 말했다.

“엄마가 소현이한테 연락할 게. 아빠 옆에 있어. 아빠와 엄마에게 유일한 희망은 우리 소현이 뿐이야. 알지?”


그리고 엄마는 내 손에 통장을 쥐여주며 말을 이으셨다.

“엄마가 매달 생활비를 여기에 보낼게.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


나는 통장을 받지 않았다.

통장을 받으면 엄마가 나를 정말 이곳에 남겨두고 떠나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 소현이 이제 엄마 말 잘 들을게요. 나도 데려가주세요. 제발요."


엄마도 눈물을 흘리셨고 우는 나를 달래주셨다.

나는 엄마의 다리를 꽉 붙잡고 따라가겠다고 엉엉 울었다.


“엄마, 나. 나. 너무 무서워...”


그때는 아빠라는 존재가 나에게 너무 무서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엄마가 나만 두고 떠나려 했다.

엄마에 대한 배신감이 들려는 순간.

그런 내 마음을 알았던 건지 내 눈을 마주 보며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고 다정한 말투로.


"우리 소현이, 잘할 수 있어. 우리 집 희망은 소현이야. 그것만 잊지 마."


엄마의 그렁거리는 눈과는 다르게 단호한 표정과 행동으로 다리를 꽉 붙들고 있는 나를 때어 놓으셨다.

엄마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시고, 괜찮다고 미소를 지으셨다.

그때 난 엄마가 말해주신 ‘우리 집 희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나를 때어놓으려는 엄마의 변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난 아빠와 단둘이 집에 남겨질 생각에 무섭고 두려울 뿐이었다.

덜덜 떨고 있는 내 손에 엄마는 다시 통장을 쥐어 주셨다.


“이건 소현이와 엄마의 비밀이야. 알지?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


평소에 내가 자주 쓰던 말이다. ‘이건 엄마랑 나랑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어떻게든 날 설득하려는 엄마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비밀 따윈 필요 없다.

통장이 들린 손을 바들바들 떠는 날 본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아빠는 우리 소현이 정말 사랑해. 엄마는 알아. 아빠 옆에는 네가 있어야 해.”


엄마가 했던 '아빠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는 말을 믿어서 집에 남기로 한 건 아니다.

그날 엄마가 해준 말 중에 “감정쓰레기통”이라는 말이 내 발을 멈추게 했다.


“엄마는 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위해 기꺼이 감정쓰레기통이 돼줄 수 있어. 하지만...”


엄마의 입술이 떨렸다.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미소를 지으셨다.


"근데 그 통이 이제 꽉 찼나 봐. 소현아. 엄마 그릇이 너무 작아서 미안해. 엄마가 이것밖에 못돼서 정말 미안해."


엄마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참았고. 답답한지 가슴을 움켜잡으셨다.


“우리 소현이 똑똑하니까. 엄마 말 이해 할 수 있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통이 꽉 찼다’는 말은 내 발을 멈추게 했고. 더 이상 엄마에게 매달릴 수 없었다.

엄마가 주고 간 통장 안에는 카드가 들어 있었고, 거기엔 돈을 찾는 방법과 통장 정리하는 법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매달 70만 원씩 그 통장으로 생활비가 들어왔다.

덕희 이모가 그러는데 그 돈은 엄마가 백화점 야외 매대에서 판매로 번 돈이라고 한다.

엄마는 이혼을 하고 백화점 야외매대 판매 일이라는 걸 시작했다고 한다.

‘매대판매’가 뭔지 모르지만, 아마도 통장으로 돈을 보내기 위해 일을 시작하신 거 같았다.




아빠의 '이동 상점'을 처음 탔던 날,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

특히 생필품이 가득한 트럭 짐칸만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했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어른들의 말이. 왠지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트럭에 올라타자, 과자 냄새와 <동백 아가씨> 노래가 나를 반겼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거 완전 백이동씨 움직이는 상점이네!"


평소에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이 떠올라, 신이 나서 외쳤다.

아빠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든다며 트럭 이름을 “이동 상점”에서 “백이동씨 움직이는 상점”으로 바꾸고, 새롭게 페인트 칠을 하셨다.


아빠의 트럭은 깊은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판다.

그리고 난 학교 수업이 없는 날, 아빠의 트럭을 함께 타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닌다.

나는 아빠와 함께하는 움직이는 상점을 몰고 다니는 날이 너무 좋다.


어느 날을 한 이장님 댁에서 하루 자고 왔는데, 아빠가 이장님과 막걸리 한잔을 하고 <동백 아가씨>를 슬프게 부르셨다.

이장님은 아빠의 노래를 너무 좋아하셨고, 이장님 댁에 계신 할머니는 앵콜을 외치며 박수를 치셨다.


“우리 마을에 서울백씨 안 오면 어쩔뻔했어. 물건도 가져다주지 노래도 들려주지. 아주 우리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야."


이장님 댁 할머니는 아빠를 '서울백씨'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아빠는 서울백씨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아빠는 할머니의 칭찬에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졌다.

옆에 계시던 이장님은 아빠에게 막걸리를 한잔 더 따라주시며.


"우리 서울백씨가 아주 가수 뺨쳐. 한 곡 더 불러봐. 앵콜이야 앵콜!”


아빠는 쑥스러운 얼굴로 앵콜에 답하며 <쨍하고 해뜰날>을 부르셨다.

할머니는 아빠의 노래에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아빠의 트럭이 마을에 들어서면 어르신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그리고 그 미소는 마을 곳곳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난 드디어, 우리 아빠의 멋진 능력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어르신들에게 늘 친절했고 잘 웃어주었다.

마을 어르신들을 요즘 서울백씨같이 인심 좋은 젊은이가 없다며 아빠를 좋아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빠를 젊은이라고 부르는 건 어색하지만.

이 마을에 들어서면 아빠는 정말 해맑은 꼬마가 된다.


그동안 아빠를 잘 몰랐던 시간이 미안해졌다.

그리고 무섭다고 생각하며 피하려고 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부끄러웠다.

예전엔 아빠랑 단둘이 있는 게 어색했지만, 요즘은 내가 먼저 트럭 문을 열며 묻는다.

“오늘은 어떤 마을, 어느 할머니 댁에 가요?”


그리고 오늘도 우리 아빠, 서울백씨는.

아빠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만나기 위해 트럭을 몰고 길을 나선다.




어느 날,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트럭 안에서 나는 <동백 아가씨>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나도 제법 노래 가사를 끝까지 따라서 부른다.

그러다가 아빠가 툭 내뱉은 말에 순간 멍해졌다.


“내가 무능력했지... 지금 생각하니 네 엄마한테 미안해.”


아빠 입에서 나오는 무능력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뭔가 이제는 아빠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아빠의 표정을 보니, 진짜로 엄마한테 많이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아빠는 말없이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 쪽팔렸어."


아빠의 표정에 생각이 많아 보였다.

어른들이 쓰는 단어가 낯설었지만, 아빠의 마음이 조금 느껴졌다.

무슨 말을 더 할 것만 같은 아빠의 입은 잠시동안 조용했다.

나는 아빠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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