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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버틴 육아, 꿈으로 나아가며

생각의 변화 - 요즘친구들에게 배운다.

by 글쓰는 맘
요즘친구들에게 시대의 변화를 배운다.


마흔이 넘고, 50을 앞두게 되었다.

보통 나처럼 아이 둘, 셋을 키우며 육아에 전념하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15~20년이 훅 지나있다.

아이들만 보다 보니 세상의 변화에 둔해지고,

생각의 흐름도 멈춰버린다.


어느새 ‘나’라는 존재조차 희미해진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는데,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해가야 할지 막막하다.


내 아이들에게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라고 말로 하지만.

'막상 나는 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을까?'


육아를 하다 보면.

삶을 대하고 있는 나의 태도를 뒤돌아 보게 된다.


아이들은 '말'을 듣는 것보다 '삶'을 본다.

어른들은 이렇게 하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말’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삶’을 따라 배운다.


가르침보다 강한 건 ‘배움’이다.

억지로 주입하려는 말보다,

자신이 스스로 감동한 경험에서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그건 어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감동을 받고 끌리는 주제에 영향을 받지.

누군가의 '가르침''잔소리'로 들릴 때가 많다.



요즘 친구들을 보면,

우리 세대보다 훨씬 유연하다.

가르치려 들기보다 배우려는 자세가 익숙해 보인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데에도 솔직하고 담백하다.

재취업을 준비하며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런 젊은 친구들의 유연한 태도를 배우고 있다.


우리는 흔히 경험을 근거로 젊은이들에게 충고한다.

“그건 내가 해봐서 알아.”

“내가 다 해봤어. 하지 마.”

어른들의 그 마음은 걱정이고, 사랑이지만

젊은이에게는 부담이자 간섭이 될 수 있다.

충고가 ‘강요’로 느껴지는 순간,

진심은 불편함으로 바뀐다.


지금은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리고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다.

누구의 과거 경험이 완전한 ‘정답’ 일 수 없다.

그래서 그러한 강요를 ‘꼰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나간 세대는 보통 꼰대가 되는 것 같다.

오십을 앞둔 나 역시 누군가에겐 “꼰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꼰대”라는 말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어른들의 말을 곰곰이 듣다 보면.

우리가 겪지 못한 과거가 숨어 있다.

그 안에 한두 개쯤은

미래를 살아갈 힌트가 들어 있다.

물론, 강요는 걸러서 들어야 한다.

잘 걸러서 듣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예전엔 꼰대라는 말이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였지만,

요즘은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빠른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보기도 한다.

'현재를 지키려는 어른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맙기도 하다.


지금 나는 젊은 세대의 “유연함”을 배우는 중이다.

불편한 말 앞에서도

내 입장을 유연하게 말하는 게 아직 어렵다.




오래된 책이지만, 『90년생이 온다』를 처음 읽었을 때, 99학번인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생각, 말투, 가치관이 너무 달라서 놀랐다.

그런데 이제는 00년생이 20대가 돼서 사회에 나오는 시대.

변화는 더 빠르고, 더 복잡하다.


재취업을 준비하며

가장 크게 느낀 건 “취업난”이다.

고학력 고스펙을 갖고도 백수이거나.

일용직 배달을 하는 친구들도 많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자리에 있거나 자기의 목표를 갖고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믿는다. “

이건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은.

"젊음과 열정으로 싸워야 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지금 내가 그런 말을 하기에 사회가 너무 안쓰럽게 변한 거 같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너희들이 알아서 헤쳐나가라.' 하기엔,

뭔가 망쳐놓은 결과지를 떠넘기는 듯한 미안함이 들기도 한다.


나중에 커서 사회에 나갈 내 아이들을 보면.

청년실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친구들이 일자리 찾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50을 바라보는 나 역시 “제2의 직업”을 찾고 있다.


함께 뛰어보자! 서로 응원하며!!

대학원 입학원서를 준비하기 위해.

졸업증명서를 출력하러 동사무소에 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친구가 졸업증명서를 주었다.

90년대 후반에 태어났을 법한 젊은 친구가 졸업증명서를 건네주는데.

'99학번. 헐!'이라는 감정 지문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애가 좀 더 크면 외벌이인 남편 벌이에 좀 보태려고 자격증 따고 있어요.'

라고 마음속으로 혼자 변명을 하고 있었다.


창피함에 급하게 동사무소를 빠져나왔지만.

간절한 내 눈빛을 그 젊은 친구가 읽었으면 좋겠다.


마흔이 넘은 아줌마가 재취업을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젊은 친구들의 눈에 어떨지 궁금하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안타까운 시대인 거 같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누가 더 잘살고 못살고 가 아니라,

다들 간신히 버티는 시대.

‘몇 살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기준도 희미해졌다.


나 역시 마흔이 넘어서

자격증을 위해 대학원을 준비하게 될 줄 몰랐다.


다들 살기 어려운 시대.

이젠 내가 만든 나의 기준으로 살면 되는 것 같다.


각자 자신만의 이유로 버티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누군가에겐 젊음이.

누군가에겐 경험이.

누군가에겐 절실함이 '삶의 무기'가 된다.


이제는 나도 누군가의 잣대가 아닌

내가 만든 기준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게 내가 내 삶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잠시 빌리자면...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글을 이렇게 쉽게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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