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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Oct 30. 2024

7. 요선암에서 만난 그들

단종을 위한 도원결의

              요선암에서 만난 그들     


 나는 그해 늦가을 시사철에 웬일인지 그냥 그곳에 가고 싶었다. 객지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고향의 시사에 참석이 어려워 휴일을 맞아 영월 서강변에 있는 한반도 지형을 닮아 이름난 그곳으로 갔다. 그 장소를 방문하고 나룻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서 영월로 무작정 걸어가는데 그 길이 단종의 유배길이라는 걸 안내간판을 보고 알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유배길을 계속 걸어서 배일치에 도착하였다. 그곳 쉼터에는 단종이 서쪽 하늘을 보고 절을 하는 조각상이 있어 무슨 인연이 있다고 직감하였다. 그 후로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에 관심이 새로 생겼고 단종의 충신들에 대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세월이 제법 흐른 어느 날 함께 퇴직한 직장 동료인 권처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처사, 우리 오랜만에 제천에서 만나 영월이랑 봉화 쪽을 한번 구경해 보면 어떨까. 자네는 열차로 올라와 제천역에서 만나서 내차로 볼만한 곳을 한번 돌아보자고.”

 “아이구,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안 그래도 영월에 한번 가고 싶었는데 차편을 제공해 준다니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만나서 곡차도 한잔하면서 회포도 풀고 말일세.”하고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권처사와 제천역에서 만나 영월로 넘어가는 수주면에 이르러니 그가 가는 길에 유명한 계곡과 기이한 암반이 있는데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곳이 첫길이라 그의 안내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권처사는 불자이기에 유명한 절을 잘 찾아다니기에 먼저 법흥사를 다녀오자고 하여 적멸보궁인 그곳을 처음으로 순례하는 행운을 잡았다. 내려오는 길에 치악산 무릉계곡을 들렀고 그곳에는 기이한 형태의 암반이 계곡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의 선경이었다. 권처사가 그곳을 설명하였다.

 “이곳이 유명한 요선암이라는 곳이네. 자네는 처음인가 본데 나는 법흥사를 오갈 때면 항상 이곳에서 쉬어 간다네. 요 바로 위에 요선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시인묵객들의 시를 적은 현판이 있다네.”

 “오우, 우리 권처사가 불자이면서도 유학에 관심이 많아 법흥사도 보여주고 요선암도 데려다 주는구만. 아마 집안에 할머니 되시는 분이 유명한 스님이시고 또 선조는 그 유명한 유학자이신 충재선생이 아니시던가.”하고 권처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을 다녀온 후에 이상하게도 앞서 다녀온 배일치와 함께 계속해서 나를 꿈속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닌가. 나는 배일치에서 단종이 저무는 해를 보고 절하는 모습을 잊지 못하였고 요선암에서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일어나곤 하였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처음 보는 노인이 말을 건넨다.

 “그대는 어이하여 내가 있는 주천강변을 찾으셨는가. 아마 고향이 저 남부지방인 걸로 아는데 영월을 이다지도 그리워하고 자주 찾는단 말인가. 분명 무슨 인연이 있을 것이라고 보이네.”

 “아, 저는 고향이 남부지방인데 어찌 잘 알아맞히시는가요. 어르신께서는 이곳 영월이 고향이신가 보군요.”

 “허허, 나는 원주가 고향이고 이곳으로 와서 노후를 보내고 있소. 그것도 날마다 그리운 님을 위하여 시를 읊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소. 내가 몇 년 전에 그대가 마른안주와 막걸리를 차려놓고 내가 있는 쪽으로 절을 하기에 이상하다고 느꼈었소. 아마 그때가 시사철인가 그랬을 것이오.”

 “어르신께서 어찌 몇 년 전의 일을 잘 기억하시는군요. 그것도 시사철에 절을 한 것을 알고 계시니 정말 신기하기도 합니다.”

 “다 그게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알게 되는 것이요. 아마 조상들 중 어느 분이 이곳 영월과 연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오.”하고 그 노인은 사라지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그 노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궁금하여 곰곰이 추측을 해보았다. 내가 시사철에서 절을 올린 방향이 서강변 쪽이었고, 그 노인이 원주에서 왔다고 하니 관란 원호선생이 맞을 것이라고 짐작해 보았다. 원호선생은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즉시 성균관 직제학을 사직하고 원주로 낙향하였다. 그의 성품은 강직하여 후일 세조가 큰 벼슬로 회유하여도 꿈적을 않고 두문불출하였으며,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주천강변에 움막을 지어 흘러가는 물결에 연모의 마음을 실어 보냈다. 그가 한 행위는 고려말 원천석 선생의 기개와 너무 닮았다. 그의 사사 제자인 태종 이방원이 그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국정에 도움을 청했으나 태종을 피해서 숨어버려 만나주지를 않았었다.


 이와 같이 나의 첫 번째 의문은 풀렸고, 그 이후로 다음번에는 단종의 유배길을 돌아보고 원호선생이 은거한 관란정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친구인 권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조처사, 내가 드디어 고향으로 낙향을 하였다네. 항상 그리던 나의 고향 춘양에 노후를 맡기기로 어려운 결단을 내려 참새골에 조그만 전원주택을 지어 살고 있네. 언제 시간이 나면 이곳으로 와서 나의 귀농일기를 들어가면서 곡차를 한잔 하세나.”

 “드디어, 권처사가 말이 아닌 실질적으로 처사가 되었구만. 이번에 가면 한번 가보기로 한 충재선생의 사당도 보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나.”하고 둘이는 조만간에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어느 해 늦가을 나는 동해선 열차를 타고 춘양역에 내려 그의 전원주택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움에 곡차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간의 안부를 묻고 나서 새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가 먼저 최근에 일어난 꿈 속에서 만난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권처사, 내가 몇 년 전에 꿈속에서 생육신이신 원호선생을 만났다네. 직장 생활 때 시사철에 고향에 못 가고 영월 한반도 지형을 닮은 곳을 찾아 절을 올린 적이 있었지. 그 노인이 꿈속에서 나보고 왜 자기를 향해 절을 하느냐고 묻고 나서, 자신은 원주에서 내려와 서강변에 움막을 지어 단종임금을 기리고 있다고 하더라구.”

 “어 그 참, 신기하네. 조처사가 예전부터 영월에 대해 관심도 많고 생육신이신 어계 조여선생의 후손이 아니던가. 아마 단종을 흠모하고 영월을 찾다 보니 원호선생의 현신이 나타나신 것으로 보여지네. 밤꿈도 꿈이요 낮 꿈도 꿈이 아니던가. 아마 서로 감응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일세.”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언제 한번 관란정을 찾아갈까 하네. 내가 직장 시절에 영월을 많이 오갔지만 그곳에는 찾아가기가 힘들어 못 가보았다네.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가도 좋고, 너무 자네에게 신세를 지게 하는 것 같아 그냥 한번 해본 말이네.”

 “관란정이 서강변에 있다는 말이제. 몇 년 전 제천에서 만나 요선암을 보고 영월로 오는 도중에 한번 들릴 수 도 있었는데, 그때는 위치를 잘 몰랐단 말이군. 다음번에 꼭 같이 한번 가보세나.”하고 두 사람은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권처사의 차를 이용하여 충재공 권벌이 학문을 가르치던 암정과 석천계곡을 들러보고, 태백산 자락의 축서사를 순례하였다. 나와 권처사는 상통하는 점이 많으니 그것은 선비정신과 불교에 관한 것이다. 아마 전생에서 이어져온 인연인지 만나면 항상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권처사가 나를 영주역까지 바래다 주기로 하여 가는 길목에 있는 도촌면에 있는 공북헌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공북헌은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장인의 고향인 도촌으로 내려와 은거한 도촌 이수형 선생의 자취가 배어 있는 곳이다. 그곳으로 가자고 하니 권처사가 나에게 묻는다.

 “조처사는 어떻게 도촌 이수형 선생의 사적지를 찾아가려고 하는가. 영월에만 관심이 많은 줄 알았는데 이곳 봉화까지 발길을 뻗어 보려고 하는구만.”

 “나는 권처사와 제천에서 만나 영월 장릉에서 하룻밤을 자고 김삿갓 계곡을 다녀왔었제. 우구치를 넘어 내려오는 길에 순흥 소수서원을 들러고 난 뒤부터 영남의 선비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었제.”  

 “아이구, 조처사는 김삿갓처럼 전국을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더니만 선비정신에 꽂히셨군. 나도 그때 소수서원의 경자바위를 보았고, 금성대군의 위리안치 유배소를 보고 하여 선비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었제. 단위복위운동의 실패로 수많은 선비와 양민들이 죽계제월교 밑에서 죽임을 당했고, 그때 흐른 피가 끝난 지점이 피끝마을이라고 도로변에 적혀있데.”하고 권처사와 승용차 안에서 나눈 이야기이다.


 이윽고 도촌리의 이수형 선생의 사당에 도착하였다. 때는 늦가을이라 낙화암천을 따라가는 도로변에는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사당 담벼락에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우리들을 맞이하여 주었다. 사당에 들러 예를 올린 뒤 바로 옆에 있는 공북헌으로 들어갔다. 표지판에는 이수형 선생의 일대기와 공북헌을 지은 배경에 대해 적혀있었다. 공북헌은 방의 네면 중 세면을 막고 북쪽의 한면만 남겨 놓은 특이한 구조로 오로지 단종이 계신 북쪽 영월을 가리킨다고 해설해 놓았다. 공북헌이라는 이름은 이수형 선생의 충절에 감동한 창설공 권두경이 이름을 붙였다고 적혀있었다. 나는 권처사에게 먼저 마을 걸어 보았다.

 “이곳이 도촌리라고 하는데 이수형 선생이 마을 이름을 자기의 호로 사용한 모양이네. 그리고 공북헌의 방 구조가 특이한데 은둔을 한 이수형 선생의 충절이 배여 나오네 그려. 이름을 지은 분이 권두경 선생이라고 하는데 권처사의 가문이 맞는가.”

 “나도 창설공 권두경이라고 적혀 있기에 처음 알았네. 아마 충재공파로 우리 집안과 멀리서 통하는 것으로 보이네. 안동은 말할 것도 없고 영주나 봉화에도 우리 종씨들이 많이 퍼져있제.”

 “맞아, 영주를 보고 선비의 고장이라고 하던데, 인근에 있는 봉화 역시 그 못지않은 곳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권처사는 가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엄숙하고 예스런 것을 좋아하데.”

 “하하, 조씨나 권씨나 선비가문이 아니던가. 안동에 있는 퇴계선생의 진성이씨 가문도 마찬가지이고, 하회마을의 류성룡 선생도 있지를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선비라고 으시대고 무게는 별로 잡은 것이 없는데 살짝 비꼬는 것 같구만.”하고 권처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이수형 선생의 사적지를 둘러보았다.


 세월이 몇 년이나 흘러갔고 인생의 마지막 탐방이라 생각하고 그해 여름철에 직접 차를 몰아 단종의 유배행렬을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먼저 월악산 미륵리에서 일박을 하고 충주 탄금대를 돌아보고 여주 이포나루로 향했다. 이포나루는 단종이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육로로 가기 위해서 내린 장소이다. 원주 인터체인지에 올려 치악산 터널을 겹겹이 통과하여 신림인터체인지로 빠져나왔다. 황둔을 거쳐 수주면의 갈림길에서 무릉계곡이라고 표시된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내가 먼저 가고자 하는 장소는 삼공제명석이 있는 수주면이다. 그 사적지는 원호와 조여, 이수형 삼공이 단종을 잘 시봉하자고 도원결의를 하고 세운 비석이 있는 곳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기에 수주면에 도착하면 탐문하면서 찾아갈 계획이었다.


 무릉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저 멀리 선경이 펼쳐지니 언젠가 한번 본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속도를 줄여 천천히 접근하니 오래전 권처사와 법흥사를 다녀오면서 들런 요선암이 아니던가. 삼공제명석을 찾아가는 길에 요선암을 우연히 만날 줄이야 정말로 반가웠다. 차를 세워 요선암을 들러 권처사와의 추억을 되새겨 보았다. 다시 삼공제명석을 찾기 위해 법흥사 가는 갈림길에서 망설이자 모현사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누구를 모신 사당인가 궁금하여 그곳을 찾아가니 놀랍게도 원호선생의 사당이 아닌가. 그곳을 관리하는 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여기가 원호 선생을 모신 모현사라는 사당이군요. 저는 지금 삼공제명석을 찾아가는 길인데 어디로 가야 하는가요.”

 “선생님은 그곳을 왜 찾아가시는지요. 주로 그 후손들이 한 번씩 찾고 발길이 뜸한 곳인데요.”

 “저는 어계 조여 선생의 후손 되는데 영월로 가는 길에 그곳을 한번 들릴까 하고 이리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저도 원호 선생의 후손으로 여기가 고향이어서 낙향하여 사당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삼공제명석은 요선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국도변에 있습니다.”하고 원주 원씨 종손과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또다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래 전에 권처사하고 법흥사 다녀오는 길에 들런 요선암 도로변에 삼공제명석이 있었다니 말이다. 그때는 단지 경치가 참 좋은 곳이구나 하고 지나친 곳이 아니던가. 원호선생과 꿈에 만난 이래로 자꾸 신기한 상황으로 끌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요선암 위의 요선정에 들려 잠깐 생각에 잠겨 본다. 그때 눈앞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를 않은가.

 “여기가 요선정이고 저 아래가 요선암이로군. 무릉도원이 경치가 좋다고 하더니만 소문 그대로이군. 여기 현판에 시인묵객들의 시가 많이 써져 있구만.”하고 조여는 혼잣말로 한다. 조금 있으니 또 한명의 선비가 정자에 올라 한마디를 한다.

 “아, 기이한 바위로구나. 치악산에서 유명한 무릉도원경이로다. 세상이 평안하고 마음이 즐거우면 시를 한수 남기고 싶지만 그렇지를 못하는구나. 그리운 단종임금이시여, 어이하여 머나먼 이곳으로 오셨소.”하고 어느 선비가 혼잣말을 하는 것을 엿듣고 조여는 심상치 않아 묻는다.

 “선비께서는 어디서 오신 누구신가요. 단종임금을 그리워하니 저의 마음과 같아 여쭈어 봅니다. 저는 함안에서 올라온 조여라고 합니다.”

 “아, 함안이라. 멀리서 이곳까지 오셨군요. 저는 봉화 도촌에 일시 터를 잡고 사는 이수형이라고 합니다. 어인 일로 먼 길을 오셨는가요.”

 “저는 단종임금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성균관에 사직서를 내고 낙향을 하였었지요. 어찌 녹을 받은 임금 대신 새 임금을 모실 수 있겠는가요. 불사이군이 선비의 신조가 아니겠는가요.”

 “아이구, 조선비께서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계시군요. 저도 관직을 버리고 장인의 고향인 봉화로 내려왔었지요. 새 임금이 가지 말고 도와달라는 부탁도 듣지 않고 도망치듯 내려왔답니다.”하고 조여와 이수형은 우연히 만나 불사이군의 뜻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의기투합함에 감동하여 요선정 아래 삼거리에 있는 주막으로 옮겨 탁배기를 한잔씩 돌리는데 주모가 듣고 있다가 한마디 한다.

 “두 분의 선비께서는 단종임금의 유배지에 먼 길을 찾아오셨군요. 안 그래도 바로 이 동네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선비분이 계시는데요. 성함이 원호라고 하더구만요.”

 “주모, 그 말이 사실인 게요. 원호선생이라면 직제학까지 오른 대신이 아닌가요. 저도 고향인 원주로 낙향하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바로 이곳에 계신다니 정말로 신기합니다.”하고 조여가 말한다.

 “원호선생은 지조가 대쪽 같다고 소문이 자자하시던 분이 아니시던가요. 선조 중에 원천석 선생이 계시고 그분 또한 불사이군의 신조에 따라 낙향하신 분이 아니시던가요. 오늘은 참으로 하늘이 뜻을 같이하는 분들의 만남을 주선해 주셨다고 봅니다.”하고 이수형이 말을 한다. 조금 있으니 주모가 기별을 하여 원호선생이 합석하였다.

 “오우, 두 분께서 단종임금을 알현하러 멀리서 오셨구만요. 임금님은 청령포 배소에 계시기에 엄흥도 호장 하고 같이 한 번씩 알현하고 있습니다. 관의 감시가 엄중하여 자주 드나들면 오히려 해가 될까 봐 나의 마음을 전하고만 있지요.”하고 원호가 말을 한다. 이렇게 하여 세분이 뜻을 같이하여 단종임금을 연모하며 변함없는 충절로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모시자고 결의를 한다. 이게 도원결의이며 그들의 뜻을 모아 길가의 바위에 그런 뜻의 글을 새겼으니 바로 삼공제명석이다. 나는 잠시잠깐 요선정에서 꿈을 꾼 모양이다.


 나는 국도변 넓은 터에 새로 단장한 흑운모 대리석에 새겨진 삼공제명석의 글을 보고 충신들의 마음을 읽었다. 근래에 도로확장 공사로 오래되고 먼지에 뒤덮인 비석을 새로 제작하여 세운 것이다. 나는 다시 차를 몰고 군등치를 넘어 원호선생이 일가들이 모여사는 서강변 장곡리에 세운 관란정을 찾아갔다.

 원호는 수주면 요선암 인근의 일가집에서 다시 영월과 더 가까운 장곡리 원씨 집성촌에 머물며 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움막을 짓고 관란정이라 이름 붙여 하루종일 거기에서 살다시피 했다. 서강의 회돌이가 너무 심해 어렵게 관란정을 찾았다. 장곡마을 뒷산을 오르니 관란정이라는 간판인 달린 정자가 나타났다. 그 안내판에는 원호의 대표적인 시가 적혀있었다.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여라.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물이 거슬러 흐르라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라고 애달픈 시이다. 나는 그곳에서 건너편 한반도지형을 바라본다. 십여 년 전 시사철에 그곳에서 이쪽 관란정을 보고 절을 하지 않았던가. 강물이 단절시켰지만 눈으로 마음으로는 건너가 인사를 할 수 있는 거리이다. 원호도 저 아래 청령포에 있던 단종에게 물결에 마음을 실어 보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차를 몰아 배일치로 향했다. 그 길은 단종의 유배길로서 십여 년 전에 내가 명라곡에서 그곳까지 걸었던 길이다. 지금은 배일치 터널이 생겨 고개 밑으로 차들이 지나가지만, 나는 옛길을 따라갔다. 때는 해가 긴 여름인데도 서산으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쉼터에는 예전 그대로 단종이 지는 해를 보고 절하는 조각상이 그날도 울고 있었다. 나는 단종임금을 일으켜 세우려 하니 끄떡도 않는다. 북받치는 설움을 견디다 못해 함께 울고 말았다. 나는 그때 영월을 탐방한 기억을 되살려 한 권의 책을 만들어 권처사에게 보냈다.


 어느 날 권처사로부터 책을 잘 받았다는 전화가 왔다.

 “조처사가 영월과 단종의 충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묶어 책으로 만들었네 그려. 그 책 속에 권처사라고 하면서 나를 지칭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더구만. 언제 책을 만들 생각을 하였는지 대단하네 그려.”

 “내가 책을 만들게 된 것은 우연히 단종의 유배길을 걸어 보았고, 자네와 함께 처음으로 간 요선암에서 나의 선조인 조여 선생과 원호 선생, 이수형 선생이 도원결의를 하고 비석을 세웠다는 데 감동하여 책을 발간하기로 마음 먹었다네.”

 “나도 조처사가 단종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걸 보고 역사의 향기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다네. 자네처럼 책은 못 만들지만 선비정신을 지킨 충신들을 흠모하고 기리고 있다네.”하고 권처사와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권처사와 함께 이수형 선생의 공북헌을 찾아갔을 때까지 책을 만들려고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권처사에게 결례이기도 결과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먼저 떠벌이는 것을 싫어하는 나의 성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공북헌에서 느낀 이수형 선생의 성품은 너무 강직하다는 것이며, 그 분함을 철저한 은둔으로서 응징하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날 세조가 그를 불러 간절히 부탁한다.

 “영보, 그대가 마음을 돌려 관직으로 복귀해 주길 바라네. 내가 주변에 참다운 마음을 가진 인물이 없어 외롭기 그지없네. 우리가 어린 시절 함께 한 사이가 아니었나. 치세를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게나.”

 “마마, 저가 벼슬을 버린 뜻은 생명처럼 여겨온 불사이군의 신조에 따름이지 애증의 문제는 결코 아니옵니다. 선왕으로부터 녹을 받은 저가 어찌 다른 길로 갈 수 있겠나이까. 저는 조용히 낙향하여 자연 속에 묻혀 여생을 보낼까 하옵니다.”하고 이수형은 온건하게 세조의 간청을 거절한다. 이수형의 성품을 아는 세조는 아쉽지만 그의 길을 가도록 놓아주었다.


 은둔은 겉으로는 소극적이고 방임으로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자신의 신조를 지키려는 성찰이며 참회의 방식이다. 체제에 대한 무언의 반항이자 세태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그것의 위력은 무력보다 강하며 권력보다 무섭다. 붓이 칼을 이기고 물이 바위를 깨뜨리듯이 은둔은 항거이며 승리이다. 이수형 그는 철저한 은둔으로 체제에 항거한 무언의 투사이며, 유학에서 생명처럼 여기는 절의를 지킨 충의지사이다. 그는 한양을 떠난 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고향을 찾지를 않았고, 오직 단종이 잠들어 있는 영월 쪽을 향해 절하며 연모의 정을 보낸 불사이군을 실천한 선비이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인물인 조여 선생을 찾아가기로 한다. 그는 단종이 페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곧바로 향리인 함안으로 낙향을 한다. 향리 뒷산을 백이산과 숙제봉이라고 부르며 불사이군의 신조를 지켜나갔다. 영월에 유배된 단종임금을 알현하러 수차례를 오갔으며, 청령포를 건널 때 백호가 등에 태워 건네주었다는 설화가 영월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향리에는 서산서원을 세웠고, 영월 청령포 맞은편 언덕에는 생육신을 함께 모신 어계비원이 건립되었다. 조여는 후손들에게 일체의 벼슬에 나가지 말기를 당부하였으며 가훈도 백세청풍이라고 지었다. 그의 단종에 대한 충절을 표현한 구월등고시가 전해져 오고 있다. “복희헌원 어디 갔나 슬프기가 그지없네. 요순시절 못 만나서 마음이 아프구나. 침통하게 읊조릴 때 천지가 망망하고, 흠뻑 취해 노래하니 세월이 유유해라. 슬프다 이내 신세 어인 일로 괴로운가. 마음속 그리운 님 잊을 수가 없으라.”하고 아주 은유적인 충절의 시를 지었다. 조여의 향리인 함안 군북의 서산서원에는 생육신을 포함하여 도촌 이수형 선생도 배향되어 있다.  


 직장동료인 권처사는 남들이 선비기질을 타고났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항상 만나면 지금 세상에서는 잘 통하지 않은 고루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는데 이점이 나의 마음에 들어 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선조인 충재공 권벌 억울한 세명의 신하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삼신논구계’라는 상소로 역린을 건드려 함경도 땅으로 유배가 생을 마쳤다. 이러한 정신이 권처사에게 유전되어 입바른 소리를 하게 되고 세상이 혼탁하여 낙향하였다고 여겨진다.


 어느 해 직장 간부들이 연수하던 밤에 우연히 네 명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들은 직장 내에서도 만나면 부당한 회사 문제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 산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혼자서 지내기를 좋아하는 점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나이가 비슷하기에 터놓고 지내며 한 번씩 만나서 등산도 하고 술자리도 함께 하며 친해 보자는 도원결의가 아닌 주점결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권처사는 키도 크고 성격도 강직하여 우리 직장하고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보이데.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선비로써 한자리 하였을 터인데 말일세. 그냥 좋은 게 좋다 하고 넘어가면 될 텐데 좀처럼 타협을 안하데.”하고 평소 만만하게 지내던 조처사가 말을 먼저 꺼낸다.

 “허허, 이 친구가 또 시작을 하는군. 조처사는 인물평을 잘하고 역사적 인물에 갖다 붙이는 게 특기이더구만. 자네도 조선시대 태어났더라면 입바른 소리로 벼슬길을 내놓고 낙향하였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한 번씩 고사성어를 써가면서 상사들을 은근히 비꼬기도 하데.”하고 권처사가 막바로 응수한다.

 “권처사나 조처사나 선비가문 출신이니까 지금 보다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뜻을 바르게 펼칠 수 있었을 거라고 보이데. 참 어찌 그리 고지식하고 타협을 잘 안 하는지 존경스럽기도 어리석게도 보이데. 남들처럼 좀 살살거리면서 상사를 대하면 승진도 빨리 할 텐데 벼슬 보기를 돌 같이 하데.”하고 또 다른 조처사가 빈정대며 말을 한다.

 “하하, 조처사는 조광조 선생의 후손으로 조직 내에서 잘 화합을 못하고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데. 나는 높이 평가하는데 다른 직원들은 그렇지 않으니 좀 억울한 것 같기도 하데. 조처사도 상사에게 고분고분 안 하고 잘 다투더만 사돈 넘말하고 있네.”하고 권처사가 한양조씨 조처사에게  쏘면서 말한다.

 “아이구, 세분께서 직장 내에서 잘 어울려 다니더니만 허심탄회하게 재미있는 말을 하시네. 나도 세분의 강직하고 직언하는 성품이 마음에 들더라구. 이게 바로 뜻 맞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던가. 그런데 요새 말로 융통성이 부족하고 언행도 성균관 유생들처럼 공자왈 맹자왈 하듯이 예스럽더구만.”하고 울산이 고향인 풍채가 좋고 입심이 센 김처사가 말을 한다.

 “그러면 우리 네 명이 뜻이 통하고 취미가 비슷하니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면 어떨까. 너무 예의를 차리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으니 막 대하지는 말고 말을 터놓고 지내면 어떨까 생각하네.”하고 함안 조씨 조처사가 제안을 하여 그 이후 친한 관계를 유지하였었다.  


 직장을 퇴직하고 난 일년 후 서울 쪽에 사는 두 명의 친구인 권처사와 조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퇴직 후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회포도 풀 겸 밀양 표충사 근방에서 일박을 하자는 제안이 왔기에 만남이 이루어졌다. 세명은 밀양역에서 내가 차에 태워서 움직이기로 하였다. 그런데 불쑥 권처사가 무슨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이곳 밀양이 내 어머니 고향이고 외가가 있던 곳이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 손을 잡고 자주 왔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가보면 어떨까 제안하네. 그곳에 가면 유명한 정자도 있고 숲도 좋으니 잠깐 들렀다고 오면 어떨까. 조처사들.”하고 권처사가 두 명의 조처사에게 부탁을 한다.

 “아이구, 이곳 밀양이 권처사의 외가가 있는 곳이란 말이제. 어찌 어머니께서 춘양으로 멀리도 시집을 가셨네 그려. 외가는 항상 그리운 곳이니까, 내가 자네의 마음을 잘 알제.”하고 함안 조처사가 화답을 한다.


 이렇게 하여 세명은 밀양 부북면 퇴로리에 있는 외가가 있던 마을을 돌아보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삼은정을 둘러보았다. 그 三隱亭은 자연에 은둔하여 지낸다는 뜻 외에 다른 뜻도 있었다. 그들도 세명이니 마침 삼은정에 올라 낙향한 선비의 뜻을 새겨 보기도 하였다. 일행은 표충사 인근 숙소에 자리를 잡고 오랜만에 산채나물에 막걸리로 회포를 풀고, 다음날 아침 표충사를 들러보고 재약산을 올라봄으로써 산과 술과 뜻을 함께 하여 삼은을 실천하였었다.


 나는 삼은정을 들러보고 난 후 인간의 내면에 숨 쉬고 있는 그리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권처사가 외갓집을 잊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 오른 삼은정을 기억하다니,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애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또 그리움을 찾아가는 여정이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그리움이란 단어가 나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방랑과 은둔의 기질에 부채질을 하였었다. 그 이후로 나는 영월을 오가고 태백산을 오르며, 조령과 죽령을 넘고, 하늘재를 오가는 본격적인 역사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뒤돌아 보면 요선암에 올라서 도원결의를 한, 원호, 조여, 이수형공의 삼은과 어느점에서 깊은 연관성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숨을 隱은 운둔을 말하며 세태가 싫어서 싸우기보다는 깊이 숨어서 피해버리는 것이기에 권처사와 조처사에게는 확연히 들어맞는다. 나머지 두 명의 처사는 근황을 잘 모르지만 나름대로의 은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한양조씨 조처사와는 오래전 전화통화를 하였지만 만난 지는 오래되었다. 조광조 선생의 가문이라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은둔 중인가 생각해 본다. 오래전에 나는 조광조 선생이 직언이 화근이 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의 제자인 양산보가 세상과 담을 쌓고 은둔하며 살아간 담양 소쇄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울산 출신 김처사는 지리산 깊은 곳에 들어가 자연을 벗 삼아 은둔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었다. 그의 본관은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요선정에서 도원결의를 한 원호, 조여, 이수형 등 삼공은 어찌 보면 조선의 삼은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리라 본다. 은둔은 겉으로는 소극적으로 보이고 대립을 회피하는 행태로 보이지만 그 파급력의 강력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왜 그들은 참여에 의한 개혁과 반항 대신 은둔의 길로 갔을까 궁금해진다. 절대군주 시대에는 반항은 곧 죽음이기에 반란을 일으킬지언정 대놓고 반항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유학을 숭상하였기에 인의예지 사단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의는 선비정신의 꽃이요 생명인 것이니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사육신과 같은 죽음의 항변도 있겠고, 생육신처럼 은둔의 길로 가는 수도 있다. 반항과 침묵, 거사와 운둔은 모두 선비정신 중에서 의의 발현이라고 본다.


 그리고 선비들은 중국의 은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굴원이다. 그가 지은 어부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창랑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가사는 굴원이 은유적으로 세태를 표현한 것이다. 세태가 맑으면 내 마음도 그에 맞추어 즐거움을 얻고, 세태가 혼탁하면 나도 역시 타락하여 어울리면 되지 않은가 하는 자조적인 표현인 것이다. 굴원의 노래를 엿듣고 어부가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살면 되지 뭐 제 잘난척하면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말인가 하고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굴원은 잘못된 세태를 고치기 위해 아니면 회피하기 위해 이소(離騷)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그 이소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조선의 선비들에게 울분과 은둔의 길을 열어준 명작이라고 여겨진다. 굴원은 개혁을 하고 싶었지만 간신들로 인해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따돌림을 받는데 대한 상실감으로 운둔의 길로 가지만, 마지막 그는 멱라수에 몸을 던지고 만다. 단종애사로 울분을 못 참고 동강에 몸을 던진 선비가 있으니 그가 사로 충신 정사종이다.


어느 날 친구인 권처사와 통화한 내용이다.

 “조처사가 드디어 나를 따라 은둔의 길로 갔구만. 나처럼 고향으로의 낙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밀양에다가 촌집을 지어 산다니 반갑네 그려. 밀양은 나의 외갓집이 있던 곳이 아니던가.”

 “권처사가 항상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노후를 보낸다는 게 소원이라고 하는 말에 영향을 받았다네. 내 고향은 아니지만 김종직 선생의 지조가 서려있고 사명대사의 구국의 혼과 의열단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밀양을 선택한 것이제.”

 “역시 조처사는 의를 지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선비가 맞는 걸로 보이네. 생육신이신 어계선생의 불사이군의 절의와 임진왜란 때 가문의 충신들이 그렇고, 독립운동가이신 조부님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네.”

 “허허, 안동 권씨 가문은 또 어떠하신가. 조선 개국공신 권근선생이 있고, 충재공 권절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이루신 권율 장군도 있으니 어디 우리 가문이 따라가겠는가.”

 “조처사가 언제 우리 집안의 인물들을 그렇게 깊이 연구하였던가. 역사에 관심은 많은 줄 알았지만 자네가 지은 역사기행문에 충신들에 대한 애절한 시조도 많이 지었던 걸 보면 대단하다고 항상 여기고 있네.”

 “내가 밀양에서 은거를 하다 보니 주변의 사적지를 돌아보곤 하는데, 혹시 밀양강가에 있는 월연대라는 곳을 아는가. 여주 이씨 이태 선생이 당파싸움을 피해서 은둔한 곳으로 나오던데 말일세.”

 “조처사가 어찌 월연대를 다 갔다 왔다는 말인가. 그분이 우리 외가인 여주이씨 선조이시제. 우리 외가는 퇴로리라는 곳에 있어 월연대하고는 좀 멀다네. 아직도 여주 이씨 집성촌이 그곳에 있제.”

 “그런데 퇴로리라는 마을 이름이 독특하네 그려. 혹시 도망갈 길인 퇴로인가 즉 인생의 마지막 퇴로라고 말일세. 은둔이 암울한 세상의 퇴로를 열어준다고 말일세.”

 “하하, 조처사는 말을 그럴듯하게 잘 지어내기로 유명하였었제. 퇴로는 늙음을 쫓아버린다는 도교적인 뜻이 들어있다네. 그 마을은 마음을 편하게 하여 지내니까 장수촌으로 알려져 있다네. 그 인근에 오래된 위양못도 있고 말일세.”하고 권처사와의 대화는 마무리된다.  


 어느 날 꿈속에서 만난 어느 노인과의 대화에서 비롯된 나의 역사여행은 십수 년간을 이어져 한 권의 역사기행문으로 탄생하였었다. 그 책을 발간하는 데는 공감을 같이한 권처사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요선암에서 삼공이 도원결의를 한 꿈을 꾸었고, 그 이전 직장생활 중에 안동 권처사, 한양 조처사, 나 함안 조처사가 점필재 선생의 후예인 김처사의 입회하에 또 다른 도원결의를 하였으니 역사의 흐름은 내려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느꼈다. 쉴 새 없이 변해가는 현대문명시대에 온고지신의 뜻을 가진 사람이 그래도 있다는 게 정말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직장생활 때 연수하던 밤에 만나서 맺어진 주점결의가 원호, 조여, 이수형공의 도원결의와 연결되었고, 그들도 시대상황은 다르지만 은둔의 길로 가고 있으니 인연의 끈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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