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길
그날은 날씨가 음산하고 산새들도 무슨 영문인지 슬피 울고 있었다. 금강정 밑의 동강물은 변함없이 흐르건만 여울에 부서지는 강물은 왠지 애잔하기만 하다. 청령포 건너편 육육봉은 물안개에 가려져 희미하게 보이고 구름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되풀이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쳐다보는 정경이지만 오늘따라 그의 마음에 비치는 모습은 평소와 사뭇 다르다. 그곳 영월은 사방이 태화산, 백운산 등 높은 산으로 병풍을 두른 듯하여 외부로부터 단단히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오직 동강과 서강이 답답한 지역의 숨통을 터게 하며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그날 아침 엄호장집의 감나무에 앉은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울고 있어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게 아닌가.
“아버지, 큰일이 났습니다. 어제 저녁에 임금님이 승하하셨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유배 중인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비명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금 서강변 청령포에는 임금님의 시신이 둥둥 떠다니고 있답니다. 이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첫째야, 그 말이 사실이더냐. 내가 며칠 전에도 임금님을 알현하고 안심도 시켜드렸는데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그 간신배 넘들이 또 작당하여 결국 임금님을 해치고 말았구나. 오늘따라 아침에 기분이 착 가라앉더니만 그런 변고가 있었던 게로구나.”하고 엄호장은 뒤로 돌아서면 소매깃에 눈물을 훔친다. 그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와 처음 청령포에 머무를 때 강을 건너가 종종 알현하였었다. 외로운 임금의 말동무가 되기도 간간이 어탕을 준비하여 갖다 바치고 하여 가까이에서 모시기도 하였는데, 그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면서 그의 손을 꼬옥 잡아 주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그는 곧장 두 아들과 함께 청령포로 달려갔다. 연로하신 어머니에게는 걱정이 될까 봐 말은 안 하고 강가에 좀 일이 있어서 다녀온다고 더듬거리는 말로 때웠다. 강변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둥둥 떠다니는 시신을 쳐다보고 합장하기도 하고, 일부 갓을 쓴 선비들은 맨땅인데도 흙을 옷에 묻히며 절을 올리고 있었다.
엄호장도 그 속에 섞여 절을 올리고 나오는 울음을 애써 삼키며 괴로워하였다. 모인 백성들은 구슬피 울었지만 강물 위에 이리저리 떠도는 임금의 옥체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청령포 입구 소나무
등걸에는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포고문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엄호장은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두 아들을 조용히 부른다.
“얘들아, 이일를 어찌하면 좋으냐. 그 불쌍한 임금님이 죽는 것도 억울한데 저렇게 시신이 강물 위로 떠도는 것을 보니 참을 수가 없구나. 내가 말직인 호장이지만 세종임금께서 녹을 내려서 우리가 이렇게라도 살고 있지 않았더냐. 어머님께서 귀가 어두우시니 못 들었겠지만 낌새를 채지 않았나 걱정이다. 어머님께서 자신에게 효도하려고 말고, 힘이 남는다면 유배온 임금님을 먼저 모셔라고 하지 않으셨나.”하고 엄호장은 두 아들에게 마음에 솟아오르는 의분을 참으며 엄중하게 말한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이일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냥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이 얽혀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대의 유훈은 충절이었고 어머니 또한 의로운 길을 가라고 하였지만 자식들의 앞날이 걱정이 되어 선뜻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시신을 수습하면 중죄인이 되어 삼족을 멸할 것이며, 설령 멀리로 도망간다고 해도 연로한 어머니가 그 험난한 여정을 감당해 내기가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뒷감당을 하기는 정말로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던 결정을 내려야 했기에 조용히 눈을 감고 조상의 뜻을 살펴보았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자식들을 불러놓고 한말이 생생히 떠오른다. 우리 조상들이 처음 영월로 들어와서 터를 잡고 살 때 원주민들로부터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여 차별받지 않고 잘 대해주어 무사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원주민들과 친하게 지내며 서로 도와 마을을 번창하게 이루었으며, 후손들도 그런 행실을 배워 영월지역에서는 훌륭한 가문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과거에도 합격하여 중앙관직에도 나아가고 영월관아의 육방관속으로 들어가 나라의 은혜를 입은 바가 컸다고 하였었다. 그런 훌륭한 가풍으로 인해 영월엄씨라는 본관을 얻었다고 하였었다. 그러니 나라에 위기가 오면 목숨을 다 바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였었다. 그러니 지금 목전에 당도한 가문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다. 선대는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임금에게 충성하라는 말이기도 한데 지금 임금은 미우나 고우나 세조가 아닌가.
그는 선대의 큰 뜻인 나라에 충성하라는 말속에는 올바른 길로 가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유배온 단종 임금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것은 어머니께서 매일 물을 떠다 놓고 단종 임금의 안위를 비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에 실행한 것이다. 어머니는 윗대 어른들이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올바른 길이 아니면 절대 가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들었다고 한다. 그는 멸문지화를 당하더라도 의로운 길을 가야 한다고 마음에 또다시 다짐을 하였다. 그것의 실천은 지금껏 관의 눈을 피해 유배온 단종 임금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노산군이 아닌 진정한 임금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또 아버지는 세종임금 때 지방관리의 벼슬을 받았었고 세종임금은 세손인 단종임금을 잘 보살피라고 신하들에게 엄중히 당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다 바친 사육신들이 있었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영월을 찾은 원호 선생과 정사종 선비를 가까이에서 보지 않았던가. 그들의 용기를 보고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는 죽음을 부르는 의로운 길을 가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는 밤이 깊어가고 어머니가 잠드신 틈을 타서 조용히 두 아들을 부른다.
“용아, 성아, 잘 듣거라. 내가 가만히 있으려니 죽기보다 힘들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정말로 힘들지만 너희들에게 물어보느니라. 어찌 임금님의 시신을 저렇게 방치할 수가 있겠느냐.”
“아버님, 저희들도 마음이 안 편합니다. 강물 위에 왔다 갔다 하는 옥체를 보니 눈물이 다 나오더군요. 아버님의 분부가 있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만 할머니가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어머님은 사실만큼 사셨고 항상 나라의 은덕을 입었으니 충성을 다하라고 말씀하시 않으셨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대충 알겠느냐. 참으로 너희들에게는 내입으로 말을 못 하겠다.”
“아버님이 말씀을 안 하셔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더 이상 방치하면 곤란하니 어두운 밤을 틈타 건져 올려 조용한 곳에 묻어드립시다. 관청에서도 포고문이 너무 엄중하니 시신에 손을 못 댈 거라고 감시가 소홀할 거로 보입니다. 우리 집 바로 뒤에 있는 동을지산에 묻고 소나무잎으로 덮어두면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너희들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나의 생각하고 그대로 들어맞는구나. 그럼 나중에 때를 봐서 지게를 준비하여 함께 강변으로 가자. 헤엄이야 너희들이 잘 치고 힘도 세니 번갈아 가면서 짊어지면 무사히 장사를 지낼 수가 있을 것 같다. 나머지는 천지신명에게 맡기자. 하늘도 무심치 않으면 무사히 일을 마치도록 도와줄것이리고 믿는다.”이렇게 하여 엄호장의 부자는 결행을 하게 된다.
그는 일단 그날 저녁에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하고 내일 아침 일찍이 영월을 떠난다는 계획을 세웠다. 두 아들이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고, 둘 다 힘이 장사이니 역할을 분담하여 일을 하기로 하여 마음이 든든하였다. 임금님을 모실 관은 이미 어머니를 위하여 가벼운 오동나무 관을 마련해 두었으니 그걸 사용하면 된다. 곧바로 두 아들을 데리고 집 뒤의 동을지산으로 오르기로 하였다. 괭이와 삽과 낫을 준비하고 집에 있는 제사 때 쓰려고 보관하고 있던 청주를 호리병에 담고 어포도 몇 장 자루에 함께 넣었다. 큰 아들 용이는 오동나무관을 지고, 둘째 성이는 등에는 제수용품을 지고, 엄호장 자신은 괭이와 삽과 낫을 들었다. 등을지산에 오르니 소나무가 촘촘히 서있어 그 사이에 땅을 파고 묻으면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것 같았다. 하기사 그곳에 나무꾼들이나 다니지만 엄호장의 선산이라 함부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장사를 지내 묻고 나면 귀신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전망이 좋고 양지바른 곳을 찾아 땅을 몇 길이나 팠다. 그 옆에다가 들고 온 술과 어포를 두고 산을 다시 내려왔다. 임금의 시신을 수습하여 등에 업고 오면 관에 담아 오는 것보다 수월하기에 그런 수를 내었는데 기발한 방법이었다.
임금님을 묻을 묘를 파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위해 장만해 둔 수의와 광목천을 가마니 두 짝과 함께 큰아들의 지게에 올렸다. 곧장 청령포로 내려가서 보니 여전히 시신은 강물 위에 둥둥 떠서 맴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헤엄을 잘 치기로 소문난 둘째 성이를 시켜 시신을 강변 쪽으로 당겨왔다. 엄호장은 건져 올린 임금님의 옥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한 후 마음을 진정시켜 수의를 입히고 광목을 두른 뒤 남의 눈에 안 띄게 가마니 두 짝으로 감쌌다. 힘이 좋은 큰아들 용이가 지게에 시신을 올려 발 빠르게 흰재까지 올랐다. 거기에서 한숨을 돌리고 주변의 동정을 살펴보니 발각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다시 걷고 걸어 집뒤의 동을지산에 이미 파놓은 묘지 앞에 임금님의 시신을 무사히 내려놓았다. 엄호장은 예를 갖추고 시신을 안고 수의를 입혀 준비해 둔 오동나무관에 넣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 관을 내리고 흙을 덮고 봉분은 없이 그위를 소나무 낙엽으로 감쪽같이 덮었다. 그러고 나서 준비해 간 청주와 어포를 바닥에 놓고 잔을 드리고 삼배를 올렸다.
“임금님 감히 옥체에 손을 대고 짊어지고 온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부디 편안히 눈을 감으시고 좋은 시절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때 저도 다시 나타나서 못다 한 예를 다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들은 고향을 등지고 천리타향으로 떠나렵니다.”하고 엄호장은 두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부터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내일 아침에 영월을 떠날 준비를 하여야 한다. 평소와 다르게 요란스러운 상황을 보고 귀가 어두운 노모가 무슨 일이냐고 걱정을 하기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구 잘했다! 내 효자야!”하고 그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에게 내일 아침 일찍이 떠나야 되니 불편하시더라 참으시고, 다 그의 불효라고 생각하시라고 말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엄호장 일가는 영월을 떠나야 했다. 마침 집에 나귀 한 마리가 있어 간단한 세간살이와 침구를 나귀등에 실었다. 어머니는 지게에 편편한 판자를 올리고 등받이까지 하여 방석을 깔고 앉혔다. 나이 든 노인인 데다가 먼 길을 걸어갈 수가 없으니 부자가 번갈아가며 지게를 지기로 하였다. 영월 관내를 벗어나서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덕포나루를 건너 단양 쪽으로 나아갔다. 이제부터는 옷차림도 상인처럼 하고 언행도 조심해야 하기에 아들들에게 주의시키고 가급적 말을 하지 말도록 하였다. 가는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고, 관에서 오늘 아침에 임금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용의자를 찾을 것이 분명하기에 당일 중으로 영월을 빨리 벗어나야 했다.
엄호장의 가족들은 고씨동굴을 지나 상동방향으로 틀어 충청도와 경계에 있는 의풍에 저녁 무렵에 도착하였다. 100리 길 먼 거리였지만 튼실하고 힘센 나귀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와 아들 둘이서 번갈아 가며 지게를 지었기 때문에 별로 고된지를 몰랐지만, 마음은 여전히 쿵쿵거리며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의풍에서부터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그곳에는 경상도와 충청도로 연결되는 역이 있기에 언제든지 관졸들이 말을 타고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그는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당부한다.
“어머님은 많이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시고, 아들들과 며느리는 누가 말을 걸면 경상도로 터전을 잡으려고 떠나는 출향민 가족들이라고 말해야 한다. 고개를 넘어서 경상도로 들어서면 그때 다시 행동거지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해주도록 하마.”하고 엄호장은 진중하게 말한다.
이제는 의풍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고치령은 완만하지만 한참 멀고 수시로 파발마들이 오가니 위험하다. 마구령은 거리가 짧은 대신 가파르며 영주 부석 쪽으로 빠지고 대신 추적하는 관졸들로부터 다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어 마구령 쪽으로 틀었다. 이제부터는 밤을 새워서 마구령을 넘어 부석으로 가야 한다. 의풍을 조금 벗어나서 가져온 솥단지를 꺼내어 심마니들이 수시로 이용하는 빈집의 아궁이에 걸고 저녁을 해 먹었다. 지치고 시장한 가운데 먹는 밥맛은 좋아야 할 텐데 엄호장은 모래를 씹는 듯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들이닥칠지 모를 추적의 그림자가 눈에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하여 마음이 안절부절이다. 의풍을 뒤로하고 남대천을 따라가니 마구령 위에는 초승달이 뜨서 도피하는 가족들의 밤길을 밝혀준다. 산신령의 비호인지는 모르지만 지나가는 늑대들도 울음소리만 내었지 달겨들지 않았고, 나귀도 놀라지 않고 얌전히 불평 없이 짐을 등에 지고 잘 걸었다.
마구령을 넘어서자 엄호장의 얼굴에는 땀인지 눈물이지 모를 끈적한 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려 앞길을 가리고. 막막한 앞날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하던 말이 문득 떠올라 그런 나약한 마음을 거두어 간다. “우리 엄씨는 벼슬을 한 큰 인물은 없지만 영월바닥에서는 행실이 바른 가문이라고 소문이 났으니 그리 알고 잘 처신하거라. 나라에 위기가 왔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 올바른 길로 가야 하느니라. 설령 바른 길을 위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여야 하느니라.”고 유언으로 남기고 갔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고 올바른 길만 가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지금 그가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고, 끝까지 지켜야 할 의로운 길이라고 믿으며 마음을 굳게 먹고 나아갔다.
지금 영월관아는 난리가 났다. 청령포 앞 강물에 떠돌던 단종의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삼족을 멸한다는 포고문을 보고도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말인지, 간이 배밖으로 나온 놈인지, 글을 몰라서 포고문 못 읽는 거지나 천민들의 짓인지, 예전부터 영월을 오갔던 선비들의 소행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영월군수는 하늘이 노랗고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포고문도 있지만 관졸들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을 못 내린 불찰도 있어 그야말로 전전긍긍이었다.
“여봐라, 육방관속들은 들어와서 사실관계를 아뢰고 대책을 논의하도록 하라. 잘못하여 빼앗긴 시신을 찾지 못하면 본관은 물론이고 너희들도 중죄를 면키가 힘들 것이다. 그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사또 나으리, 육방관속 중에 엄흥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한 번씩 노산군을 알현하려고 청령포를 들락거렸다는 소문도 있고 하니 그를 잡아들여 문초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왜 지금 와서 그딴 소리를 하나. 일이 벌어지기 전에 철저히 감시를 했어야지. 좌우지간 하는 일들이 제멋대로군. 어서 빨리 엄흥도를 잡아들이도록 하라.”
“사또, 엄흥도는 집을 비우고 가족들과 함께 감쪽 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가 범인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관졸들의 보고에 의하면 오늘 새벽에 영월을 떠난 것 같습니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정선과 태백방향으로 역마를 통하여 추적하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 중으로 붙잡았다는 전갈이 올 것으로 보입니다.”하고 이방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뢴다.
천만다행이었다. 영월관아는 엄흥도가 노모도 있고 하니 편한 길인 정선이나 태백방향으로 갔으리라 단정을 내려 관졸들을 그리로 보냈다. 상식적으로도 험난한 고개를 넘는 경상도 방향으로 갔다는 추측은 설득력이 없고, 일가들이 있는 정선이나 태백으로 가서 숨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렸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엄흥도 가족들은 도피하는데 많은 시간을 벌었다. 그는 이미 마구령을 넘어 부석 쪽으로 빠져, 관아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소백산 자락의 화전민이 버리고 간 빈집에 일시 짐을 풀었던 것이다. 일단 거기에서 멈춘 것은 연로한 어머니가 먼 거리를 계속하여 이동하는데 견뎌내기가 힘들다는 점이며, 여러 식구가 한꺼번에 큰길로 이동하면 관의 표적이 되니 숲이 깊은 이곳 소백산 자락에 숨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었다. 꼭꼭 숨어서 추적이 잠잠해지면 다시 더 멀리 떠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비상한 머리를 갖고 있었고 관아의 의표를 찌르는 방책을 세워 움직인 것이었다.
엄호장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 세상은 아무리 의로운 길을 가더라도 숨겨주거나 도와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금성대군의 2차 단종복위운동이 바로 옆인 순흥에서 일어나서 실패하자, 간신 한명회는 안동부사로 있던 동생 한상진을 시켜 피의 숙청을 자행하지 않았던가. 그는 소수서원 앞 죽계제월교 아래서 연루된 선비들은 물론 죄 없는 양민들까지 도륙하여 피가 강을 따라 몇십 리를 흘러갔다는 참극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기 있는 선비라고 믿었던 기천현감 김효흡마저도 권력에 눈이 어두워 자신을 키워준 순흥부사 이보흠을 밀고하지 않았던가. 풍속이 타락한 지금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은인자중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기회주의의 길을 가기는 너무나 쉬운 반면 의로운 길을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시간은 몇 달이 흘러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봄철이 되었다. 이제부터 서서히 남쪽으로 더 내려가 다시 다가올지 모를 추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얼마 전에는 화전민 마을에 약초꾼들이 몇 무리 들여 닥쳐 불안한 참이었기에 빨리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관에서도 사방천지에 방을 붙여 엄흥도를 찾을 것이며, 노모를 모시고 이동하는 가족들은 눈에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머니를 깊숙한 이곳 소백산 자락에 두고 자신과 아들들만 떠나면 발각의 위험성을 줄일 수 있다는 현명한 발상을 하였다. 어머니는 “나는 이제 살만큼 살았고 아들과 손자등에 업혀 2백리 길을 편안하게 왔으니 이런 호강이 어디 있겠나. 나와 며느리는 남겨놓고 다른 안전한 곳으로 가거라. 내가 죽으면 이곳에 무덤이나 하나 만들고 좋은 시절이 오면 지나가는 길에 성묘나 하면 된다. 너희들의 행실을 보고 이 어미는 참된 자식과 손자들을 잘 두었다고 여긴다.”하고 그의 어머니의 간절한 말씀도 있었다. 어머니는 혹시 관에서 찾아오면 전번에 약초꾼들이 보았다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고 잡아 때면 되니 걱정하지 말고 새 보금자리를 찾으라고 눈물겨운 말씀을 하셨던 것도 결단을 내리게 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가족들의 장거리 이동은 남의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꺼번에 일시에 움직이면 관의 단속에 걸리기가 쉽기에, 나이 든 어머니와 며느리는 남겨놓고 그곳을 떠나기로 하고 자리가 잡히면 다시 모시러 오기로 하였다. 엄호장과 두 아들은 아직도 힘이 있고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대처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아들들도 아버지인 엄호장이 주도면밀한 계획과 상황을 간파하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위기를 잘 넘길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는 인삼장수 신분으로 행색도 바꾸어 움직이기로 하였다. 기르던 수염을 반쯤이나 자르고 상투도 풀어서 평민처럼 보이게 하였다. 목적지는 남으로 남으로 달려 영월로부터 멀어지는 곳이다. 일행은 풍기인삼을 구입하여 각자 봇짐에 넣어 불시 검문에 대비하고, 간간히 그것을 팔기도 하여 노자를 만들어 가며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아갔다. 성과 이름도 다 바꾸고 엄씨라는 흔적을 아예 몸에서 지워버렸고, 밤이 되어 조상에게 고할 때에 정신에만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는 영월관아와 조정으로부터 추적이 잠잠해졌지만 단종은 노산군이며 사육신과 금성대군 외 충신들도 역적으로 기록하여 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엄호장은 걷고 걸어 봉화에 도착하여 산세를 보고 은둔처로 춘양이 괜찮을 것 같았다. 한꺼번에 너무 멀리 가버리면 소백산 자락에 두고 온 어머니를 모셔오기가 힘들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춘양은 이름 그대로 봄볕이 포근하듯 아늑하고 살기는 좋은 것 같았다. 그들은 촌락과 멀리 떨어진 참새골이라는 오지로 들어가서 새 터전을 일구었다. 연장을 구입하여 나무를 베어 통나무집을 짓고 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 그 정도면 가족들이 다 모여 살아도 될 것 같아 봄이 오면 어머니를 모시고 오기로 하였다. 성은 일단 흔한 김씨로 하고 본관을 누가 물어오면 잘 모른다고 대답하기로 아들들과 약조를 하였다.
근 일 년이 넘어서서 엄호장은 큰 아들을 시켜 소백산 자락의 어머니의 근황을 알아보려고 보냈다. 순흥을 거쳐 부석 근방에 있는 화전민 터를 찾아 올라갔는 데 어찌 된 일인지 집안이 잠잠하기만 하였다. 할머니의 기침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그런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게 아닌가. 집안에 들어가 봐도 사람 사는 흔적은 있는데 노쇠한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큰 아들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허급지급 산에서 달려내려오는 게 아닌가. 서로는 부둥켜안았지만 곧바로 할머니가 궁금하여 손을 풀고 물어보았다.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할머니는 몇 달 전에 잠을 자다가 조용히 운명을 하였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산소는 집 뒤의 양지바른 곳에 모시고 시아버지에게는 기별할 방도가 없어 아내가 조용히 묻어드렸다고 하였다. 떠나시기 전에 아들과 손자들이 안전하기를 매일 물을 떠놓고 천지신명에게 빌곤 하였다고 한다. 자신은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고 자식과 손자들이 정말 장하다고 하면서 칭찬을 하였다고 하였다. 잊지 못할 것은 자신이 들어갈 오동나무관을 단종 임금님을 위해 쓰였다고 하니, 그런 자식이 불효가 아니라 효자이며 만고의 충신이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엄흥도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냥 조용히 있었다면 쫓겨서 먼 곳으로 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머니가 오래 사셨을 텐데 불효를 저질렀다고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며느리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 조그만 효를 버리고 큰 충을 행하였으니 그것이 충의 길이면서 더 말할 나위 없는 효이 길이라고 늘 말씀하였다고 한다. 이제는 며느리도 왔으니 새로운 터전에 뿌리를 내려 정착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엄호장은 이제야 영월에서 뜻을 같이하고 단종 임금을 걱정하였고, 그날 시신 수습현장에서 도움을 준 정사종 선비가 생각이 났다. 그간 마음속으로는 그렸지만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챙겨보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을 하였다. 정사종 선비는 영월이 고향이 아닌데도 단종이 폐위되고 유배를 오자 군위 현감을 즉시 사임하고 영월로 찾아든다. 자식들에게 일체 벼슬길에 나가지 말고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소나 키우면서 살아가라고 당부한 절의 있는 신하였다.
엄호장은 춘양으로 나가 조용히 영월에 대한 풍문을 들어보았다. 영월관아에서는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한 중죄인이라고 방을 붙이고 상금을 내걸었다고 하였다. 지금껏 찾아보았는데 귀신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고, 백성들은 그의 충절과 용기에 많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정사종 선비는 단종이 사사당하자 이를 비관하여 동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였다. 엄흥도는 무엇보다도 뜻을 같이하고 단종 임금을 걱정하며 신하의 도리를 다한 정사종 선비의 죽음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였다. 그것도 아무것도 남김없이 금강정 절벽에서 동강물로 뛰어내린 시녀들처럼, 한송이 선비꽃이라고 여기면서 조용히 촛불을 켜고 잔을 올렸다.
그는 정사종 선비가 군위현감을 지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목민관으로서의 자취가 배어 있는 군위를 찾아가고 싶었다. 군위에 그러한 의인의 자취가 서려있기에 이왕 타향을 전전할 운명이면 그곳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다. 엄흥도는 살아서는 영월로 갈 수 없기에 정사종 선비의 체취와 공덕이 어린 군위를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가기로 맹세하였던 것이다. 몇 년을 춘양에서 더 살아보고 세상이 좀 더 조용해지면 그곳으로 움직여 보려고 작정하였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졌다. 인근 동네를 지나가면 김씨라고 부르기도 김첨지라고 하기도 하여 엄흥도라는 성과 이름도 다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영월에서는 아직도 엄흥도가 어디엔가 터를 잡고 살아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일부러 풍문을 퍼뜨려 풀숲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하여 잡아내듯이 꼭꼭 숨어있던 그를 움직여 잡으려는 계략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이곳으로 왔는가를 누가 알고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근거 없는 풍문이라지만 꺼림칙하여 가산을 정리하여 멀리 더 멀리 풍문이 안 생길 그 먼 곳으로 가고자 하였다.
이듬해 봄날을 택일하여 엄흥도는 가솔들을 이끌고 조그만 수레에 짐을 싣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내성천을 따라 내려가서 현동천이 만나 이룬 낙동강변을 따라 수레를 몰았다. 안동 근방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엄호장은 가족들을 모아놓고 엄중하게 말을 한다.
“얘들아, 여기까지 온다고 정말로 고생을 했다. 못난 이 애비가 너희들의 앞길을 막고 천리타향으로 떠나오게 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지금부터는 우리도 다시 헤어져야 하겠다. 아직도 관에서 우리를 추적하고 있으니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큰 얘 용이는 며느리와 함께 문경이나 상주나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어가서 터전을 일구어라. 나는 둘째 성이를 데리고 죽으나 사나 군위로 갈 것이니, 너는 우리 가문의 대를 꼭 이어가도록 해야 한다.”
“아버지, 어떻게 헤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버지가 없이는 한시라도 불안한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제발 그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요.”
“허허, 내 말을 들어래도 그러네. 내 마음도 오죽하겠느냐. 언제가 좋은 시절이 오면 성도 되찾고 여기저기에서 뿌리를 내려 후손들은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니라.”하고 엄호장은 비장하게 말하고 안동 삼거리에서 눈물을 머금고 큰 아들을 멀리 떠나보낸다.
엄호장은 둘째를 데리고 조심조심 동태를 살피며 가느라 의성을 거쳐 이레만에 군위에 도착하였다. 이제는 살아갈 터전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기에 작은 아들과 함께 주변을 물색해 보았는데 태백산맥 줄기가 갈라져 나와 산세가 험준하면서도 그 산자락이 아늑한 곳에 터를 잡았다. 마을과는 떨어진 조용하면서도 고향 영월의 정취를 닮은 곳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떠나간 정사종 선비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적당한 장소에 산신당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촛불을 켜고 술잔을 올리면서 정선비의 영혼을 달래고 흠향하였다. 이곳 군위에 정선비가 현감으로 있을 때에 공덕을 기리는 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면 엄흥도 자신이 정선비의 공덕을 알고 있으니 큰 기념물은 아니지만 표시 안 나게 사당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미 지은 산신당을 개축하여 지붕도 기와로 갈고 하여 의흥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의가 발원하고 그 의를 실천한 인물들이 다녀가고 앞으로도 의가 충천하여 의로운 땅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함께 수습한 정사종 선비의 의로움을 기리기 위해 머나먼 길을 찾아 내려왔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엄흥도도 세상을 떠나고 자손들은 그곳에 완전히 터를 잡았다. 작은 아들은 아직까지 성은 김씨로 쓰면서 자식들에게도 일체 가문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엄흥도가 눈을 감기 전에 아들에게 엄중히 당부한 말은 엄씨라는 말을 은연중에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일체의 가문의 기록도 남기지 말고 오직 본관을 모르는 김씨로서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엄흥도가 성은 갈았지만 자손들이 화를 입지 않고 번창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도 관에서는 엄흥도를 찾고 있기에 그런 위험을 자초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 번씩 동네 사람들이 의흥당을 지은 이유를 물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어 자신들은 잘 모른다고 얼무버리곤 하였다.
엄흥도가 의흥당을 짓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 풍속이 피폐해진 마을을 바로 세운 것은 맞았다. 마을 사람들도 엄흥도 일가의 행실과 덕을 본받아 타성 간에도 화합하고 서당을 세워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주변 마을들로부터 부러움을 산 것도 맞았다. 엄흥도는 조상들이 영월로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그 자신 스스로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삼강오륜이 살아 숨 쉬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을로 변화시킨 것이다. 내세우는 성은 김씨지만 마음속에는 엄씨의 정신이 흐르고 좋은 시절이 오면 본래의 성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세월이 몇 백 년이 흐른 숙종시대에 단종과 충신들을 복권하고 사육신을 비롯한 충신들에게는 추증하는 대사면을 단행하였다. 그중에는 엄흥도가 포함되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사육신 다음으로 높은 충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제는 세상에 정체를 드러내어도 문제가 없고 관에서도 그의 행적을 찾으라는 명이 떨어진다. 그런 즈음 군위지방에서도 혹시 의흥당을 지은 김씨 가문이 엄흥도의 후손들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후손들은 일체 내려온 족보라든가 유지가 담긴 서책이 없어 자신들이 엄씨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방의 선비들이 의흥당에 정사종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것을 보고 집중적으로 행적을 파악하기로 하였었다. 가문에서는 전설에 의하면 그들의 선조가 영월을 거쳐 춘양에 일시 머무르다가 이곳 군위로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식을 듣고 영월에 있는 엄씨 문중에서 군위 현지로 내려와 후손들의 제사예절이라든가 유훈 같은 것이 너무나 비슷하여 의흥당을 지은 사람은 엄흥도가 맞다고 확신하였다. 관에다가 그런 사실을 보고하니, 춘양지역을 탐문한 결과 군위에 내려온 과정을 단종의 시신을 함께 수습한 정사종의 자취를 찾아 먼 길을 내려왔다고 단정하였다. 지금은 엄흥도가 정착한 마을의 이름은 의흥리로 의흥당의 건립정신을 따라 지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엄흥도는 단종이 영월에 유배 왔을 때 많은 의로운 선비들과 교류하였었다. 정사종 선비 외에 영월을 다녀간 김시습과 서강변에 관란정을 지어 단종을 그리워하던 원호를 비롯하여 경상도에서 먼 길을 달려온 이수형, 조여 등과 뜻을 같이하고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였었다. 그들은 모두 먼 길을 의를 찾아 달려왔으며, 일체의 벼슬길을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 외롭게 여생을 보냈다.
엄흥도가 영월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할 때는 그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게 맞는다. 소백산을 넘으면 순흥인데, 그곳은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무자비한 살육이 이루어지고 반역향으로 낙인이 찍힌 곳이기에 정착할 수가 없었다. 풍속이 타락하여 외지인을 경계할 것이 분명하여 발각과 고발의 위험성이 높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그다음은 봉화인데 지리적으로 좀 멀지만 유배하던 단종임금을 원호, 조여와 함께 보필한 이수형 선생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그를 찾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올가미에 걸려든다는 것을 알고 봉화에서도 오지이며 십승지지인 춘양으로 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마지막 몸을 묻을 곳은 당연히 그가 존경하고 애도하던 정사종 선비의 체취가 어린 군위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 먼 길을 달려온 그 의로운 사람들이 가는 길이 생생히 남아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길은 여럿이 있지만 각자가 다른 길을 가고 있고, 어느 누가 바른 길을 가는지에는 숨겨진 길이기에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길을 가는 사람의 행실에 대한 평가도 없고 오직 가문의 영광이라는 출세의 길에만 갈채를 보낸다. 그러니 올바른 신하도 보기 힘들고 무엇에 충성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도 희미하다. 모든 길이 쭉쭉 뻗어 있어 빨리 가기 위해 함께 걸어가지만 마음속에 걷는 길은 다 다르다. 오직 누구의 평가를 바라지 않는 의인들만이 바른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