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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달래강의 전설

한 많은 달래와 만수와의 사랑 이야기

by 벽운

달래강의 전설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한과 눈물을 싣고 충주로 흘러오는 강이 있다. 그 이름처럼 강둑에는 달래가 자라고 봄이 되면 그것을 캐기 위해 달려오는 수많은 달래들이 있다. 그 이름 속에 숨겨진 수많은 전설이 있으니 그 하나를 끄집어내어 그 자취를 찾아서 봄바람 불어오는 달래강으로 달려가본다. 남산자락에 자리 잡은 단월에는 오늘도 봄바람에 치맛자락을 날리며 나물을 캐는 소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예쁘기로 소문난 달래이었다. 어느 날 자기의 아버지가 달래를 부르며 달래 보았다.

“달래야,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시집을 가야 하겠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걱정이 되는구나. 너희 어미가 몸이 아파 누워있고 동생들도 끼니가 없어 굶고 있는데 어찌하면 좋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그 넘의 논이나 밭뙈기라도 있으면 그런 걱정을 안 할 텐데 참으로 가난이라는 게 무섭기도 하구나.”

“아버지, 저는 시집을 갈 생각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니 저가 집안살림을 챙겨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동생들 밥도 챙기고 빨래도 해야 하니 저가 어머니 역할을 다해야겠지요.”

“오냐, 너의 효심은 내가 잘 알고 있는데 형편이 좀 풀리면 좋은 신랑을 만나 시집을 가거라. 그런데 형편이 풀리기가 쉽지를 않으니 걱정이 되는구나.”


이처럼 달래의 집은 살아가기가 어려워 시집가는 건 언감생심이고 그날 먹을 끼니도 없어, 달래는 강둑으로 나가 쑥을 캐서 밀가루에 쪄서 먹는 쑥털털이를 만들지만 이제 질리고 만다. 어린 동생들은 배가 고프다고 보채고 못 먹어서 얼굴이 노랗고 배는 올챙이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하다못해 달래의 아버지인 김첨지는 이웃 부잣집인 전참봉의 집에서 쌀을 장리를 내다 먹었고, 몇 년간 못 갚은 쌀과 보리는 무섭게 이자가 붙어 있는 재산을 다 처분하여도 갚을 길이 없었다. 그 장리는 목숨을 연명하는 곡식이기도 목숨을 옥죄는 칼 같기도 한 무서운 것이었다. 벌써 단월고을에서도 돈벌레인 전참봉의 장리를 못 견디어 전답을 다 내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머슴살이로 대신하기도 잔일을 거들어 주는 것으로 넘어갔지만 매년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갔다. 그것을 못 견디어 새재를 넘어 야반도주하기도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화전민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돈벌레인 전참봉이 한마디를 하였다.

“이보게 김첨지, 어떻게 지금까지 삼 년 전 장리를 못 갚는단 말인고. 내가 언간 하면 기다려 주는데 지금 보니 난감할 따름일세. 약조한 대로 따라야 않겠는가.”

“전참봉 어른, 도저히 갚을 길이 없으니 저도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방도를 가르쳐 주시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좀 비정한 말이지만 자네 딸을 내 집의 노비로 내놓으시게. 그러면 나하고 사돈지간이 되고 어려운 처갓집을 도와줄 수가 있지 않겠는가.”

“전참봉 어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어찌 딸을 노비로 내놓으시라고 하시는가요. 빚은 저가 이 목숨을 걸고 갚을 테니 그런 말씀은 거두시옵소서,”

“허허, 김첨지께서는 어찌 약조를 함부로 어기신단 말이오이까. 이 계약서에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적혀있는데 법을 함부로 어기면 안 되지요.”

“돈은 돈이고 사람은 사람인데 어찌 돈 문제를 사람으로 연결시키는가요. 아무리 돈이 중해도 사람보다야 중하기야 하겠는가요.”

“그러면 송사를 하자는 말인가요. 그렇게 고집 피우지 말고 딸을 나에게 보내시지요. 그러면 딸도 호강하고 김첨지 집안도 남부럽지 않게 살지 않겠는가요.”

“그러면 내가 장인이 되는데 내가 하대를 해도 참을 수가 있겠는가요. 어르신, 아무리 애욕이 넘친다고 하지만 인륜에 벗어나면 공자님이 노하실 것입니다.”하고 전주인 전참봉과 김첨지와 나눈 대화였다.


이처럼 단월에도 보리고개를 못 넘겨 목숨을 담보로 한 장리를 내어 살아가니 산다는 게 정말 어렵기만 하였다. 그 무서운 장리는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관에서도 인정을 하고 그것을 못 갚으면 약정서에 기록한 대로 따르는 것이 법이었다. 이웃집 개똥이네와 소똥이 집도 이미 전답은 헐값으로 넘어가고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 또 장리를 내었으니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는 불문가지이었다. 바로 그것의 답은 인신매매이자 패륜인 노비로 딸을 팔아버리는 비정인 것이었다. 지금 김첨지는 빌린 장리를 갚지 못하면 약정한 대로 딸을 그 집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집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 노회한 김첨지의 몸종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억울하기도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상황에서 김첨지는 조용히 딸인 달래를 불렀다.

“야야, 이 애비가 힘도 없고 돈도 없어 너를 지키기가 힘들구나.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족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장리를 내었더니만 이런 화가 닥치는구나. 너를 좋은 집으로 시집을 보내려고 했는데 앞길이 막막하구나.”

“아버지, 내 한 몸을 버리고 가족들이 굶어 죽지 않는다면 그 길을 가야겠지요. 저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으니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어허, 안 되는 소리. 어찌 애지중지하던 너를 늙은 전참봉의 몸종으로 보낸다는 말이고. 내가 송사를 하더라도 너를 지킬 터이니 그리 알거라.”하고 달래와 아버지가 나눈 이야기이었다.


김첨지는 아끼는 달래를 노비로 보내지 않기 위해 충주관아에 소청을 올렸는데 여지없이 패소하고 말았다. 하기야 몇 달 전에 개똥이네집과 일 년 전의 말똥이네 집도 똑같이 패소를 하였기에 큰 기대를 안 한 게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먹고살기 위해 낸 장리 때문에 딸을 노비로 보낸다는 게 너무 억울하여 관아에 탄원을 한 것이었다. 충주관아는 이미 돈에 오염되어 올바른 판결을 기대할 수 없었건만 김첨지는 애지중지하던 딸을 사실상의 김첨지의 노래개로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소문을 듣고 달래와 사랑하는 사이인 이웃 마을의 만수가 조용히 달래를 만나 나눈 이야기였다.

“달래야, 이일을 어찌하면 좋겠나. 관아에서도 그런 판결이 났다고 하니 세상은 이미 우리 편이 아니다. 우리가 남몰래 저 먼 곳으로 도망을 가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자.”

“만수야, 나도 그 늙은 영감탱이의 노리개가 되는 게 죽기보다 싫은데 우리가 도망가면 부모님이 낭패를 당할까 봐 걱정이 된다.”

“아이구, 너희 부모님은 살만큼 살았고 앞길이 창창한 우리가 살아야 안 되겠나. 내일밤에 이곳을 떠나 소백산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리자. 내가 산삼이나 약초를 캐서 너를 고생 안 시킬게.”하고 달래와 만수는 마을 물레방앗간에서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그믐달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둘은 어느 날 어둠을 틈타서 단월을 떠나 수안보를 거쳐 새재를 넘었다. 분명히 다음날 김첨지가 풀은 추노꾼들이 그들을 쫓아올 것이기에 쉬지 않고 밤새 달렸다. 다음날 새벽에 그들은 가은까지 갔고 다시 달려서 속리산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날 밤은 희양산이 바라보이는 용추계곡 옆에 있는 마을의 물레방앗 간에서 머무르기로 하였다. 날이 밝으면 다시 움직여 다시 속리산을 넘어 보은까지 갈 참이었다. 그날 밤 물레방앗 간에서 둘이서 나눈 대화였다.

“달래야,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고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더 멀리 떠나자. 배가 고프지만 참고 여기 가지고 온 고구마 빼뎃기로 요기를 하자. 그리고 내가 부탁하는 게 있는데 들어주면 좋겠다.”

“우리가 아직은 혼례도 안 올리고 그냥 좋아하는 사이인지라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안 되니 부부의 연을 맺어야겠다. 그 넘의 음흉한 김첨지를 생각하면 덜컥 겁도 나고 치가 떨린다. 오늘부터 너는 내 사람이 되어야 하니 징표를 남겨야 하지 않겠나.”

‘만수야, 그 징표라는 게 무엇이고. 손가락을 걸고 맹세를 하면 되는 건가. 아마 옷을 벗으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제.“

“어이구, 참 말귀를 못 알아듣네. 그것은 신혼밤에 올리는 예식이 아니겠나. 옷은 당연히 벗어야 하고 마음까지도 다 바쳐야 하는 일편단심의 서약이제.”

“어머나, 지금 까지는 손만 잡고 껴안고만 하였지 다른 일은 안 했는데 좀 겁이 나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

“아이구, 달래야. 이제는 죽으나 사나 너와 나는 부부가 되어야 하는기라. 어디 가더라도 당당해지려면 몸과 마음을 다 섞어야 하는 것이야.”하고 달래와 만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밤 물레방앗 간에서 달래와 만수는 하객이 없이 천지신명이 주례를 보는 가운데 장엄한 예식을 올렸다. 캄캄한 그믐달 밤에 이루어진 뜨거운 화합의 신음은 물레방아 소리에 잠겨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하늘도 감응하였는지 약간의 물보라가 튀어 그들의 등을 찰싹 적셔주었다. 그 순간 만수의 마음은 물레방아 절구공이처럼 든든하였고 달래의 기분은 돌아가는 방아바퀴처럼 흔들리면서도 황홀하였다. 이제 그 둘은 일심동체의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그것을 지켜야 할 도리만이 남아있다. 이제는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관에 신고를 하여야 하는데 쫓기는 몸들이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소백산 자락의 화전민이 버리간 간 깃틀집에 터를 잡고 산나물과 야생열매나 칡뿌리로 연명해 나갔다.


그즈음 충주 단월에는 난리가 났다. 전참봉은 도망친 달래를 잡기 위해 추노꾼을 풀었으나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전참봉이 하인들에게 한 이야기였다.

“이 영악한 것들이 밤새 도망을 쳤는데 어디 찾을 수가 있어야지. 그 넓은 소백산 자락을 다 뒤질 수도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구나. 너희들이 새재너머나 속리산 방향으로 탐문을 해보거라. 그 두년놈들을 잡으면 후하게 상을 내리겠다.”

“아이구, 주인어른. 만수라는 놈이 약초꾼으로 소백산을 자락의 지리를 잘 아니 어디 안전하다고 하는 곳에 숨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저 생각에는 속리산 보다는 문경 인근의 소백산 자락에 숨어 있을 거로 보입니다. 잘 아는 심마니와 약초꾼들에게 부탁을 해 놓았으니 잘하면 걸려들 것 같습니다.”하고 큰 머슴인 박수동이가 제법 그럴듯한 말을 하기에 전참봉은 일단 화를 가라앉혔다.


이제 시간은 흘러 겨울이 닥쳐왔고 달래와 만수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말린 약초와 나물을 시장에 나가 팔아야 했다. 그는 가은장에 은밀히 나가서 동태를 살펴보고 안전하다고 보이면 움직이기로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달래에게는 움직이지 말고 집안에 꼭 숨어 있으라 하여 약초와 나물을 자루에 넣어 짊어지고 가은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내려가서 식량을 구해오면 일 년간은 산속에서 꼼작을 않기로 하였다. 겨울을 지내면 산에는 먹을거리가 풍부하기에 밥을 지을 수 있는 곡식만 있으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듬해에는 화전을 일구어 옥수수나 감자, 고구마를 심어면 그나마 자급자족이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지나가는 약초꾼들에게 발각되면 위험하기에 낮에는 그가 잘 아는 바위틈 동굴에서 지내고 밤이면 내려와 집에서 자기로 하였다. 만수 나름대로 치밀하게 자신들을 보호할 대책을 세웠으나 이제 하늘에 기대어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달래가 만수에게 한 이야기였다.

“여보, 오늘 당신이 가은에 간 사이에 몇 명의 약초꾼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내 얼굴을 들키지 않았으나 불안하요. 멀리서 보니 집안을 빙 둘러보던데 혹시 밀고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뭐시라고. 그러면 위험한데 다시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이제는 문경을 떠나서 상주 쪽으로 더 멀리 떠나자. 그 음흉하고 독한 전참봉이 우리를 끝까지 찾고 있을 것이야.”하고 만수는 달래를 달래면서 말했다.


전참봉의 귀에 달래와 만수가 어디서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는 날쌔고 빠른 추노꾼들을 사서 가은에 있는 백화산 쪽으로 보내고 일부는 혹시 도망갈지 모르니 상주 쪽으로 보냈다. 달래와 만수는 나름대로 몸을 숨기면서 상주 쪽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어느 산길 모퉁이에서 말을 타고 있는 추노꾼들이 칼을 들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산적처럼 생기고 흉악한 추노꾼들은 말에서 내려 두 명을 포박하여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추노꾼들에게 끌려 단월로 돌아왔고, 전참봉은 만수를 멍석말이로 죽도록 패고 난 뒤 다음날 충주관아에 죄인의 신분으로 그를 넘겼다. 만수는 노비를 데리고 도주한 죄로 충주목사의 처분으로 3개월간의 감옥형에 처해졌다. 전참봉은 달래에게도 죄를 물어야 했지만 노리개로 삼아야 하니 괘씸하지만 관아에 넘기지 않았고 충주목사도 눈을 감아주었다. 옥에 갇힌 만수는 달래의 앞날이 걱정이 되고 그 노회한 전참봉의 품에 안긴다고 생각하지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출옥하면 비장한 결단을 내리기로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나갔다.


만수는 이듬해 봄에 풀려났고, 집으로 돌아와서 깊숙이 숨겨둔 비수를 꺼내어 천으로 둘둘 말아서 가슴에 품고 그믐날 삼경이 넘어서 전참봉집 담장을 넘어 침실로 들이닥쳤다. 그가 전참봉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한 말이었다.

“야, 이 더러운 늙은이야. 힘없는 양민들에게 장리로서 옭아 매어 농토를 빼앗고 딸 같은 처녀를 노리개로 삼는단 말이더냐. 어찌 너는 인륜도 모르고 늙어서도 여색을 밝히느냐. 내가 몇 달 전 멍석말이로 죽도록 맞은 것과 달래를 빼앗아간 죄를 물어 너의 목을 따겠다.”

“어이구, 만수 총각. 이 목에 있는 칼을 거두게나. 내가 죽으면 자네의 부모들도 연좌하여 중형을 받을 거고 자네 역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네.”

“뭐시라고, 이놈아. 나는 총각이 아니고 달래하고 천지신명 앞에서 혼례를 올리고 부부의 연을 맺은 달래의 서방이라는 걸 알려두마. 살고 싶으면 달래의 집에 대한 장리계약서와 노비문서를 내놓아라. 지금부터 소리치는 순간 너의 목을 이 칼로 사정없이 딸터이니 빨리 문서를 내놓아라.”하고 만수가 독기 어린 눈으로 전참봉의 목에 예리한 칼을 들이대고 호령하였다.

전참봉은 사색이 되어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장롱 속 깊숙이 묻어둔 문서를 벌벌 떨면서 끄집어내었다. 만수가 다시 한번 호령하여 그 문서를 화롯볼에 던지라고 목을 움켜쥐고 칼끝을 들이댔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참봉은 문서를 건네니 만수는 막바로 화롯불에 태워버렸다. 이제는 차용증서와 노비문서가 소각되었으니 채권채무관계는 증빙이 없어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만수는 일어서서 다시 한번 전참봉에게 호령하였다.

“너 스스로 문서를 불태웠으니 이제부터는 달래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게 맞제. 관아에서도 증빙이 없으니 판결도 내릴 수가 없다는 걸 알거라. 목숨은 살려주고 싶으나 네놈이 내 아내인 달래의 몸을 더럽혔으니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피를 보여주어야겠다.”

“아이구, 여보게 만수 총각. 제발 그 칼만은 거두어 주시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조용히 물러가게나.”하고 전참봉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사정사정을 한다. 잠깐 만수가 칼을 그의 목에서 떼는 틈을 타서 전참봉이 강도를 잡아라 하고 외친다. 그때 만수는 들고 있던 칼로 전참봉의 옆구리를 깊숙이 찔렀다. 그리고 날쌘 동작으로 담장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동네는 난리가 났다. 만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는 없고 그의 집은 포졸들이 들이닥쳐 부모들을 포박하였다. 전참봉은 옆구리에 칼을 깊이 찔려 많은 피를 흘리고 생사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만수는 이제 전참봉이 살아나던 죽던 살인죄로 붙잡히면 사형을 당하는 것은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니 만수는 저 멀리 도망갔던지 아니면 강물에 몸을 던졌던지 둘 중에 하나이지만 당장은 그의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달래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부부의 연을 맺은 만수의 소식을 알 수가 없어 안절부절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얼마나 자기를 각시라고 여기면서 사랑해 주었던가. 그 억센 어깨며 넓은 가슴이며 그 포근한 품속에서의 황홀한 순간들이 밀려왔다. 이제는 한시도 잊을 수가 없고 만수가 없으면 살아갈 힘과 용기도 없었다. 몇 달 후에 만수의 칼에 옆구리를 찔려 간장을 크게 다친 전참봉은 시름시름 앓다고 세상을 떠났다. 이제 만수는 살인미수죄에서 살인죄를 저지른 흉악범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도 없고 살아서 잡힌다면 그 역시 사형을 당할게 뻔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흉흉한 소문이 마을에 들려왔다.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탄금대 근방 강물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오래되어 시신이 부패하여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는 상태이니 만수인지 다른 사람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어 그 시신을 거두어 강변에서 태워버렸다는 소문이었다. 아마 만수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죄가 크기에 달래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 간에 나눈 이야기였다.

“아이구, 만수가 불쌍하기도 하네. 그 짐승 같은 전참봉을 찌르고 달래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떠나가버렸으니 만수가 없이 어찌 달래가 살아갈지가 걱정이 되네. 그 혈기 넘치는 만수가 어찌 달래가 전참봉의 노리개가 되는 걸 참을 수가 있었겠는가.”

“비록 부모 앞에서 혼례는 못 올렸지만 사실상의 장인이 얻은 먹은 장리 낸 곡식의 채무도 다 없어졌으니 어찌 보면 효심 있는 사위라고도 할 수 있겠네. 이제 우리 동네에는 그 악덕 전참봉이 비명횡사했으니 장리 문제로 옭아매고 딸을 빼앗아가는 일은 없어지겠네. 어찌 보면 만수가 의인인 셈이야.”

“그러게 말일세. 만수가 몸도 장대하기에 만약 글을 배워 무과에 급제했더라면 이곳 달천 출신인 임경업장군 같은 무인이 되었을 텐데 아까운 인물일세. 좌우지간 그 불쌍한 달래를 달래줄 일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아마 만수가 달천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달래에게는 희망을 심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달래가 만수를 따라 목숨을 끊을지도 모르니 우리가 거짓말이라도 만들어 만수가 저 태백산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갔다고 말을 만들어 보세. 그리고 탄금대에서 떠오른 시신이 만수가 꼭 맞는지는 알 수도 없는 게 아닌가.”

“맞아, 만수가 큰 마음을 먹었다면 멀리 도망가서 혼자 살아갈 길을 찾아가지 않았겠는가. 내 짐작으로는 분명히 달래를 보러 야밤을 통해서 한번 나타날 것으로 보이네. 헛소문을 일부러 지어내면 안 되지만 만수가 살아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게 달래에 대한 도리라고 보아지네.”

“참으로 만수는 용기 있는 사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디 함부로 전참봉에게 달겨들기나 하였겠나. 전답을 빼앗기고도 어쩔 수 없이 소작을 하기 위해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떨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는 만수는 우리들의 한을 씻어준 공덕이 크다고 할 수가 있제.”하고 동네 어귀에서 사내들이 나눈 이야기이었다.


달래는 잠시 슬픔을 거두고 마을 사람들이 만수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추측성 소문을 듣고 살아갈 의욕을 되찾았다. 그가 생각해도 그 용감하고 겁 없는 성격으로 보았을 때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만수가 목숨을 내걸고 자신을 지켜준 데 대해서 부부로서의 애정에 대해 감동하였고, 매일 집안에 정화수를 떠놓고 안전을 빌기도 하였다. 문제는 만수가 살아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관아에서도 그것을 믿고 현상금을 붙여 추적하면 안 되기에 살아있다는 소문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만수가 살아있되 소문은 죽은 것으로 나서 관아에서 포기하도록 만드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달래의 염려를 들어주기 위해 만수가 죽은 게 맞다고 헛소문을 또 퍼뜨렸다.


세월이 몇 년이 흘렀지만 만수가 나타났다는 소문도 없고 조용하였다. 관아에서도 만수가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더 이상 추적을 안 하기로 하였다. 다행스런 일이지만 달래는 살아있을 것 같기도 한 만수를 하루라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수가 남겨준 선물인 노비에서 해방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섣불리 목숨을 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졌다. 달래는 그 마을에서 살기가 싫어 부모님이 다 돌아가고 난 뒤에 조용히 짐을 쌌다. 혹시나 모르니까 그는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암자에서 비구니가 되어 만수의 만수무강과 또 아니면 그 고독한 영혼을 천도해 주기로 하였다. 혹시 태백산에 머무르면 혹시 만수가 나타나서 만날 수도 있겠기에 출가를 결심하였다. 달래가 출가를 한 태백산속의 암자는 백두대간의 길목이기도 하여 심마니나 약초꾼들이 공양을 올리고 약수도 마시면서 지나가는 곳이었다. 달래는 매일 대웅전에서 만수를 만날 수 있도록 발원기도를 하였다. 어느 날 암자를 지나가는 심마니들이 있어 달래는 그중에 만수가 있는지 눈여겨보았다. 그렇지만 만수는 없었고 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 보았다.

“충주 달천가의 단월에서 어느 악질 노인이 칼에 찔려 죽었다더구만. 그 늙은이가 추노꾼을 풀어서 달아난 노비와 사내를 잡아서 크게 족쳐서 뒤에 큰 화를 당했다고 하더구만. 달아난 사내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기도 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는 소문이 떠돌더라구.”

“그래 말일세. 그 혼자 남은 여자를 위해 사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좋을 텐데 말일세. 그 사내도 약초꾼을 하였다고 하니 어쩌면 산길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니 선달산과 만나는 마구령 근방에서 약초꾼 행색을 한 장대한 사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사람이 그 사내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어허, 그렇다면 그 사내의 안전을 위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안 되겠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고 마음속으로나 잘되기를 빌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 심마니들이 고자질을 하겠다는 나쁜 생각을 하면 어찌 산신령이 산삼을 보여주겠는가. 그러니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있기를 빌어주세 그려.”하고 심마니들 간에 오간 이야기를 엿듣고 달래는 마음이 밝아지면서 조용히 합장을 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도 만수는 나타나지 않았고 소문도 들려오지 않았다. 달래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정말 답답하기만 하였다. 죽었으면 기다림을 포기하고 천도를 열심히 빌 텐데 살아있다고 한다면 만나기를 기대하여야 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달래는 심마니들이 지나가면서 던진 마구령 고개에서 만난 건장한 사내가 만수이기를 바랐다. 그는 매일같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마구령 쪽에서 오는 사내가 없는가 손꼽아 기다렸다. 얼마나 목을 빼고 기다렸는지 망부석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던 중 어느 날 밤에 대웅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가 있었다. 어둠 속이기에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고 조용히 부처님 전에 절을 하고 있지를 않은가. 그때까지 요사채에서 잠을 자지 않고 기도를 하던 달래가 인기척을 듣고 대웅전으로 등불을 들고 다가갔다. 조용히 대웅전 문틈으로 보니 어둠 속에서 사내가 절을 계속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뒤에서 보는 자태가 많이 본 사람 같아 살며시 문을 여니 그 사내는 옆문으로 황급히 빠져나가 산으로 숨어버리는 게 아닌가. 뒷모습은 틀림없이 만수 같기도 하고 달려가는 특유의 자세도 만수가 맞는 것 같았다. 달래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혹시 만수씨가 아닌가요. 달천강가의 단월의 만수말입니다. 나는 달래라고 합니다. 거기 잠깐 서서 얼굴을 한번 보여주시지요.”하고 화급하게 말은 하였지만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 사내는 눈앞에서 보이지를 않았다. 달래는 그 사람이 만수일 것이라고 여겨졌으나 도망가서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니 강한 기다림에 착시를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 달래의 눈에는 건장한 사내가 보이면 모두가 만수로 보이는 것인지 그의 머릿속은 온통 만수 생각으로 차 있었다. 그 이후로 달래는 밤이 되면 대웅전에 인기척이 있는지 계속 지켜보았다. 그런데 대웅전을 찾는 사내는 없었고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만 외롭게 울리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달래는 만수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

“아이, 여보. 여기에 웬일이신가요. 나는 죽은 줄로 만 알았는데 이곳 절로 찾아오셨구만요. 어디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서 살아갑시다.”

“달래야, 나는 그럴 수가 없단다. 이미 살인을 하여서 하늘밑에 고개를 들고 어찌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냥 멀리서 쳐다보고 부처님 전에 참회하면서 살아 갈려고 한단다.”

“내가 보고 싶으면 서쪽방향에 있는 마구령 쪽 하늘을 보면 구름 속에 나의 얼굴이 보일 것이야. 나는 날이 저물기 전에 살짝 이곳으로 와서 너의 얼굴을 보고 가겠다. 잘 있거라.”

“아이, 여보. 지금 어디로 가시는가요. 저의 손을 잡고 함께 갑시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꼭 부둥켜안고 살아갑시다.”하고 잠꼬대를 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달래가 꿈을 꾼 장면은 생시처럼 눈에 선하게 보였고, 얼굴과 목소리 또한 틀림없는 만수가 맞았다. 그는 만수가 멀 발치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고 믿었고, 자기와 함께하면 또 무슨 위험이 있을게 분명하기에 보고 싶고 끌어안고 싶지만 참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만수가 살아있어서 달래를 보았다면 분명히 가만있지를 않았을 수도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 닥쳐올 수도 있지만 그의 기질상 함께 또 도망을 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달래는 만수를 그리는 집착이 만들어낸 환상에 빠져있는 게 맞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환상이 달래의 꿈을 만들어 살아갈 희망이 되니 관세음보살이 꿈속에서나마 그런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일 수도 있었다.


달래강변의 단월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안개가 끼고 날이 흐리거나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는 바람소리인지는 모르지만 구슬픈 노래가 환청처럼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사공들이 들었다는 노랫소리가 있단다.

“어이어이 보고 싶은 내 각시여. 어이하여 인사조차 없이 이별을 하였는가. 밤이면 조용히 그대 방에 들러 껴안아보고 싶으라. 내 걱정일랑 말고 오래오래 살아가구려.”이 노래는 바람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게 맞을 것이다. 만수는 달래강에 몸을 던져 버렸던 것인가. 아니면 멀리서 달래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인가.

세월은 흐르고 흘러 달래도 세상을 떠났다. 달래가 머무르던 태백산 암자옆에는 어느 여인이 남편을 기다리는 모습의 바위가 있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 형상은 망부석처럼 보였다. 태백산을 지나가는 심마니들은 그 바위에 절을 하면 어김없이 꼭 산삼을 발견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 바위옆의 암자는 심마니들의 시주로 절 살림이 좋아져서 그 망부석 같은 바위를 소원을 들어주는 보살바위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 탄금대 아래 강가에서 날이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뱃사공들은 안전을 위하여 부르고 있어 그 노래는 달래의 노래라고 이름 지어 불리고 있었다. 달래의 한을 달래기도 만수의 한을 달래기도 하는 노래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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