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탄금대 전투
탄금대 전투에서 산화한 신립장군과 충신들
탄금대 전투
조정은 난리가 났다. 난리가 났으니 당연히 난리가 난 것이었다. 부산포에 왜군이 들이닥쳐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함락되고 왜군은 3군으로 나누어서 물밀듯이 또 태풍처럼 북진을 하였다. 제1군은 문경 방향의 소서행장이 2군은 추풍령 방향에 흑전장정이 3군은 죽령 방향의 가등청정이 서로 경쟁하듯이 한양을 향하여 진격해 가고 있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전투에서 정발장군과 송상현장군이 전사하고 민간들도 참전하여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왜군의 조총 앞에서 결국은 진로를 열어주고 말았다. 밀양을 거쳐가면서 왜군의 기세에 놀라서 수령들은 앞다투어 도망가고 군졸들도 흩어졌으니 전세는 보나 마나 한 상태였다. 순변사로 보낸 이일이 상주전투에서 고작 몇백 명의 군사로 대적했지만 코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어느 날 단월역참의 찰방인 백승영이 수안보에서 문경역 찰방인 김흥수를 만나서 나눈 이야기이다.
“아이구 김찰방, 수안보까지 말을 타고 직접 오셨구만요. 여기가 단월역과 문경역의 한참의 반인 반참이 되는 곳이니까 중간에서 만나는 게 맞지요. 급하니까 서로 말을 달려서 이곳에서 만났으니 화급한 상황이 맞긴 맞군요.”
“백찰방, 봉수대의 연기는 이제 믿기가 힘들고 하거니와 역졸을 보내느니 급하기도 하여 내가 직접 왔소이다. 이미 왜군은 상주까지 밀려왔으니 곧 이곳 새재를 공략할 것으로 보이오. 어서 충주목사에게 전하고 양재역까지 역마를 달려 조정으로 전갈을 보내야 할 것 같소이다.”
“김찰방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예전 같으면 이곳에서 탁배기나 한잔하면서 바둑이나 한판 두면 좋으련만 시절이 허락하지 않구만요. 술도 바둑도 나라가 편해야 하는데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언감생심이겠지요.”
“백찰방 말씀처럼 난리가 났는데 어찌 한가하게 바둑을 두겠는가요. 이제부터는 백찰방이 바둑의 묘수처럼 전략을 짜서 왜군을 유인하거나 포위하여 미생마로 만들어서 승기를 잡아야 안 되겠소. 허허.”
“그런데 나 같은 찰방이 무슨 영향력이 있겠소. 나는 있는 그대로 정세를 전달하고, 실행은 그 잘난 조정과 장군들이 알아서들 아니하겠소. 그런데 어찌 그렇게 허무하게 밀려 새재 코앞까지 왔단 말인가요. 이일장군이 내려갔는데 상대가 안되던 모양이지요.”
“말 마시게. 순변사 이일이 내려왔지만 군사라고는 고작 농꾼 출신 몇백 명이니 어디 제대로 싸움 한번 할 수 있었겠는가요. 하여튼 녹을 먹는 수령들이 지들이 먼저 살라고 도망을 갔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이까.”
“이제 곧 문경을 점령하고 왜군들은 새재 앞에서 우군의 동태를 파악한다고 잠깐 지체할 것으로 보이오. 아마 왜군들은 새재와 하늘재를 동시에 공략할 것으로 짐작되오. 바둑에서 성동격서 전법을 쓸 것으로 보이는데 백찰방이 그런 노림수에 대한 지략이 풍부하니 윗선에 잘 훈수를 두었으면 합니다.”
“김찰방, 무슨 뜻인지 잘 알겠소. 왜군들도 우군의 수(手)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이는데 전투가 바둑 하고는 다르고 군사를 다루는 것은 장군들이 하니 좀 답답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수시로 만나 좋은 전략을 마련하여 상부에 건의를 해봅시다.”
조정은 왜군이 밀양을 거쳐 대구까지 진입하였을 때 전세의 심각성을 알고 함경도 변방에서 오랑캐를 상대하던 신립을 긴급히 불러 내렸다. 거리상으로나 시간적으로 충주에 도달하는 것 보다도 왜군이 더 빨리 진입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신립은 기병을 주력으로 하여 급히 내려왔지만 제승방략에 의해 지역에서 군사를 모아야 하기에 훈련도 제대로 안된 농민군들이었다. 논에서 일하다가 핫바지 차림으로 차출된 말이 군사이지 농꾼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였다. 무기라고 해봐야 고작 창 정도이고 칼도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다. 거기에다가 조정에 대한 불만으로 사기도 저하되고 전투의지도 없었고, 모두 다 억울하게 사지로 내몰린 백성들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모든 정예병력은 북방변경에 집중되었고, 왜군의 침략에 대한 대비도 없었다.
신립이 충주성에 도착하여 충주목사 이종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목사, 이곳 충주에는 방어진지가 어디에 있고 왜군을 격퇴할 방도는 무엇이오. 나는 급히 함경도에서 내려오느라 전황에 대한 보고도 제대로 못 받고 기마병을 이끌고 적을 쳐부수라는 어명을 받은 게 전부요. 내가 무슨 제갈공명도 아니고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할 수도 없거니와 시간 자체가 너무 없소이다.”
“장군, 이곳 충주는 말이 충주성이 있고 남산산성이 있지만 충주성은 높이가 낮아 방어하기도 힘듭니다. 명색이 남산산성이 있지만 성벽은 무너져 있고 물자도 비축된 게 없어 유명무실한 상태입니다. 그나마 험준한 새재가 있지만 아마 시간을 놓친 것 같습니다.”
“잘 알겠소. 나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혹시 문경과 충주에 대한 지리를 잘 아는 부하들이 있으면 직접 물어보고 전략을 세우겠소. 내가 어찌 지형지세도 모르고 전투를 할 수 있겠소.”
“이곳 충주 달천변의 단월역참의 찰방을 소개할까 합니다. 그의 이름은 백승영인데 역졸을 거쳐 찰방에 이르렀고 숱하게 새재를 넘나들었기에 산세뿐만 아니라 요충지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치밀한 성격으로 전략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될것입니다.”하고 신립과 이종장이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하여 신립은 이종장으로부터 전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난감해하였다. 그가 충주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소서행장의 군대가 새재 입구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었다. 천혜의 요충지라고 하는 새재에서 방어를 하는 게 맞지만 군사들을 이끌고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수안보를 거쳐 연풍에서 3관문인 조령관으로 가기에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없었다. 허급지급 간다고 한들 산악전에는 별 볼 일 없는 기마병에다가 무기도 제대로 들고 있지 못한 오합지졸들을 대적시켜서는 승리하기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새재 사수가 절대적이었다면 신립이 내려오기 전에 충주목사가 미리 군사를 요충지에 포진시켜 놓았어야 했다. 새재가 요충지가 맞지만 활용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고 그냥 우왕좌왕하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신립도 치밀하게 전략을 세워 변방에서 승승장구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지형지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기마병을 투입한 것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말로만 듣고 눈으로 확인도 않았으며 시간적 여유도 없는 상태이니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윽고 이종장이 추천한 단월역참의 백찰방을 불러 나눈 대화였다.
“오, 그대가 백승영 찰방이오. 이목사로부터 이곳 지세에 대해서 훤히 꿰뚫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지금 형세가 어떻고 어떻게 군사를 배치해야 할지 화급한 상황이오. 새재를 방어하자는 게 중론인데 백찰방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외람된 말씀이오나 지금은 시간을 놓쳤다고 보입니다. 한 열흘 정도나 시간이 있으면 모르되 왜군은 이미 새재 입구에 도착했기에 새재방어는 위험한 자충수가 된다고 봅니다.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정예부대인 기병을 활용하는 전술을 권합니다.”
“허허, 다수의 의견과 다르지만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 같으오. 험난한 산세에 어찌 기병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오. 산에서는 준마는 소보다도 못할 수가 있다고 보오.”
“맞는 말씀입니다. 저가 이곳 지형지세를 다 파악하고 있는데 만약 새재에 진을 치면 협공을 받아 전멸할 위험이 있습니다. 충주로 가는 길목은 새재도 있지만 바로 옆에 하늘재도 있고, 하늘재는 요충지는 아니지만 적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기에 불안합니다. 아마 소서행장도 그 점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을 것입니다. 성동격서도 있을 수도 있고 양동작전도 가능하기에 왜군들로서는 꽃놀이 패가 되는 것이지요.”
“백찰방의 안목이 넓은 것 같으오. 그런데 말하는 전법이나 꽃놀이 패라고 하는 것이 바둑판에서 오가는 말인데 좀 재미있는 표현이오. 나도 바둑을 남 못지않게 두고 있다고 하는데 어찌 그리 내 생각하고 맞는지 신통하오. 그런데 어떻게 반대의견을 바꿀 수 있을지가 걱정이 되오. 특히 조정에서는 새재를 사수하라고 원론적인 말만 반복하니 답답할 지경이오. 허허.”
“장군께서 너무 유명하시다 보니 조정에서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습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데는 어명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따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인의 길은 승리의 가능성이 있는 길로 가는 것이고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가는 것이 충성이 될 수가 있다고 봅니다.”하고 신립과 백찰방이 나눈 대화이었다.
신립은 백찰방을 보는 순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검게 탄 얼굴에는 오랜 경륜과 성실성이 배여
있는 듯하였고 뭉툭하고 길쭉한 콧등은 강한 자존심을, 양뺨에 줄지어 새겨진 왕주름은 여러 갈래의 지략을 품고 있는 듯한 관상이었다. 말수가 적고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어투에는 강한 신뢰감이 풍겨 나오는 것을 느꼈다. 또 전쟁 중이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고 전투를 바둑에 비유하여 전략을 논하는 여유로움도 인상적으로 보았다. 한편으로 무례하기 보일지 모르는 책략을 가감 없이 개진하는 진솔함과 당돌함에서 직설적인 성향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과 맞아떨어졌다. 그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전략을 논할 수 있는 백찰방이라는 참모를 얻은데 대해서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신립은 이종장목사의 추천으로 백승영찰방을 부관으로 기용하여 조언을 듣기로 하였다. 아무리 날고 기는 명장인 신립이지만 어찌 지형지세도 모르고 무모한 전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와 생각이 같은 백찰방과 수시로 의견을 나누면서 대처해 나가기로 하였다. 백찰방은 지략도 지략이지만 새재 주변의 지형지물을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이니 지형에 어두운 신립의 눈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또 하나 전투에서는 자기의 주특기를 발휘해야 하는지라 멀리서 충주까지 몰고 온 기병을 활용하는 게 순리에도 맞았다. 산악전투에서는 짐 부리는 역할밖에 못하는 말은 한갓 느린 소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북방전투에서 기마전으로 전공을 세웠던 그가 아니던가.
그래서 신립은 기병전을 펼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기 위해 다시 백승영을 불렀다.
“백찰방, 아니 백부관. 지금 왜군들의 동향은 어떠하고 놈들의 전략이 무엇인지 함께 논의해 보세나. 아마 지금쯤 새재 깊숙이 들어왔다고 보이는데 동태를 파악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오.”
“장군, 지금 놈들이 주력은 새재에 포진하고 일부는 하늘재까지 올라갔다고 전갈이 왔습니다. 소서행장이 지략이 풍부한 장수인지라 나름대로 전략을 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적군도 우리의 전략을 모르니 다소 전전긍긍하고 쉽게 공세를 펼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말씀드렸듯이 새재방어는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나도 그렇게 보고 있소이다. 아마 소서행장도 직접 눈으로 새재의 지형지세를 보지 못했으니 신중하게 움직인다고 보여지오. 백찰방이 말했듯이 새재에 군사를 투입했더라면 낭패를 당할 뻔하였소. 그들이 하늘재를 가만히 둘리가 없고 협공을 구상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장군, 맞는 말씀입니다. 만약 조정과 예하 부장들의 말을 들었다면 전멸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우군의 본진이 새재의 출구에서 적을 기다렸다면 그야 말로 항아리에 들어간 물고기 신세이기도 기병들은 곤마의 지경에 빠졌겠지요. 저가 짐작하기로 놈들은 이미 하늘재를 넘어 송계까지 내려왔다고 보입니다. 바로 그 지점이 전략의 핵심 요처이라고 여깁니다.”
“어허, 백찰방께서 섬뜩한 말씀을 하시오이다. 전멸이라고 하는데 어찌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말씀이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고 보면 알 것 같소이다. 적군이지만 소서행장은 냉철하고 지략이 풍부한 장수라고 소문으로 듣고 있소이다.”
“장군, 우군이 새재에서 지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 놈들은 송계에서 방향을 수안보로 틀어 닷돈재를 넘어와서 연풍으로 치고 내려오면 우군은 독 안에 든 쥐가 되는 셈이지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위되어 치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우군이 새재에서 수안보를 거쳐 후퇴한다면 송계에 있던 적군이 월악나루를 거쳐 살미 방면으로 빠져나가면 우군의 퇴로도 역시 차단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새재에서 결사항전을 하더라도 포위되고 충주로 다시 후퇴하더라도 포위되니, 하늘재를 먼저 장악한 왜군들이 꽃놀이 패를 쥐고 있는 형국이 되는 셈이지요.”하고 신립과 백승영이 나눈 대화였다.
백승영은 신립에게 좀 무례하지만 있는 그대로 전황과 전세에 대해 건의하였다. 만약 신립이 부하들의 의견도 묵살하고 독단으로 새재를 포기하였다면 조정으로부터 명령불복으로 보여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백찰방 자신이 적극적으로 새재 사수에 반대하여 신립의 결단을 부추겼다고 주장하여, 만약의 경우에 신립을 구하기 위한 희생양이 될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결과는 전멸인데 남들이 하자는 데로 새재 사수에 힘을 실어주었다면 결국에는 충신이 아닌 역신이 된다는 것을 예감하기도 하였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소신을 진정성 있게 펼쳐서 신립을 올바른 길로 가도록 만들었다. 백승영은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면 새재와 하늘재에 군사를 적절히 배치하여 대응하는 게 맞지만 이미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새재 사수는 적의 양동작전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점을 전황 분석에 밝은 신립이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수용하였기 때문에 수렁에 빠지지 않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훈수를 잘 두고 실전 경험이 빈약한 백면서생 출신들인 군부에서 새재 사수를 계속하여 주문하였기에 신립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단 몇 명인 이종장과 백찰방 외에는 거의 전부다시피 새재 사수에 힘을 실어주었기에 여론에 따르지 못하고 패전하였을 적에 감당해야 하는 책임은 상상을 초월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신립은 결전의 시간이 목전으로 다가오자 초조해지기 시작하여 백승영을 다시 불렀다.
“백찰방, 이제 최종적인 결단을 내릴 시간이 온 것 같소이다. 마지막으로 새재 사수는 포기하고 다른 방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소이까. 나는 아직도 지도만 보고 충주의 지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를 못하고 있소이다. 기병전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략과 전투장소를 한번 추천해 보시게.”
“장군, 조정과 군부의 집요한 명령이 있지만 이제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승산이 있는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봅니다. 그자들은 지도 한 장만 보고 새재가 어떠니 사수하라느니 하는데 실상을 모르고 지껄이는 것입니다. 말이 천혜의 요충지라고 하지만 새재에 제대로 만들어진 진지도 없습니다. 관문의 축성이 된 곳도 없고 이름만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이라고 부르고 있답니다. 왜군들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전투경험이 많은 정예병들이기에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허허, 백찰방의 생각이 나하고 그대로 일치하는군요. 나는 패전한다면 책임을 다 지겠지만 혹시 그대가 화를 입을까 염려가 되오이다. 나라를 위하여 올바른 지략으로 승전을 하도록 우리 함께 최선을 다해 봅시다. 기병전을 할 수 있도록 왜군들을 유인하는 게 중요한데 묘수가 있으면 말씀해 보오.”
“장군, 소관의 생각으로는 왜군들을 빨리 유인하여 달천평야로 끌어들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봅니다. 왜군들은 필시 남산산성을 공략할 것으로 보이기에 산악전으로 가면 기병이 힘을 발휘 못하고 무기 또한 빈약한 우군이 불리해지니 왜군의 주력부대를 달천평야로 유인을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남산산성에 우군이 주둔하고 있는 듯하게 군기를 꽂고 북소리로 간간이 울리면 적들은 자연스레 달천평야로 달겨들 것입니다.”
“하하, 드디어 백찰방의 묘수가 나오는군요. 듣고 보니 기막힌 책략이고 적들도 분명히 유인책에 걸려 들것으로 보이오. 그러니 억지로 적의 진로를 막지 말고 열어주자는 것이고, 적들도 의심 없이 달겨들 것으로 확신을 하오.”
“장군, 또 하나 저와 막역한 사이인 문경역참의 찰방으로 있던 김흥수에게 부탁하여 조선군대가 조총에 겁을 먹고 후퇴하려고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도록 하였답니다. 아마 그들은 그 소문을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충주로 곧장 밀려올 것입니다. 지금은 지연작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게 관건이라고 봅니다. 이미 왜군 2진과 3진은 죽령과 추풍령을 넘었으니 전황은 뒤집을 수는 없고 오직 소서행장의 군대에게 결정타를 입혀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잠자고 있는 민심에 불을 질러야 한다고 봅니다.”
“백찰방, 그대의 비분강개한 자세에 깊은 공감을 하오이다. 어찌 무인도 아니면서 그렇게 용맹하고 충정에 넘친단 말인가요. 소장도 이미 목숨을 하늘에 맡겼고 왜군들을 유인하여 기병전으로 승부를 걸어 장렬한 결말을 맞을 각오를 하고 있소이다. 우리 두 사람은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여 적을 무찔러 역사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합시다.”하고 신립과 백승영이 나눈 대화이었다.
이렇게 하여 신립은 조정과 군부의 명령을 사실상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정하였다. 만약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 패전을 하게 된다면 비난을 면할 수는 있지만, 바른 길이 아니기에 책임을 다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길을 가기로 하였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일개 찰방으로 자신의 최고 참모 역할을 하고 있는 백승영에게 다가올 책임문제가 있었다. 하기야 백찰방이 신립 자신 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천평야에서의 승부를 주장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결전의 시간은 다가오고 신립과 백찰방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또 반대편에 있는 소서행장의 마음도 불안하기만 하였다.
새재에 진을 친 소서행장이 부장과 나눈 대화이었다.
“이보게 부장, 암만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를 않아서 결단을 내리기가 힘드네. 조선군이 새재에 방어를 하는 기미가 안 보인다니 혹시 우리가 계략에 빠져든 게 아닌가 걱정이네. 신립이라는 장군이 전략에는 뛰어난 무장이 아니던가. 공격도 없고 방어도 안 하니 고요함 자체가 불길하게 보이는구만.”
“장군, 저도 생각할 적에 매우 의아합니다.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나 조용하니 무슨 꼼수를 쓰고 있지 않은가 염려가 됩니다. 그렇다고 그 꼼수에 걸려 대마를 희생할 수도 없으니 안전한 전략을 펼쳐야 할 것 같습니다. 새재에 본진을 두고 2진은 하늘재로 보내었으니 새재를 서서히 넘어가 상황을 보아가면서 수안보에서 합류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맞아, 나도 안전하게 새재와 하늘재를 동시에 공략하면 병력의 숫자가 많은 우리가 유리할 것으로 보이네. 단 새재에 복병이 있어 급습을 당하지 않는다면 충주까지는 쉽게 갈 것 같다고 보여지네. 그 유명한 신립이 순순히 길을 터줄지가 의문이 가기는 한데 말이야.”
“장군,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군은 근 2만 명에 이르는 군사에다가 조총까지 가졌으니 두려워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 신립이라는 자가 과연 어떻게 대항해 올지가 정말 궁금하기도 합니다.”하고 소서행장이 그의 부장과 나눈 대화이었다.
이처럼 왜군들도 우군의 동태를 보고 의아해하고 한편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소서행장도 처음 발을 디뎌본 조선이라 지형지세는 말할 것도 없고 내륙 깊숙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산진성과 동래성 전투에서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밀양을 앞둔 작원관 전투에서 잠깐 주춤했지만 나머지는 파죽지세가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만만하게 무너질 조선의 군대가 아닌지라 방심만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제1군의 좌측에는 3군이 우측에는 2군이 동시에 진격하니 측면 공격으로 포위를 당할 염려는 없었다. 산수수전 다한 소서행장의 군대이지만 신립의 기병을 겁내고 있었고 타국에서 벌이는 전투라서 주민들도 잠재적인 적이기에 신중을 기하는 게 맞았다. 다음 날 신립은 백찰방을 불러 전황을 듣고 전략을 구상하면서 나눈 대화이었다.
“백찰방, 이제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고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소. 적들은 어디까지 왔으며 동태는 어떠하오. 혹시 집안에서도 신변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할 것으로 보이오. 나를 만나지 말고 그냥 무인이 아닌 찰방으로 남았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텐데 마음이 아프오.”
“장군, 어찌 남자가 한번 태어났으면 올바른 길을 가야지 남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길로 갈 수 있겠나이까. 집에는 노모가 계시지만 연로하여 살만큼 사셨고 그간 봉양을 잘하였기에 이목숨을 버린다고 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항상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던 선친의 뜻을 받들어 미련 없이 바른 길을 가고자 합니다.”
“백찰방의 우국충정에 눈물이 글썽거리오. 나는 운명적으로 무인의 길로 들어섰으니 전쟁터가 나의 터전이요 전장에서의 죽음이 영광이라고 믿고 있지요. 지금 적들의 움직임은 어떠하오.”
“지금 적들은 예상대로 달천을 따라 충주로 밀려오고 일부는 남산산성으로 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주력부대 대부분이 단월을 거쳐 풍동 쪽으로 오고 있다니 일단은 다행입니다. 내일이나 모레가 전투가 벌어질 것으로 보이는데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달천평야는 기병이 움직이기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이오, 나도 왜군들이 남산산성으로 주력부대를 안 올려 보내고 달천평야로 오기를 바랐소이다. 이제까지는 비가 안 와서 다행인데 내일모레까지 우천이 아니기를 하늘에 빌어보오. 그날 달천평야에서 어떤 전법을 쓰면 좋을까 의견을 듣고 싶소. 만약 바둑으로 치면 판세가 어떠하다고 여기시오.”
“현재까지 비가 오지 않아 다행입니다. 우천이면 기병의 움직임이 둔해서 힘든 싸움이 되겠지요. 우군이 병력도 밀리고 무장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기병들을 최고도로 활용하여 적을 단숨에 몰아부쳐 예봉을 꺾고 나서 군사의 사기가 오르면 백병전을 벌여야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진법은 적을 기마병으로 포위하는 학익진이어야 하겠지요. 그 후방에는 군졸들을 따르게 하면 승기를 잡을 수가 있을 겁니다.”
“장군, 바둑으로 치면 우군이 포석단계에서 이미 패착을 두고 말았다고 봅니다. 우선 안전하게 양쪽 귀를 장악하여 근본을 튼튼하게 해야 하는데 적이 선점을 해버린 셈이지요. 오직 중원으로 진출하여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우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백찰방, 어찌 그렇게 나와 같은 생각이오. 내가 생각해도 시간을 놓쳐버려 요처에 포석을 하지 못한 실책이 크다고 보오. 이종장이나 김여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은 없고 자나 깨나 새재 사수나 외치더니 이제는 말도 별로 없네 그려. 그들이 지략이 있어야 말이나 하지 조용히 있어 주는 것만 해도 고 맙다고 보아야겠지요. 내가 끌고 온 기병들은 어서 빨리 전투가 벌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소이다.”하고 신립과 백찰방이 대화를 마무리하였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지만 불길한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으니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녁부터 굵은 빗줄기가 퍼붓기 시작하여 달천은 불어나고 평야는 흥건하게 물이 고여 질퍽거렸다. 제일 염려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어쩔 수가 없는데, 상주전투에서 도망쳐온 이일장군이 싸우지 말고 한양으로 후퇴하자고 김 빠지는 소리를 하였다. 성질 같아서는 군령으로 목을 치고 싶었지만 이일이 경험한 상주전투 이야기를 들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일은 신립에게 항상 전투가 벌어지면 오합지졸인 군사들은 필히 도망갈 궁리를 한다고 귀띔을 해주기도 하여 상주전투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신립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병전의 승부수가 통하여 승기를 잡으면 군사의 사기가 올라 도망가지 않겠지만 불리해지면 도망병이 속출할 것이라고 짐작해 보았다.
다시 신립은 백찰방을 불러 의견을 나누었다.
“아이구 백찰방, 비가 내려서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군요.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정말로 안타깝소이다. 멀쩡하던 하늘에서 하필 그렇게 비가 내린단 말인가요. 소장의 덕이 부족한 건지 기병전을 중단하라는 뜻인지 알 수가 없소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다른 방책도 없고 기병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터라 맞붙어 보았자 참패는 정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오.”
“장군, 소관도 하늘이 무심하다고 원망하였답니다. 진심이 부족한 것인지 천지신명에게 묻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항상 바른편에 선다는 하늘의 깊은 뜻이 담겼는지는 후일에야 알게 되겠지요. 지금 전략을 바꿀 수도 없고 바꾼다 한들 승리를 보장할 수도 없다고 보니 그대로 밀고 나가시지요.”
“소장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기병전으로 학익진을 펼치는 것은 정해졌고, 이일장군이 전세가 불리해지면 군사들이 필히 도망을 친다고 하니 대책이 없겠소이까. 이곳 지리를 잘 아니 도망을 못 가게 하는 방도를 찾아야 하오.”
“장군, 소관도 그 점을 염려하였는데 승기를 못 잡으면 분명히 도망병이 속출할 것입니다. 직업 군사들이야 그들의 사명이니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지만 농민출신인 차출된 군사들은 살길을 찾아 도망을 갈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을 위해서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쳐야 합니다.”
“허허, 배수의 진이라. 한신장군이 결사항전을 위해 강을 뒤에 두고 전투를 치른 진법이 아니던가요. 물러서면 강물에 빠져 죽으니 살기 위해 앞으로 나가겠지요. 그것은 최악의 경우이지만 상황에 불리해지면 탄금대로 올라가서 결사항전을 합시다 그려.”하고 신립과 백찰방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드디어 달천평야에 우군과 왜군들이 대치하여 싸우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늘은 개었으나 어제저녁까지 내린 비로 달천평야는 질퍽거려 기병이 움직이기에는 조건이 매우 나빴다. 신립은 좌우로 넓게 기병을 전개하고 양 날개로 감싸는 학익진을 짰다. 먼저 우군의 기병이 일제히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고 왜군들은 조총으로 응사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달천평야가 질퍽거렸지만 말은 힘이 비축되어 있어 첫 출전은 그런대로 우위를 점했다. 시간이 갈수록 뻘밭이 되어버린 평야에 말발굽이 빠져 기동력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이때를 이용하여 적군들이 돌진해 왔다. 점점 밀리더니 반나절이 못되어 우군은 탄금대까지 물러나고 뒤에는 남한강이 버티고 있었다. 신립을 비롯한 이종장과 김여물이 군사들을 독려하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런데 이일장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전사하였는지 도망갔는지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상주전투에서도 도망쳐왔고 어제 한양으로 후퇴하자고 제안을 하였기에 도망을 쳤을 거라고 짐작이 갔다. 신립은 나지막한 대문산으로 피신하여 최후의 항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탄금대에서 급히 백찰방을 불러 나눈 대화이었다.
“허허, 백찰방. 이제 운명의 시간이 당도한 것 같소이다. 하늘이 도와주었더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는데 뻘밭이 되어버려 말들이 허우적거리니 어쩔 도리가 없었오. 그래도 백찰방이 함께 하여주어 기병전을 펼쳐보았고 왜적들에게 조선군사들이 용감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게 그나마 다행이라 보오. 이제 물러설 곳도 없으니 살아있는 이 시간에 서로 이별의 인사를 나눕시다. 그간 소장의 마음을 알아주었고 뜻을 같이 하였기에 눈물이 글썽거리오.”
“장군, 비록 승기를 못 잡고 탄금대까지 밀렸지만 군사들은 죽기 살기로 잘 싸우고 있습니다. 어머마한 숫자인 적들의 조총 앞에 퍽퍽 쓰러져가지만 도망가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민심이 들끓어 오를 거로 보입니다. 비록 우리 눈으로 승리의 깃발을 보지는 못했지만 역사는 이곳 탄금대를 기억할 것입니다.”
“백찰방은 죽음을 이미 예견한 듯이 죽어야 승리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소이다. 거기에다가 충주전투에서는 못 이기더라도 더 큰 전쟁에서는 이겨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소이다. 우리 8.000 군사가 장엄하게 산화하여 도망친 수령들과 군사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의병들이 들고일어나는 계기가 된다고 말입니다. 이곳 달천평야에서 기마병의 긍지를 지키게 하고 후일을 거룩하게 하자는 뜻이 들어있다고 보여지오. 아마 우리 둘은 전생에 국가에 충성한 신하들이었을 것이라고 문득 생각이 들더이다.”
“장군, 어찌 소관을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오이까. 저는 장군을 만나서 나라에 충성하는 길로 들어선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비천한 역리 출신인 저를 부관으로 임명하여 주시고 저의 의견을 다 반영하여 주셨으니 죽어서도 장군과 함께 하기를 맹세하였답니다. 부디 다음 생에도 함께 만나 뜻을 같이하여 의로운 길로 갔으면 합니다.”하고 신립과 백찰방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마지막 뜨거운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생전에 할 수 있는 이별인사를 장엄하게 나누었다. 신립은 탄금대 정상에서 결사항전을 하다가 조총에 맞아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상황을 지켜본 백찰방은 그에게로 달려가 부둥켜안고 눈을 감겨주었다. 총에 맞은 신립의 왼쪽 가슴팍은 붉은 핏물로 물들었고 백찰방의 눈물이 더해져 진달래꽃 같은 분홍색으로 변하였다. 백찰방은 시신을 적에게 빼앗기면 수모를 당할게 뻔하므로 그를 업고 남한강가의 절벽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천지신명에게 절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에 신립장군의 시신을 안고 뛰어내려 자진하였다. 그 두 명 충신의 시신은 흘러 흘러 남한강을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갔고 왜군은 신립의 시신을 찾으려고 하였지만 허탕을 쳤다. 마지막으로 고귀한 육신에 더러운 왜적의 칼날이 미치지 못했으니 치욕은 면하였다.
왜군이 물러가고 난 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계절에 탄금대를 찾은 한 사람이 있었다. 삿갓에 얼굴을 가리고 길게 기른 수염을 내밀며 괴나리봇짐을 지고 바위언덕에 올라서서 혼잣말을 하였다.
“백찰방, 내가 이곳을 늦게 찾아온 걸 용서하게나. 세상을 더 함께 살지 못하고 혼자 떠나보낸 게 아쉽네. 좋은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눈터지는 계가바둑을 두면서 세상을 즐겼을 텐데 말일세. 우리가 함께 역리로 출발하여 찰방까지 이르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곳을 옮겨 다녔던가. 나는 아직도 그 역마살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 다닌다네. 자네는 부디 더 이상 떠돌지 말고 극락에서 머무르며 영혼을 편히 쉬도록 하게나.”하고 가져간 청주를 한잔 따르며 큰 바위를 부둥켜안고 재배를 한다. 그 사람은 김흥수찰방이었고 문경이 왜군의 손에 들어가자 뜻이 맞는 역리들을 이끌고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유격전을 펼쳤었다. 남한강이 노을에 젖어오고 탄금대에 어둠이 깔려올 때 조용히 일어서서 죽장을 짚고 산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주막에 앉아서 지난 전쟁을 복기해 보았다. 바둑으로 치면 만방으로 진 것이 되겠으나, 그냥 돌을 던진 것이 아니고 최후의 돌 하나까지 혈전을 벌였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쨋던 적들을 중원으로 내몰아 반전을 기대했지만 생존의 법칙인 딱 두 집을 내지 못하고 탄금대라는 최후의 벼랑 끝까지 내몰려 옥집이 되어버려 장렬하게 막을 내렸던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탄금대에는 신립장군이 전사한 곳에 비석이 세워지고 최찰방이 신립의 시신을 안고 뛰어내린 곳은 열두대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신립이 탄금대전투에서 전사하였고 8,000 군사가 물러섬이 없이 결사항전하다가 전멸하였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영남과 호남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창기하고 구국을 위한 민심에 불이 붙었다. 비록 패전을 하였지만 그 숭고한 구국충정의 정신은 잠자고 있던 의분을 일깨워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그 후 전황은 반전되어 왜군들은 물러갔고 남은 것은 한스런 역사의 장면만 있았다. 역리 출신으로 무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로 당당히 걸어간 백찰방과 같은 인물들도 기억해야 하겠다.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숨은 충신들의 자취는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 자락에 피어있는 진달래꽃으로 분신하여 쳐다보고 있지 않았던가.
신립장군, 그는 조정과 군부의 의견에 따라 새재를 방어한다고 군사를 그곳으로 보냈다면 자신은 패장이 되었겠고, 흩어진 군사들은 도망병으로 낙인찍혔을 것이었다. 신립은 자신이 비록 패장이 되더라도 부하들과 농민군들을 도망병으로 만들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었다. 비록 중과부적으로 승리를 보장받기도 힘든 상황에서 장엄하게 산화하여 의분에 찬 민심에 불을 당기는게 승리 못지않은 귀한 성과일 것이었다. 역사는 흐르고 나면 억울한 장군의 한을 풀어주고 전몰한 8,000 군사들은 호국의 간성이 될 것이다. 신립, 그는 죽음으로서 더 큰 공을 세웠으니 그것은 탄금대에 얽힌 역사를 기억하게 만들고 후손들에게 충절의 큰 뜻을 기르게 해 준 역할일 것이다.